아침에 적을 치고 저녁에 조국의 산에 묻히다

완도신문 김남철 2023. 9. 8.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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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준성 의병장, 일제에 맞서 싸우다 순국…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완도신문 김남철]

ⓒ 완도신문
남도민주평화길을 걷는다.

남도 어디를 가든지 풍전등화 백천간두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구국의 의병들이 있다.

'사생취의(捨生取義) 삶을 버리고 의로움을 취하다'. 의병들이 간직한 정신을 다시 새긴다.

난망한 시국이다. 공정과 상식이 무너지고, 민주와 평등이 흔들리고, 냉혹한 국제정세 앞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신뢰와 협력의 정신이 무너지니 국가 안위가 위태롭다. 도대체 이 시국이 어떻게 될까, 걱정하는 시민들의 한숨소리가 아프다.

남도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두륜산(700m)은 소백산맥의 최남단에 위치한 전라남도 해남군의 명산이며 다도해해상국립공원과도 인접하고 있다. 두륜산이 품은 대흥사는 사시사철 많은 관광객들이 오고 가는 남도의 대표적인 사찰이기도 하다. 

2018년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경내에는 국보 제308호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을 비롯하여 국가지정문화재 7점과 시도지정 문화재 6점, 그리고 13대 종사와 13대 강사 등의 부도와 비석들이 소재한 역사적·학술적으로 중요한 유적지이다.

무엇보다 풍경이 아름답고 남해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두륜산과 대흥사는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온다.

대흥사 입구에 정교하게 세워진 기념탑이 있다. 그런데 무심코 지나가거나 눈길 주지 않는다. 얼마나 외롭고 서운할까?

남도 해안을 지킨 의병들을 만나러 간다.

미처 알지 못했던 해남과 강진 일대를 오가며 일제에 저항했던 황준성의 의병장과 심적암 전투를 기억하자.

대한제국 참령에서 의병에 투신하다

황준성 의병장(1879∼1910)은 전북 진안군 남면에서 태어났다. 대한제국 군대 참령에 오를 정도로 군사적 능력이 탁월했다. 참령이라는 직책은 현재의 소령에 해당하지만 당시는 대대장으로 3품이었고, 장군으로 불렸다. 일제 강점기 참령 이상으로 의병장이 된 인물은 이동휘와 황준성 뿐이다. 실제로 황준성 의병장의 유배 사실이 순종실록에도 나올 정도로 소위 장도가 유망한 군인이었다. 1907년 군대 해산 직후 최익현, 임병찬이 주도한 태인 의병에서 윤현보·이봉오·추기엽 등과 함께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1908년 1월 내란죄의 명목으로 유배형 10년을 받고 전남 완도로 이송되었다.

한편 1908년 말에서 1909년 초를 전후하여 의병들은 일본의 대토벌 작전을 피해 남쪽 연안과 도서지방으로 이동했다.

일본 측은 당시 전라남도 해안지방을 의병 활동 근거지로 간주하였다. 1909년 초 도서지방이 전남 의병의 주된 활동 무대로 바뀌자, 이 지역으로 유배 온 인물들이 의병에 다시 투신하기도 하였다. 유배생활을 하던 황준성은, 향교에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봉오·추기엽 등이 전주지방재판소에서 10년 유배형을 받고 완도로 오자1909년6월 유배지를 이탈해 의병 투쟁에 나섰다.

대둔사 심적암에서 안타깝게 패전하다

"7월8일 오후11시, 해남군 대둔사에 의병장 황준성이 인솔하는 의병 150명이 의진을 이루고 있다는 보고를 접했다. 하사 이하21명을 인솔한 장흥수비대 요시하라 대위는 헌병대 상등병 2명과 보조원 3명, 동 주재소 일인 순사1명과 한인 순사 2명과 함께 연합 토벌대를 구성, 즉시 그 사찰을 향하여 급행하였다. 연합 토벌대는 의병들을 포위하고,다음날 오전4시30분 전투를 개시하여 약2시간30분 만에 의병들을 침묵시켰다." - <폭도에 관한 편책> 중에서

당시 그곳에 있었던 의병 68명 가운데 24명이 전사하고, 8명이 피체되었다.

겨우 피신한 황준성 의병장은 일제의 대토벌작전으로 더 이상 의병 투쟁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의진을 해산하였다.

황준성 의진은 일제를 등에 업고 날뛰던 일진회원 박원재와 일본 헌병 밀정 진태진을 총살하여 친일행위를 하는 무리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다음 날 미황사 및 대둔사(대흥사)부근에 의병들을 배치한 후 의진의 본거지로 정한 대둔사 심적암으로 향했다. 

하지만 밀정의 신고에 의해 근거지가 발각되었다.

신고를 받은 일본 군경 연합 토벌대는 의병들이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급습하여 불을 지르고 학살을 자행하였다.

도서 지역의 의병 대장 황준성을 기억하다

완도의 이덕삼 의진의 부장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황준성 의병은 이후 김성택 의병장의 부하로 참여하여 총기로 무장하고 해남 및 고금도·청산도 등 인근 도서에서 활동하면서 친일 조력자 색출에 나섰다.

황준성 의병의 과거 신분을 알게 된 김성택 의병장은 의진의 대장을 맡아 줄 것을 간청한다.

또한 먼저 유배지를 탈출하여 호남 지역에서 맹활약하던 추기엽 의병장이 역시 완도로 돌아와서 의진을 이끌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리고 인근 지역에서 활약하던 황두일 의병장도 역시 의진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1909년7월 황두일·추기엽·김성택 등은 해남군 북종면(현 북평면)에 모여 황준성을 대장으로 추대하여 전열을 정비하였다.

이들은 유배·토착 주민들을 중심으로 의병부대를 이끌었다. 당시 일제의 조선 어민들에 대한 어업 활동 제한으로 불만을 가진 도서 지역 주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이 있었다. 심적암 전투 이후 일본군은 황준성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포로로 잡힌 의병들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황준성 의병장은 부하들에게 고통을 줄 수 없다고 결심하고 자진하여 체포되었다.

황준성 의병장은 1910년 2월 26일 광주지방재판소 목포지부에서 소위 폭동 및 모살 혐의로 교수형을 받았다. 이어 대구공소원에서 교수형이 확정돼 순국했다.

정부는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남도민주평화길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해남의 의병과 항일운동에서 민주화운동까지 안내를 해왔다. 임진전쟁의 의병 활동, 한말의 의병 활동, 그리고 일제 강점기의 항일독립운동이 꾸준히 이어져 오고 있다.

그리고 현대사에서 남도인들은 억압과 차별에 저항하며 민주와 평등한 세상을 위해 투쟁하였다. 

그들의 의롭고 당당한 정신은 여전하다. 남도의 해안과 도서를 오가며 의병활동을 전개한 황준성 의병장. 그와 같이 했던 황두일, 추기엽, 김성택 의병들을 기억하는가를 묻는다.

바쁘게 앞만 보면 달리지 말고 길가에 외롭게 서 있는 비석과 탑들의 내력을 들여다보는 관심과 애정이 필요하다.

심적암 전투 깊은 골짜기에 자리잡은 심적암을 찾아가는 길은 외롭고 쓸쓸하다.

밀정에 의해 탄로 나고 무참하게 죽어간 이름없는 의병들은 우리 기억 속에 없고,낡은 표지판에 남아 있다. 성벽은 무너지고 잡초만이 무성하다.

아무도 찾지 않는 두륜산 깊은 산자락에 의병들의 지친 영혼을 달래주었을 심적암 우물터가 남아있다.

이제라도 다시 기억하고 또 기록하자. 몰랐으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알려고 하고, 알았으면 기억하고 계승하자.

친일청산과 민족정기 수립은 우리 시대의 과제이자 해결해야 할 책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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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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