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 파괴, 파괴적 창조
[완도신문 최재원]
▲ 영화 <오펜하이머> 스틸 이미지. |
ⓒ 유니버설 픽쳐스 |
최근 극장가를 강타한 할리우드 신작 영화가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이론 물리학의 대가이자, 최초의 핵폭탄을 개발했던 과학자의 일생을 필름에 담은 <오펜하이머>이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 이후에 과학이라는 학문과 접점을 맞닿은 일이 없다. 고등학교 2년을 문과 학생으로서 보냈으며, 이후 대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도 사회과학도로서 지리, 일반사회, 역사 등을 공부했고, 이후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그러한 분야의 과목만을 강의한 지 8년이 지났다. 앨버트 아인슈타인, 아이작 뉴턴, 뢴트겐 등 이름을 한번쯤 들어봤던 유명한 과학자들도 있었지만,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라는 과학자에 대해서는 왜 이제야 이름을 듣게 됐을까 싶을 정도로 과학 분야에서는 엄청난 업적을 가진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영화의 내용은 이러하다. 세계 2차 대전의 전운이 드리웠던 1940년대 초, 미국으로 건너간 독일계 미국인 부모님 밑에서 태어난 유대인 오펜하이머는 유년 시절을 미국에서 보낸 후, 탁월한 과학적 재능을 발휘하며 미국 유수의 대학들에서 수학한다. 저명한 또 다른 물리학자였던 보일 교수의 조언에 따라 독일의 괴팅겐 대학을 비롯한 유럽에서 유학 생활을 하기도 하는데, 이때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등 독일의 유명 물리학자와도 교류하는 계기가 된다.
이후 미국으로 귀국한 오펜하이머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는 교수가 되는데, 유럽을 넘어 세계를 지배하려는 야심을 가진 나치당의 히틀러가 손에 핵폭탄을 갖는 것을 저지하려는 이른바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할 것을 미국 정부로부터 제안받는다.
나치당의 인종 청소 정책으로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탄압받았던 유대계 이민자 과학자들 또한 이러한 계획에 함께 참여하게 되는데,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실험 프로젝트였다고 한다. 이들은 뉴멕시코주에 있는 황량한 사막 지대인 로스 앨러모스에서 하나의 거대한 마을을 만들어 가족들과 함께 거주하며 핵무기 개발에 몰두하게 되고, 결국 독일보다 앞서 플루토늄을 이용한 핵폭탄 개발에 성공한다. 그리고 개발된 핵폭탄들은 일본의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투하된다.
영화에서는 '악당 나치보다 먼저 자유진영의 리더 미국이 핵폭탄 개발에 성공했고, 이것으로 악마를 무찔렀다'라는 단순한 플롯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펜하이머는 과학자로서의 자신의 역량에 상당한 자신감이 있었고, 핵분열을 활용한 핵무기 개발에 성공해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로 두려워한다. 어쩌면 인류를 파멸시킬 열쇠를 자신이 만들어냈을지 모른다는 죄책감으로, 세계대전 종전 이후에는 반핵주의자로 핵무기 반대 운동을 펼치기도 한다.
상당히 진취적인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오펜하이머는 공산주의와 노동운동 등에 상당한 관심이 있었는데,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근무할 당시에도, 교수도 노동조합을 만들어 활동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는 이후 그의 인생에 커다란 오점으로 남게 된다.
2차 세계대전 승전 이후, 매카시즘(반공주의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배척하는 패러다임)이 지배했던 미국 사회에서 그는 공산주의 지지자이자 핵무기 개발 기밀을 소련으로 빼돌린 스파이로 몰려 온갖 청문회장에서 난도질을 당하며 수모를 겪는다. 영화 말미,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이 나눴던 짤막한 대화 한 토막이 소개되는데, 중성자가 플루토늄 원자를 때려, 연쇄적인 원자 분열을 야기하는 핵폭탄에 자신의 인생을 빗대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알버트, 파멸의 연쇄 반응이 시작된 것 같아요.' 제목에 언급했듯이, 그는 세계를 정복하려는 나치로부터 세상을 구하기 위해 핵폭탄을 창조했지만, 그것은 어쩌면 온 인류를 파멸로 몰아넣을 수도 있는 재앙의 시작이었고, 과학자로서의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펼치기 위해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지만, 그것은 이후 스파이로 몰려 비참한 말년을 보내게 되는 비극의 시작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영화를 감상하며, 세상과 사람들을 딱 절반으로만 나누어 보는 것은 비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얼마나 안타까운 인생일까? 반공주의자들에게는 오펜하이머라는 사람이 스파이로만 보였을 것이고, 핵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핵폭탄을 창조한 파괴의 군주였을 것. 하지만, 그 또한 다양한 서사를 가진 한 명의 입체적 사람이었기에, 수많은 시간이 지나도 그의 이야기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영화에서도 독특한 연출이 돋보인다.
반공주의자들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전개될 때에는 흑백 화면으로, 오펜하이머의 시선으로 전개될 때에는 풀 컬러의 화면으로 영화가 상영된다.
요즘 우리나라에 드리우는 매카시즘의 그림자가 다채로운 색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복한 일상을 무채색으로 탈색시키고 있지는 않은지... '공산당 기관지와 같은 언론 통제'를 운운하는 방송통신위원장 내정자, 일본 원전 오염수 방류를 반대를 '거짓 선동'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여당 대표, 광복절 축사에 일본과의 협력을 이야기하며 '공산전체주의'를 언급하는 대통령 등...
이데올로기 또한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이상향처럼 보이지만,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고, 사고를 멎게 하며, 서로를 죽이고 싶을 만큼 갈라서게 만든다는 점에서 핵폭탄과 결코 다르지 않다. 그 둘은 탄생하면서부터 필연적으로 파괴를 잉태한 존재들이었다. 다양한 색채의 세계를 다시 창조하기 위해, 온 세상이 파랗고 빨간 색으로만 보이는 그 색안경을, 우리는 반드시 파괴해야만 한다.
최재원(완도중학교 사회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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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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