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 없는' 현실에 저항하는 여성들
[최현준 기자]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 보면 솔직한 고민을 털어놓곤 한다. 술기운을 빌려 가끔은 인생에 대한 푸념과 해결되지 않을 고민들을 종종 하곤 하는데, 그럴 때면 위로답지 않은 위로가 들려오곤 한다.
"어쩔 수 없지 뭐."
친구 딴엔 위로로 한 말이겠지만, 술김에 부끄러움을 감추고 입을 뗀 나에겐 기운이 주욱 빠지는 답변이 아닐 수 없다. 체념이 아닌 위로가 필요했었나. 나 역시도 "그래... 어쩔 수 없지 뭐" 하고 씁쓸하게 소주잔을 비운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점점 커지고, 조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현대 사회에서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남발하곤 한다. 문제에 맞서 싸우기보다 현실에 순응하는 방향을 택한다. 세상은 원래 그렇고, 현실은 어쩔 수 없다고.
▲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 최은영 최은영의 세번째 단편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
ⓒ Yes24 |
있는 일을 없는 일로 두는 것. 모른 척 하는 것.
- '답신' 150p
지금까지 최은영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전부 여성들이었고, 이번 소설집 역시 마찬가지다.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포함한 7편의 소설은 모두 여성의 시각으로 전개되었다. 저자는 각 작품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어쩔 수 없이 희생당한, 혹은 강요당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여성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가장 많이 놓이는 때는 바로 결혼과 육아를 맞닥뜨릴 때이다. 여성은 결혼 후 '아내'라는 지위에, 출산 후 '엄마'라는 위치에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삶을 포기하게 된다.
"그때야 다 그랬다지만 ... 다 그랬던 건 아니야."
- '이모에게 ' 237p
그러나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굽히지 않는 사람이 존재한다. 단편 '파종'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딸 '소리'와 그녀의 오빠 '민혁'은 타인의 고까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길을 걷는다.
민혁은 '소리'를 어른스럽다고 칭찬하는 이들에게 정색하며 '아이는 아이다워야 한다'고 말한다. 또, 잔인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빨리 철이 들어야 한다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의 규칙을 경계한다.
이들은 '텃밭 가꾸기'라는 다소 쓸모없어 보이는 일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며 세상이 정한 행복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한다.
단편 '이모에게'에 등장한 나의 '이모' 역시 어쩔 수 없는 세상에서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이상적이고 고집스러운 사람으로 보일 수 있지만, 다르게 말하면 남들이 정한 대로 살지 않는 사람이기도 하다.
어렸을 적부터 이모에게 자란 소설 속 '나'는 그러한 모습이 못마땅해 보이기도 하지만, 어른이 되자 조금씩 이모의 삶을 이해하게 된다. 꿈쩍 않는 세상과 맞서 싸운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어쩔 수 없다'는 말은 사용하는 방법에 따라 인생을 수월하게 살 수 있는 마법 같은 문장이 될 수도 있고, 스스로를 상실하는 파괴적인 문장이 될 수도 있다. 현실의 벽에 부딪혀 도저히 견디기 힘든 날에 우리는 '어쩔 수 없다'는 말로 죄의식과 책임감에서 잠시 벗어나 실패자가 된 느낌을 덜어낼 수 있을 것이고, 이는 분명 긍정적인 정신상태를 가져오는데 큰 힘이 될 것이다.
그러나 위 소설 속 인물들이 그러하듯 어쩔 수 없는 현실에 순응하고 스스로를 포기한다면 결국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개인이 노력해도 사회는 바뀔 수 없으니까',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니까'와 같은 좌절감과 무기력은 결국 더 큰 자책을 불러일으킨다.
사회의 냉철함과 현실의 쓴맛을 겪은 이들에게 무작정 노력하라는 말이 아니다. 시도도 해보지 않은 채 무작정 남을 탓하고, 사회를 비판하는 자신에게 솔직하게 물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때, 진정으로 '어쩔 수 없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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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최현준 시민기자의 개인 브런치에도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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