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터리, 위기를 묻다]"인재없어 은퇴자 모실판…골든타임 놓친다"
중견기업 이하로 갈수록 더 심각
대기업 퇴직 임원 경험 전수 필요
"정부주도 인력 양성·R&D지원사업 절실"
편집자주 - 한국 배터리 산업은 과연 다음 첨단산업 먹거리가 될 수 있을까. 미래 가치를 먹고 사는 주식 시장을 보면, 배터리 산업의 최근 분위기가 달라졌다. '황제주'로 등극한 에코프로는 100만원선을 위협받고 있다. 배터리 대형주들의 주가가 한풀 꺾이면서 '위기론'이 고개를 들었다. 글로벌 불황과 전기차가 덜 팔린 영향이 크다. 성장과 정체의 갈림길에 선 우리 배터리 산업의 위기를 공급망·가격 경쟁·인력난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다시 한번 들여다봤다.
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온 등 국내 배터리 3사는 최근 1년 새 총 3500여명을 충원했다. 한국배터리산업협회가 집계한 배터리산업 인력 부족 규모는 2021년 말 기준 4000명. 하지만 업계는 아직 인력에 목마르다.
인력 수급 문제는 심각한 수준이다. 기업은 배터리를 전공했거나 배터리에 대해 잘 알아서 당장 현장에 투입할 수 있는 실무형 인재를 원한다. 하지만 대학에선 이제야 석·박사 과정 위주로 배터리 과목이 만들어지고 있다. 당연히 인력 공급이 원활하지 않다.
배터리 셀 제조업체나 배터리 소재사 모두 인력난을 겪고 있다. 중견기업 이하로 갈수록 더 심각해진다. 배터리 3사나 LG화학, 포스코퓨처엠 등 대기업들은 소수라도 배터리 전공자를 받을 수 있지만, 중견·중소기업들은 전공자를 구하기 어렵다. 학생들이 대기업을 가려고 한다. 말하자면 중견·중소기업들은 배터리를 모르는 인력을 데리고 일해야 하는 것이다.
고졸부터 채용하는 현장 인력과 석·박사급 연구개발(R&D) 인력 모두 부족하다. 최장욱 현대차그룹-서울대 배터리 공동연구센터장은 “배터리 산업 팽창 속도가 너무 빨라 인력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며 “단기간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라고 말했다.
배터리는 타 업종과 달리 시장이 먼저 커지고 학계가 따라가는 산업이다. 학계 기술 연구보다 산업 현장 기술이 더 빠르게 치고 나간다는 이야기다. 최근 대학들이 전기차 배터리의 중요성 인식하고 관련 과목과 신입생을 늘리고 있지만 절대적인 학생 숫자가 적다.
이상영 LG에너지솔루션-연세대 이차전지연구센터장은 “인력 확보가 배터리 기업들의 초미의 관심사”라며 “사람이 있어야 연구도 하고 생산도 하는데 졸업생들이 충분히 나오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 센터장은 “생산직은 배터리 훈련받은 뒤 공장을 돌릴 순 있지만 R&D는 대체인력도 없다”며 “인력 수급 미스매치가 굉장히 심각한 수준”이라고 했다.
기업들이 오죽하면 계약학과를 만들어서 ‘우리가 돈 줄 테니 학생을 키워달라’고 하겠느냐는 말도 나온다. 배터리 3사는 졸업 후 채용한다는 조건으로 대학교에 계약학과를 개설해 학생들에게 학비와 생활비 등을 지원해주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연세대·고려대, 삼성SDI는 서울대·포스텍·한양대, SK온은 성균관대·울산과학기술원(UNIST) 등에 계약학과를 만들었다.
현장인력 수급을 맞추는 것도 쉽지 않다. 박철완 서정대 교수는 “국내 현장인력을 양성하려면 국내 공장의 생산캐파를 같이 늘려야 하지만 그럴 상황이 안 된다”며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등 자국 산업보호법 때문에 국내 기업들이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공장을 증설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배터리 제조의 대부분 주요 공정은 자동화됐지만 아닌 공정도 남아있다. 예컨대 극판 공정은 사람이 해야 한다. 박 교수는 “기초 작업은 가르치더라도 수율(전체 생산품 중 완성품 비율) 안정화를 위해 숙련자가 필요하다”며 “꾸준한 훈련과 경험을 쌓아야 하는데 젊은층들의 제조 현장직을 꺼리는 추세도 (배터리 인력 공백에)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고 했다.
생산 현장에 곧바로 투입할 수 있는 인력 양성을 위해 배터리 대기업을 다니다 퇴직한 고급인력을 활용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한 배터리업계 관계자는 “대기업 퇴직 임원들이 배터리산업에 취업하고 싶은 학생이나 중견·중소기업 재직자들에게 전문성과 경험을 전수하면 현장감 있고 실질적인 교육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정부는 지난달 29일 국무회의에서 반도체, 배터리 등 첨단분야 인재 양성을 위해 내년 예산안을 올해보다 2778억원 많은 1조8740억원으로 편성했다. 내년 전국 특성화대학 3개교에서 배터리 인재를 키우고, 기업이 운영하는 아카데미에서는 600명의 배터리 인재를 키우겠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조금 더 파격적인 정부 주도 인력 양성 프로그램과 배터리 R&D 지원사업을 바란다.
이 센터장은 “아직까진 학생들이 중국 기업쪽으로 취업을 원치는 않는 모습”이라며 “우리 기업들이 선두권에 있어서 다행이지만 인력 수급 문제를 풀지 못하면 나중엔 학생들도 선택권 없이 외국기업으로 갈 수도 있다. 지금이 한국 배터리업계의 골든타임”이라고 했다.
최서윤 기자 sychoi@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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