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시작은 사랑

이마루 2023. 9. 8.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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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의 이야기의 시작에는 사랑이 존재한다. 소설가 성해나가 질문을 던지게 된 이유.
ⓒUnsplash

시작은 사랑

근래 친구들에게 무용한 질문을 자주 던진다. 장례식에서 틀고 싶은 곡은 무언지, 가장 애착을 갖는 대상은 무언지, 조어 중 마음에 드는 단어가 있다면 그 이유는 무언지, 슬그머니 물어보고 그것을 화두 삼아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다. 한때는 생업의 고단함, 오르지 않는 주식, 지지부진한 연애, MBTI와 정치 이야기를 섞으며 대화를 이어갔지만, 그것이 서로에게 더 이상 유쾌하지도, 흥미롭지도 않다는 것을 깨달은 뒤로는 실정과 동떨어진 다소 뜬금없는 질문을 하고 있다. 난생처음 받는 질문에 떨떠름해하거나 주춤하는 이들도 있지만, 대개 진지하게 답을 추린 뒤 천천히 속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러다 보면 분위기가 예상과는 달리 진중하게 흘러가기도 하고, 시시한 답을 늘어놓으며 서로 낄낄거리기도 하는데, 그런 시간이 즐겁다.

가끔 이게 소설을 쓰며 생긴 고질적 습관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나는 소설을 쓸 때도 인물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나이, 습관, 질병 유무 같은 현실적인 질문부터 사랑을 위해 무얼 버릴 수 있는지, 내 분노는 어디서 비롯되는지 같은 추상적인 질문까지. 그렇게 폭을 넓혀나가며 인물을 상상하고 이해한다. 소설이 안 써질 때도 질문을 던진다. 넋두리도 한다. 왜 나를 골머리 앓게 해? 왜 잠을 못 자게 만들어? 그런 모습이 우습기도 하지만, 그러다 보면 그 인물과 가까워지고, 그에게 부드러운 살과 단단한 뼈 같은 물성이 생기는 것 같다.

ⓒUnsplash

누군가에게 궁금증을 갖고, 깊이 있게 알아가고 싶은 마음을 품는 건 짙은 애정을 수반하는 일이다. 당신을 사랑하기에 가능한 일. 무수한 노래 가사가 사랑에 관한 의문으로 시작해 끝이 나는 것처럼 말이다. 페기 리가 불러 유명한 재즈 스탠더드 ‘I’m confessin’은 사랑하는 이를 향한 달콤한 물음으로 가득한 곡이다.

“내게 알려주세요. 당신도 나를 사랑하나요?” 상대의 마음을 알고 싶어 질문을 던지고, 들끓는 애정과 상대의 무심한 반응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당신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넘겨짚고 있는 건 아닐까요?”라며 의기소침해한다. 그런가 하면 엘라 피츠제럴드의 ‘All of me’는 헤어진 연인에게 “당신이 가져간 건 우리 기억의 일부예요. 대체 왜 모든 걸 가져가지 않았어요?”라고 반문하며 “당신 없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죠?”라는, 듣는 이 없는 쓸쓸한 물음을 이어간다. 사랑 없이는 이런 애달프고 다정한 질문도 나오지 않겠지.

나는 주로 질문을 던지는 축이지만, 때로는 받기도 한다. 이틀 전에는 독자가 인스타그램 DM으로 이런 질문을 했다. “작가님의 마음을 동하게 하는 단어는 무엇인가요?” 친구들이 내게 돌발 질문을 받으면 이렇게 당혹스러웠을까. 평양냉면(요즘 한창 빠져 있는 음식), 이토 준지(이름만 들어도 가슴 뛰는 만화가), 두둑한 지갑(이건 뭐…) 등 이런저런 단어가 떠올랐지만, 그럴싸하고 근사한 답을 해야겠다 싶어 내 오랜 화두인 ‘지속 가능성’이라고 답했다. 그는 되물었다. “우리 삶에서 지속 가능한 건 뭐가 있을까요?” 글쎄, 무엇이 있을까. 골몰하다 그날은 답을 내리지 못했다.

답이 명징하게 떠오른 건 그와 주고받은 DM을 다시 살펴보면서다. “잘 지내고 계시죠? 소설 잘 읽었어요.” 첫 소설집을 출간하기 전부터 그가 꾸준히 보내준 따뜻한 안부. “앞으로도 더 사랑받으시길 바라요.” 든든한 격려. 그가 먼저 손을 내밀고, 순도 높은 마음을 전해주었던 순간이 메시지 창에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

우리 삶을 지속시켜 주는 건 결국 사랑 아닐까.타인을 향한 두터운 애정, 내밀한 관심과 그에게서 비롯되는 수많은 물음과 답들. 심상하다 여길 수 있지만 ‘밥 먹었어?’ ‘아픈 데는 없어?’ 같은 질문의 기저에도 상대를 향한 염려와 애틋함이 서려 있으니. 누군가에게 애정 섞인 질문을 이어가고 답을 듣다 보면 그 사람이 전보다 선명해지고, 돌올해진다. 마치 소설을 쓰기 전까지 형체가 없던 인물이 질문을 지속할수록 서서히 제 모습과 바탕을 갖추는 것처럼. 질문이라는 한자어가 바탕 질(質) 자로 이뤄진 것도 그 때문인 것 같다.

내게 기꺼이 사랑을 전해준 독자에게 나도 같은 질문을 했다. “당신의 삶에서 지속 가능한 건 무엇인가요?” 설렘을 안고 그 답을 기다리며 내 삶 속에 가득 차 있는 이들에게 앞으로 줄 사랑을 조금씩 가늠해 본다.

성해나

소설가. 소설집 〈빛을 걷으면 빛〉 〈두고 온 여름〉을 펴냈다. 깊이 쓰고, 신중히 고치며 나아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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