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올레 개척자도 몰랐던 해녀들의 항일운동 [변방에서 안방으로 : 일하는 사람책]
일하는 사람의 기록을 담은 책을 소개한다. 송곳이 되어 준 작가의 경험과 필자의 지금을 들여다보아 변방에서 안방으로 자리를 넓혀 먹고사는 오늘의 온도를 1℃ 올리고자 한다. <기자말>
[최문희, 고정미 기자]
87년간 일하는 여자로 사는 기개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최근 개봉한 다큐 <물꽃의 전설>에는 관자놀이에 파스를 붙인 채 바다에서 일해 온 생을 고하는 현순직 해녀가 등장한다.
목숨을 걸고 바다로 나아가는 자의 출근길이 아무리 도시 출근길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해도, 한 세기에 육박하는 세월 동안 매일 출근 도장을 찍는 일이란 억겁의 수련이었을 것이다. 현순직 해녀가 평생에 걸쳐 하던 물질을 마지막으로 하고 돌아온 날, 그는 자신이 잡은 해산물의 절반을 촬영팀에게 내준다.
바다로 먹고살아온 기술이 누군가를 향한 나눔으로 화려하게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그가 어망을 털어내어 자신이 채취한 양식을 덤덤히 주변에게 건네는 퇴근 장면은 압도적이었다.
저 언니처럼 넉넉하게 동료와 타인을 돌보는 것을 잊지 않으며 나의 일을 당당히 이어갈 수 있을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얼굴은 오랜 세월 끝에 한 가지 업에 통달해버린 자가 지닌, 그야말로 장인의 것이니까. 해녀는 그야말로 '물질의 장인'이다.
오염수를 '처리수'로 부르자는 의원들
현재 제주도 내 현직 해녀의 숫자는 약 3226명. 그중 70대 이상 해녀가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대다수 전문가들은 해마다 해녀의 숫자가 큰 감소세로 치달을 거라고 예상한다.
해녀 인구가 고령화된 데다 육지의 각종 오염수, 전 지구적 기후위기로 인한 백화현상(연안 암반 지역에서 해조류가 사라지고 흰색의 석회 조류가 달라붙어 암반 지역이 흰색으로 변하는 것) 탓에 채취할 해산물이 줄고 있기 때문이다. "바다가 옛날 같지 않아", "감태가 있어야 그걸 먹고 자라는 소라도 있을 텐데 아무것도 없으니 애네가 굶어 죽는다"고 말하는 해녀의 한탄은 이미 예삿일이 아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근 일본이 방류한 오염수가 제주 해역에 흘러드는 데 걸리는 시간이 채 일 년도 되지 않을 거라는 보고가 잇따르고 있다. 앞서 해양과학기술원과 한국원자력연구원 공동연구팀은 오염수가 제주 해역에 닿기까지 4년에서 5년 정도 걸린 걸로 내다봤다('해양방사능 물질이동 모델링 고도화' 연구 보고). 하지만 세계환경단체 그린피스는 오염수가 동중국해를 넘어 쓰시마 난류를 타고 넘어오면 220일 만에 한반도 해역으로 유입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자국민인 해녀가 안전하게 일할 권리를 침해당할 위기에 처했지만, 노동진 수협회장과 성일종 의원 등은 오염수를 '처리수'로 부르자는 역발상을 내놓고 있다.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업, 그중에서도 바다에 가장 직접 피부를 맞대고 있는 해녀의 업을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이 든 건 그 무렵이었다.
평생 내륙에서만 살아 무형문화재쯤 되는 존재로만 여겼던 해녀의 역사를 시민으로서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꼬리처럼 따라다녔다. 다짐 같기도 불안 같기도 한 생각 속에서 지난 8월을 보냈다.
▲ 책 <숨, 나와 마주 서는 순간> |
ⓒ 북하우스 |
그렇게 손길이 닿은 책들 가운데 두 권을 소개한다. 첫째로 알리고자 하는 책은 해녀를 처음 공부하는 사람들이 읽기에 안성맞춤인 <숨, 나와 마주 서는 순간>(서명숙). 저자인 서명숙은 오랜 기자 생활 끝에 고향으로 돌아가 '제주올레길'을 개척해내 전국에 걷기 열풍을 일으킨 사회적 기업가. 그는 올레길을 내며 제주 곳곳에서 만난 해녀들의 이야기를 바탕 삼아 해녀의 삶과 역사를 책으로 알리기로 결심한다.
대통령, 국회의원, 공무원, 사기꾼, 조폭 등 몇십 년간 취재하며 인간군상을 만난 그이지만 해녀만큼은 "불가사의하며 해독 불능한 존재"라고 이 책으로 고한다. 자신이 접했던 직업군 가운데 가장 난해한 사람들이라며 해녀를 가리켜 "인류 최초의 전문직 여성"이라고 호명한다.
그도 그럴것이 해녀의 기원은 삼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 <고려본기>에 '야명주(진주)'를 나라에 진상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짐작컨대 삼국시대 이전부터 해녀의 물질이 시작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본래 깊은 바닷속 전복을 따는 건 해녀가 아니라 남자 '포작(바닷물 속에 들어가 조개·미역 따위 해산물을 채취하거나 국가의 각급 제사에 쓰는 어포(魚鮑)를 떠서 소금에 말려 진상하는 신역(身役)을 담당한 사람)'의 몫이었다(가까운 바다에서 해조류를 따는 건 여자 '잠녀'들의 몫이었다고 한다).
제주 깊은 바다에서 자라는 전복은 귀했지만 탐관오리들이 득세하는 조선시대에 진상해야 할 전복 할당량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급기야 진상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포작들은 관아에 끌려가 곤장을 맞거나 이를 피해 도망가다 죽기 일쑤였다.
씨가 마른 포작들의 일을 대신 하기 시작한 건 잠녀들이었다. 바다 깊숙이 잠수해 곧잘 전복을 따오는 잠녀의 능력을 알아챈 조정 대신들은 잠녀에게 전복의 할당량을 징수하기 시작했다. 국가의 횡포가 해녀의 기원이 된 셈이다.
이후 해녀들의 자생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초등학교 입학보다 물질부터 배우는 애기 해녀의 탄생이 마을마다 익숙해져 갔다. 동시에 여자가 하는 위험한 일이라며 해녀의 업을 천대하는 문화도 만들어졌다. 자녀만큼은 해녀를 하지 않길 바라는 해녀 어머니의 바람과 달리, 소녀들은 묵묵히 해녀가 되어 바다와 삶을 동고동락해갔다.
일제의 수탈에 정면으로 맞선 해녀들
저자는 해녀들의 삶을 다각도로 조망한다. 수심은 얕지만 '여(바위)'가 발달해 해산물이 많은 구역은 나이 든 해녀이자 선배들이 안전하게 작업할 수 있도록 젊은 해녀들이 내어 준다는 전통 '할망바당'에 대해서도 소개한다. 양보의 선순환을 이뤄 노후책을 만든 해녀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제주도에서 초중고를 다니면서도 나는 해녀들의 항일운동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아우내장터 3.1만세 사건을 주도한 유관순은 교과서나 위인전은 물론 고무줄놀이에서도 늘상 접했지만, 하도리 해녀항쟁을 주도한 김옥분의 존재는 까맣게 몰랐었다. 로마제국의 황제나 조선조 왕들에 대해서는 족보까지 달달 외우게 만들면서도 정작 나고 자란 지역의 향토사는 가르치지 않는 우리나라 교육 때문이다."
- <숨, 나와 마주 서는 순간> 중에서
하도리 해녀항쟁은 1931년 12월부터 1932년 1월까지 해녀조합의 횡포에 맞서 제주 해녀들이 벌인 시위로 1만7000여 명이 참여했다. 일제강점기였던 당시, 제주로 들어온 일본 자본가들은 해녀들이 채취한 감태와 전복의 가격을 강제로 헐값에 사들이려 했고, 분노한 해녀들이 이에 반발하여 해녀조합에 정상 매입을 요구했으나 조합은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이에 해녀들은 1931년 12월 말부터 세화 장날에 나가 대대적인 시위를 감행한다.
▲ 최근 개봉한 다큐 <물꽃의 전설>의 한 장면. |
ⓒ 영화사 진진 |
면장은 논의 끝에 약속한 정상 매입을 또다시 지키지 않았고 하도리 해녀들은 1932년 1월, 새로이 부임한 제주도사이자 해녀조합장인 일본인 다구치가 마을 근방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한 손엔 호미, 한 손엔 전복을 캐는 빗창을 들고 다시 거리에 나선다. 당시 해녀 김옥련은 일본인 조합장의 차 위에 올라서 열두 가지 요구사항을 제창하는 등 항일운동가의 면모를 거침없이 드러낸다.
열두 가지 요구사항에는 제주도사의 조합장 겸직 반대, 일본 상인 배척 등 항일적 성격을 띤 항목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이 다수 포함돼 있었고, 해녀들의 기세에 눌린 조합장은 요구를 승낙한다. 담판은 지어졌지만 시위 직후 김옥련을 비롯한 해녀와 청년 운동가들은 시위 주동자로 낙인이 찍혀 일제 치하 아래서 장기간 옥살이를 치러야 했다.
여성의 몸으로 낮에는 물질을, 밤에는 야학으로 앎을 길러낸 해녀들의 운동사를 나는 단 한 번도 교실에서 접한 적 없다. 두 발로 찾아가 익힐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올레 20코스 종점이자 21코스 시작점에 위치한 해녀박물관에서 그 역사적 흔적들을 살필 수 있다.
당시 해녀항쟁을 이끈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 등 하도리 해녀들이 <농민독본>, <노동독본> 등 계몽서를 읽음으로써 스스로를 바로 세웠던 '하도강습소(하도 보통학교 야간부)'의 풍경을 전시한 장소가 박물관에 고스란히 있다. 제주에 간다면 해녀박물관(제주시 구좌읍 해녀박물관길 26) 방문을 놓치지 않길 바란다.
▲ 책 <은퇴 해녀의 불면증> |
ⓒ 한그루 |
해녀를 알려주는 입문서를 읽었다면 두 번째로 소개할 책은 인터뷰집 <은퇴 해녀의 불면증>이다. 제주에서 해녀를 둘러싼 전통문화를 오래 연구한 저자 문봉순은 근대화 이전의 제주 모습을 몸으로 기억하는 70세 이상의 해녀들의 목소리를 가감 없이 전달한다.
인터뷰를 이끌 때 으레 하는 관습일 수 있는 '마지막 (인터뷰이의) 멘트에 대한 갈무리' 흔적이 쉬 보이지 않는다. 인위적인 구석이 없다. 마치 파도가 치면 치는 대로 지나가면 지나가는 대로 해녀 할망들의 입말을 자연스레 옮겨 놓아 인터뷰이의 개성을 살리는 데 주력한 노력이 깊어 보인다. 음절 마디마디가 해녀가 살아온 뼈와 숨 같기에 책장을 쉽게 넘길 수 없다.
'며느리가 말려도 물에만 들고 싶은 마음'을 가진 비양동 정금주(1929년생)부터 하도리 총어촌계의 생태를 굽이굽이 알려주는 임옥희(1944년생)까지 "부모님이 하라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해녀를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녀들의 업(業)과 생이 이 책에 펼쳐진다.
"바다일은 나에게 직장과도 같다. 바다에 것은 만원 벌 때도 있고 삼만 원 벌 때도 있고 칠만 원 벌 때도 있다. (중략) 나는 잘은 못한다. 상군만은 못하는데, 중간 잠수 정도는 된다. 일등은 아니었지만 그 물질하면서 바다에서 생활하면서 애들 밥이라도 굶지 않게 키우고, 결혼도 시키고, 자기들이 가고 싶은 길로 가게 해준 것이다. 돈도 없지 밭도 없지 재산도 없었다. 그런 나에게 바다는 직장이었다. 용왕님이 정말 나를 좋아하는구나 이렇게 힘을 내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 <은퇴 해녀의 불면증> 중에서
사는 이유가 된 바당(바다의 제주 방언)에 오늘도 새벽 일찍 생명줄인 테왁, 해산물을 캘 때 쓰는 호갱이를 챙겨 쑥으로 슥슥 물안경을 닦는 해녀들이 파도에 몸을 맡길 것이다.
<숨, 나와 마주 서는 순간>에는 산소통을 이고 물질을 해도 되지 않냐는 저자의 물음에 답하는 해녀의 입말이 실려 있다. "기계로 헤엄치당 보민 숨비소리(해녀가 잠수했다가 물에 떠오를 때 숨을 내뱉는 소리) 어서질 테주. 숨비소리 어신 바당은 적망강산 될 테주."
그이 말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기계로 헤엄치다 보면 숨비소리가 없어지겠지. 숨비소리 없는 바다는 적막강산이 되겠지."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을 일찍이 터득한 해녀들은 우리가 자연의 일부라는 이치를 깨달은 바, 함께 살아야 하는 이유를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해녀는 바다의 선생들이자 해양 역사의 산증인이다. 그들이 평생 산소통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숨만큼 물질하는 것을 보라. 해녀들이 욕심을 내려놓은 만큼 우리의 바당을 지킬 줄 아는 최소한의 양심이 가장 높은 곳에서부터 작동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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