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만나기 위해 아내를 인질 삼은 남자, 실화라니

조영준 2023. 9. 7.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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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버링 무비 298] 영화 <하루 반의 시간>

[조영준 기자]

 
 영화 <하루 반의 시간> 스틸컷
ⓒ 넷플릭스
*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한 남자가 빠른 걸음으로 보건소를 찾는다. 아내 루이스(알마 포이스티 분)를 찾고 있다는 이 남자는 개인적인 용무로는 지금 당장 그녀를 만날 수 없다는 직원의 말에 격분하며 가방에서 총을 꺼내 든다. 센터 전체를 두려움과 혼란에 빠뜨린 뒤, 아내를 찾아내자마자 지금 아이가 어디 있냐고 다그치는 남자. 이 문제에 경찰이 개입해 상황을 해결하려고 하자 급기야 아내를 인질로 삼고 함께 죽어버리겠다며 대치하기에 이른다. 그의 이름은 아르탄(알렉세이 만벨로프 분), 어떻게든 딸과 만나겠다는 마음 하나로 지금 이 상황을 벌이고 말았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영화 <하루 반의 시간>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아내를 인질로 삼은 채로 제목 그대로 하루 반의 시간을 보내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스웨덴 영화로 평소에는 많이 접하기 힘들기에 다소 익숙하지 않은 스타일로 여겨질 법도 하지만, 영화 전체의 작법만큼은 우리가 그동안 만나왔던 이야기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의 중심에 놓여 있는 문제를 해결해 가는 방식과 이야기의 서스펜스를 형성하는 방식에서 신선한 접근이 눈에 띄는데 이는 오히려 작품의 전형성을 탈피하는 쪽에서 도움이 된다.

영화는 상황을 제압하기 위한 특수 기동대가 현장에 도착하기까지 3시간가량이 남은 상황에서 인질을 붙잡고 있는 아르탄을 진정시키기 위해 경찰 루카스(페레스 파라스 분)가 투입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인질극이 시작된 이후로는 추가적인 사건의 개입 없이 인물의 대화를 통해서만 진행되는 것이 이 작품의 특징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세 사람의 만남으로 인해 이를 가능하게 할 준비가 모두 끝나게 된다. 아내를 인질로 삼고 있는 남자의 요구는 단 하나. 가족과 함께 다른 나라로 무사히 떠나는 것이다.
 
 영화 <하루 반의 시간> 스틸컷
ⓒ 넷플릭스
02.
아내 루이스를 인질로 삼고 있는 아르탄을 만나기 위해 루카스가 홀로 보건소 안으로 들어서면서부터 영화는 여러 문제를 동시에 터뜨리기 시작한다. 가족과 함께 떠나고 싶다는 남편과 달리 아내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는 문제가 하나. 이동을 위해 당장 차를 준비하라는 아르탄의 요구와 기동대가 올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경찰 측 사이에 놓이게 되는 루카스의 문제가 또 하나다. 아직까지는 상해를 입은 사람이 없으니 경범죄에 해당된다며 남편을 설득해야 하는 루카스와 자신의 요구를 내세우면서도 경찰을 심하게 자극하지 않아야 하는 아르탄 사이의 갈등 역시 여러 문제 가운데 하나가 된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펼쳐놓는 여러 가지 문제들은 보건소 내부에서 차량 내부로, 차량 내부에서 다시 두 사람의 딸이 머물고 있는 루이스 부모의 차고 내부로, 처음부터 끝까지 제한된 공간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갈 수 있게 하는 요소가 된다. 공간의 제한적 상황에서는 확실한 갈등 구조와 핵심 사건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대화와 대화 사이에 개연성을 부여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고려한 지점으로 보인다.

물론 제한적인 공간의 활용은 이 작품과 같은 장르에서 많은 이점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타이트한 프레임으로 인해 관객들로 하여금 지속적인 긴장감을 느끼도록 유도할 수 있고, 극 중 인물들 사이의 호흡도 상대적으로 더 빠르게 가져갈 수 있다. 이는 이야기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마지막 장면을 제외한 모든 장면에서 세 사람 이상의 인물 구도가 형성되는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남편을 중심으로 아내와의 관계에서도, 경찰과의 대립에서도 모두 갈등 구조를 형성하며 영화는 극의 제약을 극복해 나아간다.

03.
자세히 들여다보면 남편 아르탄은 의외로 유약한 면을 가진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처음부터 그렇다. 준비해 온 총을 꺼내든 것으로 보아 범죄를 계획하고 아내를 찾아간 것은 사실이나, 그 행동이 가져올 결과나 상황에 대해서는 큰 생각이 없었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당황하는 모습을 보인다. 지금 당장 총구가 눈앞에 와 있는 아내 루이스도 겁은 나는 모습이지만 담담한 태도를 이어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보이는데, 이 남자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저격수를 두려워하며 온몸을 웅크리고 뒤따라 오는 경찰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내내 드러낸다.

자신이 아랍 이민자라는 사실에 대해 상당히 높은 수준의 열등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도 극 중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는 아내와 자신이 지금의 상황을 맞이한 것 역시 자신을 이민자라고 홀대하던 그녀의 부모님과 법원의 부당한 처벌 때문이라고 말한다. 물론 어디에서나 이민자의 삶이라는 것이 쉬울 리 없겠지만, 처음의 장면에서 보건소 안에서도 백인만이 아닌 다양한 인종이 함께 지내고 있는 장면이 있었음을 생각하면 일반적인 수준은 넘어서는 종류의 부정적 감정이 그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조금 더 타당해 보인다.

그의 이런 내면적인 요소들은 영화의 모든 장면에 투영되며 극 중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상황이 극단적으로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심리로부터 기인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되려 일종의 두려움과 피해의식이 우발적인 행동으로 이어진 것에 가깝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행동에 대한 책임의 무게가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렇게 큰 사건을 벌이고도 자신이 테러범으로 오인받는 것만큼은 두려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영화 <하루 반의 시간> 스틸컷
ⓒ 넷플릭스
04.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지만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중요하다고요."

영화가 이 사건을 대하는 시선을 따르다 보면 한 가지 인상적인 부분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첫 대화를 위해 경찰 한 명만 맨몸으로 들여보내라던 아르탄의 다소 무리한 요구에서부터 자동차를 준비시키는 것, 딸 카산드라를 데리러 가는 것, 심지어는 다른 나라로 무사히 도망가기 위해 비행 편을 준비하라는 요구까지 범죄자에 해당하는 남편의 말을 모두 수용적인 태도로 받아들이는 부분이다. 제압의 관점이 아니라 해결의 관점에서 모든 과정이 이뤄지고 있는 상황이 인상적이다. 이는 단순히 두 사람과 함께 이동하는 루카스의 행동에서만 드러나지는 않는다. 범죄 차량을 쫓는 다수의 경찰들만 해도 그런 태도로 마지막까지 기다리는 모습이다.

범죄자의 모든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의 유약함보다는 인질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고 (남편 아르탄이 살인을 저지르거나 상해를 입힌 상황은 아니기 때문에) 범죄자의 행동을 주시하며 최선의 결과를 이끌어 내기 위한 단단함으로 여겨진다. 이는 누구나 실수할 수 있지만 이후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던 루카스의 말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자신의 딸을 만나기 위해 현재의 상황을 만든 것은 큰 실수이지만, 아직 누구도 다치지 않은 상황에서 아르탄이 어떤 방식으로 대처할 수 있을지 지켜보는 방식을 통해서다. 물론 상황이 통제되고 관리되고 있다는 믿음 아래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05.
지금 이 상황의 시작점이 되는 순간, 딸이 태어나기 전후의 상황과 지금까지의 과정 역시 '누구나 실수하는' 부분에 해당된다.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동안 아내의 곁에 있어주지 않고 밖으로만 나돌았던 남편 아르탄과 산후 우울증으로 인해 아이를 낳고 처음 한 달은 그저 캄캄하기만 했다는 아내 루이스의 병. 서로의 곁을 지키지 못한 결과로 딸과도 만날 수 없고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도 없는 현재를 맞이하게 되고 말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함께 쌓아 올린 잘못의 무게를 견뎌내지 못했다.

두 사람이 하루 반의 시간을 함께 보내는 동안 이 모든 일의 시작에 오해가 있다는 것은 알게 된다.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의 모든 문제를 갈음하고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후회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고, 시간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영화는 환하게 웃는 남편 아르탄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린다. 모두에게 피해를 주기는 했지만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자신의 아이를 주기적으로 만날 수 있다는 행복이다. 양손에 수갑이 채워지기는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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