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 제로를 꿈꾸는 도시의 섬뜩한 이야기"
[김성엽 기자]
새로운 글로벌 한국 작가를 발굴하는 장편소설 공모전 The New Korean Voice Prize(신예 한국 작가 공모전) 수상작으로 뽑힌 진보라 작가가 <메모리 케어>를 8월 출간했다.
신예 한국 작가 공모전은 한국 작가들의 작품들을 영어권 번역물로 소개하고 수출하는 Barbara J. Zitwer Agency 주관으로 열렸으며, 이 에이전시는 이미 한강, 정유정, 손원평 등 한국 작가들을 해외에 소개한 바 있다.
▲ <메모리케어> 진보라 데뷔작 |
ⓒ 예스24 |
- 안녕하세요. 우선 작품소개 부탁드립니다.
"<메모리 케어>는 지금으로부터 6년 전, 시한부 말기암 진단을 받은 할아버지와의 비밀스러운 약속에서 탄생한 이야기입니다. 남겨질 이들에게 끝까지 기억되기를 바라셨기에 저는 많은 이들이 할아버지를 기억하도록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시작은 그랬지만 궁극적으로 <메모리 케어>는 계속되는 분쟁과 갈등에 지친 도시가 기억관리 시스템을 도입하며 생기는 일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기억을 긍정적으로 관리해 영구적인 평화와 행복을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지만, 이면에는 사회적 불만을 제거하고 지배구조 안에 시민들을 가둬 기억의 주도권을 빼앗으려 하는 섬뜩한 모습을 숨기고 있습니다.
'트라우마 제로'의 사회를 그리는 만큼, 정신적, 심리적 문제를 터부시하는 한국 사회를 꼬집기도 합니다. 특히 팬데믹 이후 국제적으로 정신건강위기(mental health crisis)라는 위기감이 팽배한데요. 최근 한국 내의 많은 사건사고들이 바로 이러한 정신건강위기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후유증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만큼, <메모리 케어>가 2023년도의 한국 사회에 던지는 질문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 <메모리 케어>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타인의 아픔은 결국 나 자신의 일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사실 모두 타자의 고통에 둔감합니다. 아무리 비극적인 사건사고가 발생하더라도 당사자가 아니라면 쉽게 무덤덤해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타인'으로 이루어진 사회는 당사자에겐 현재진행형인 비극을 하루바삐 잊어버리고 앞으로 나아갈 것을 종용하곤 합니다. 세월호나 이태원 참사와 같이 본질적으로는 개인적 비극인 사회적 참사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깊이 애도했던 일이라도, 통상적으로 용인되는 기간을 넘어선 감정 표출이나 애도가 민폐로 취급되거나, 이런 비극의 당사자들이 미숙한 사람으로 간주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한국사회가 정신적, 심리적 문제를 터부시하는 반증이겠지요.
▲ <메모리케어> 진보라 작가 . |
ⓒ 김성엽 |
- <메모리 케어>의 주제의식이 한국 사회에 던지는 질문, 또 한국을 넘어 관통하는 질문이 있다면?
"<메모리 케어>는 노이즈 마케팅의 어두운 부분을 탐구합니다. 유튜브와 SNS가 부상하고, 인플루언서 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공격적인 마케팅의 부정적인 부분들에 대한 사회적 대화 또한 뜨거워지고 있는데요. 광고임을 알리지 않는 불투명한 광고, 허위 '내돈내산' 마케팅 등의 문제가 새로운 마케팅 방식의 어두운 일면으로 대두되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미국의 인플루언서가 뉴욕 공원에서 게임기를 나누어 준다는 개인 광고를 하면서 지나친 인파가 몰리고, 폭동이 일어나며 인플루언서가 체포되는 해프닝까지 있었는데요. 이처럼 비전통적인 마케팅 방식의 부작용은 한국 뿐 아니라 국제적인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메모리 케어>의 봄은 바로 이런 공격적인 마케팅에 참여하며, 기존의 사랑스럽고 도덕관념이 확실한 한국 '영어덜트' 소설의 전형적인 주인공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봄의 모습을 통해 노이즈 마케팅에 대해 시사하고 싶었습니다.
또한 <메모리 케어>는 근미래 배경임에도 무너진 사회질서를 재확립하기 위해 오히려 인간 사회가 아날로그로 퇴행한 모순적인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많은 현대 한국 소설들이 근미래 세상을 묘사하고 있지만, '메모리 케어'라는 최신 기술을 도입하면서도 아날로그의 세상을 그리는 것은 <메모리 케어>만이 가진 독특한 시각이 아닐까 싶은데요.
AI가 고도로 발전하면서 근미래가 어떤 모습으로 바뀔지 추측이 난무합니다. 어쩌면 기술의 지나친 발전이 오히려 아날로그의 세상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회귀성을 일깨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1세기 중반을 넘어선 미래는 <메모리 케어>와 조금은 닮아 있지 않을까요?"
- 그렇다면 <메모리 케어>로 한국사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있을까요?
"메모리케어 시스템이 탄생한 계기는 '죽음 트라우마'입니다. 법체계와 보편 질서가 붕괴되면서 사회적 신뢰가 무너지고 살인, 강도, 성범죄, 기타 흉악 범죄가 만연해지자, 시민들이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언제든 생명을 빼앗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각자가 속한 바운더리에 따라 서로를 증오하며 사회가 파국으로 치닫았죠. 최근 한국의 사회 모습이 연상되기도 합니다.
안타깝게도 비슷한 사건사고를 요즘 뉴스에서 자주 접하는데요. <메모리 케어> 세계는 '서로를 해치지 않겠다'는 사회적 계약의 방법으로 기억관리를 선택합니다. 범죄로 이어질 수 있는 부정적인 생각들의 싹을 자르는 극단적인 방식이지요. <메모리 케어>의 도시에서 시민들은 꼬리표에 부정적인 모습으로 기록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항상 강박적으로 예의바른 모습을 보입니다.
우울이나 심리적 괴로움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 반응이 용인되지 않는 사회. 매일밤 약물을 복용한 뒤 헬맷을 쓰고 부정적 기억을 선별해서 지우는 사회. 상상이 가시나요? 정신건강위기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고민하는 대신 억제와 처벌의 강도만 높인다면, 어느날 문득 한국 사회가 <메모리케어>의 사회를 꼭 닮아 있음을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요?
정신건강위기와 기억은 21세기의 중요한 화두인 만큼, 한 권의 작품에서 모두 풀어낼 수 없는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부산이 모티브인 가상의 도시를 배경으로 한 '도시 3부작'을 계획 중인데, 마지막 작품이 <메모리 케어>의 후속작이 될 것 같습니다. 주요 인물들을 등장시켜 기억 관리 시스템 붕괴 이후의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 마지막으로 독자에게 건네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이들에게 종종 '그냥 다 잊어 버려라'는 위로의 말을 건네게 됩니다. 그러나 괴로운 기억일지라도 잊고 싶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우리는 종종 간과합니다. 내 것이 아닌 기억의 경중을 멋대로 판단하는 건 그 기억의 당사자를 존중하지 않는 태도일 겁니다. 나 자신에게, 그리고 독자들께 이러한 '기억의 선별권'을 돌려주고 싶은 마음으로 <메모리케어>를 써내려갔습니다. <메모리 케어>가 저마다의 아픈 기억으로 괴로워하는 분들께 깊은 위로로 기억되었으면 좋겠어요."
작가의 꿈을 담은 <메모리 케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잊어버린 기억 저편의 꿈을 상기시키기 바란다. "기억하기 위해서 기록했다"는 진보라 작가, 그녀의 서사가 순간이 아닌 지속적인 보라빛 꽃으로 만개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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