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방정'에서 시작된 국토대장정, 약속 지켜낸 하정우
[양형석 기자]
아이돌 가수들은 음악방송 1위를 조건으로 앵콜 무대에서 보여줄 공약을 내건다. 이는 팬들에게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의미와 함께 팬들에게 문자투표 등을 통해 '화력지원'을 해달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배우들의 경우엔 신작 드라마 방영 전이나 새 영화 개봉 전 인터뷰에서 시청률 또는 관객숫자로 공약을 걸 때가 많다. 가끔은 실현가능성이 희박한 거창한 공약을 걸었다가 목표를 달성해도 실천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지난 2011년 백상예술대상에서 나홍진 감독의 <황해>를 통해 남자 최우수연기상 후보에 올랐던 하정우 역시 수상 여부를 놓고 거창한 공약을 걸었다. 2010년 <국가대표>를 통해 최우수 연기상을 수상했던 하정우는 전해 수상자의 자격으로 전년도 여자 최우수연기상 수상자 하지원과 함께 최우수 연기상을 발표하기 위한 시상자로 참석했다. 그리고 2년 연속 수상에 대해 공약을 걸라는 하지원의 말에 '국토대장정'이라는 황당한 공약을 내걸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역대 백상예술대상에서 남자 최우수연기상은 1982년부터 1985년까지 안성기가 4년 연속 수상한 이후 2년 연속 수상자조차 나오지 않았었다. 하지만 하정우는 예상을 깨고 2년 연속 수상의 영예를 안았고 재미로 던진 국토대장정은 '대국민약속'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하정우는 그 해 겨울 동료 배우 17명과 정말로 국토대장정에 나섰고 이 이야기는 다큐영화로 제작돼 2012년 8월 < 577 프로젝트 >라는 제목으로 극장에서 상영됐다.
▲ 하정우(왼쪽)는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에서 괜한 말을 꺼냈다가 국토대장정을 시작하게 됐다. |
ⓒ 필라멘트 픽쳐스 |
영화 < 577 프로젝트 >는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현장에서 "2년 연속 백상예술대상을 수상하면 국토대장정 길에 오르겠습니다"라는 공약을 건 하정우의 입방정(?)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하정우는 백상 수상 후 약속을 지키기 위해 추진력을 발휘해 제작자 장원석 대표와 김정범 음악 감독, 김우일 편집감독 등을 차례로 섭외했다. 그리고 영화 <러브픽션>을 함께 했던 배우 공효진과 16명의 신예 배우들을 캐스팅해 대장정을 함께 할 18명의 원정대를 꾸렸다.
하정우와 공효진이라는 검증된 배우들이 출연하고 '순도 200% 리얼 버라이어티 무비'를 표방했지만 < 577프로젝트 >는 18명의 배우들이 도로를 걷는 게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다큐영화다. 아무래도 극영화에 비해 재미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에 < 577 프로젝트 >에서는 부족한 분량을 채우고 관객들에게 재미를 주기 위해 '하정우의 숙영지 토크쇼'를 진행했고 배우들의 고해성사 같은 상황극을 통해 관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했다.
< 577프로젝트 >의 기획자이자 대원들 중에서도 맏형 뻘이었던 하정우는 대원들 사이에서 실질적인 리더 역할을 했다. 본인에게도 결코 쉽지 않은 행군이었을 텐데도 동료들이 지치지 않도록 언제나 유쾌함을 유지했고 충남 공주에서는 식당에서 잠이 든 대원(강신철)을 버리고 출발하는 장난기를 보여줬다. 하지만 동료를 버리는 장난을 쳤던 하정우는 임실 식당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가 대원들에게 버려지는 장난의 희생양이 되기도 했다.
드라마 <파스타>와 <촤고의 사랑>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달리던 공효진은 영화 <러브픽션> 촬영지에서 "쉬엄쉬엄 산책하듯 걷는 거야"라는 하정우의 감언이설에 속아 국토대장정 프로젝트에 참가했다. 중앙대 연극영화과 동문이 다수를 차지하는 대원들 사이에서 홀로 외로움을 느끼기도 했다는 공효진은 "대장정은 완주할지 몰라도 하정우를 잃을 수도 있겠다"는 명언(?)을 남기며 577km의 강행군을 완주했다.
< 577프로젝트 >는 18명의 대원들이 해남 땅끝마을 바다에 도착하면서 막을 내렸다. 김성균은 "해남에 도착하면 내 인생에서 찬란한 무언가가 있을 거라는 기대를 했는데 아무 것도 없네요"라며 웃었고 하정우 역시 "우리가 도착할 때 쯤이면 어떤 큰 깨달음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출발할 때랑 똑같네"라며 다소 허무한 소감을 남겼다. 하지만 577km를 함께 걸어온 대원들은 20일 동안 함께 울고 웃었던 '우리'를 생각하며 다 함께 눈시울을 붉혔다.
▲ 18명의 배우들은 저마다의 사연과 목표를 가지고 577km 거리의 국토대장정 길에 나섰다. |
ⓒ 필라멘트 픽쳐스 |
하정우와 공효진을 제외한 16명의 신인배우들 중에서 11년이 지난 오늘날 가장 성공한 배우는 단연 2023년에만 영화 <타겟>과 드라마 <신성한, 이혼>, < D.P.2 >, <무빙>에 연이어 출연한 김성균이다. 김성균은 < 577프로젝트 > 출연 당시 <범죄와의 전쟁>으로 주목을 받고 <이웃사람> 촬영을 막 끝낸 시점이었다. 당시만 해도 아직 돌이 채 지나지 않은 아이가 있는 새신랑이었던 김성균은 어느덧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됐다.
< 577프로젝트 >에는 5년 후 대종상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도 있었다. 바로 2017년에 개봉했던 이준익 감독의 <박열>에서 박열(이제훈 분)의 일본인 여자친구 가네코 후미코를 연기하며 2017년 대종상 여우주연상과 신인상을 휩쓸었던 최희서가 그 주인공이다. 최희서는 < 577프로젝트 >에서 6명의 여성대원 중 한 명으로 나왔는데 < 577프로젝트 >에서는 주로 리액션을 담당하는 역할로 많이 등장했다.
하정우의 중앙대 연극영화과 동문으로 윤종빈 감독의 데뷔작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심대석 역을 소화했던 한수현(개명 전 한성천)은 < 577프로젝트 >의 '숨은 MVP'였다. 배우생활 지속 여부를 걸고 비장하게 국토대장정에 참가한 한수현은 동료들의 몰카에 걸려 돌이 든 배낭을 메다 무릎을 다쳤다. 한수현은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태에서도 대장정을 강행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며 대원들을 걱정시켰지만 이는 하정우와 짜고 벌인 '역몰카'였다.
1989년생으로 국토대장정 대원들 중 가장 나이가 어렸던 이승하는 튀는 행동과 말투로 동료, 그리고 제작진과 자주 마찰을 일으켰다. 물론 이승하의 행동이 재미를 위한 '설정'이었는지 실제 성격이었는지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이승하는 영화 중반 하정우와 공효진의 설득과 충고를 들은 후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 577프로젝트 > 이후 <톱스타>,<쎄시봉> 등에 출연했던 이승하는 2017년 <싱글라이더>를 끝으로 작품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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