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립 드레스의 슬립은 ‘Sleep’이 아닌 ‘Slip’이다. ‘미끄러지듯’ 입을 수 있는 드레스란 뜻에서 붙여진 단어다. 이 슬립은 본래 여성의 속옷이었는데, 그 시작은 17세기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이 시기엔 우리가 알고 있는 오늘날의 형태는 아니었다.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모슬린 드레스가 슬립으로 불렸다. 오랜 시간이 지나, 1920년대에 가느다란 스트랩의 플래퍼 드레스가 유행하고, 뒤이어 1930년대에 디자이너 마담 비오네의 바이어스 컷 드레스를 입은 배우 진 할로우가 세계적 아이콘으로 떠오르며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슬립 드레스와 유사한 ‘속옷 같은 드레스’가 처음 대중의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1950년대에 마릴린 먼로와 엘리자베스 테일러 같은 배우들이 슬립 드레스를 영화 속에서 입었고, 덕분에 관능적인 이미지는 더욱 강화됐다. 1980년대 들어 ‘속옷의 겉옷화 현상’이 시작됐는데, 이는 여성의 사회 진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여자들은 슬립 드레스를 비롯한 여러 속옷을 겉옷으로 입으며 오랫동안 감춰둔 자신의 몸을 당당히 드러냈다. 남성의 시각이 아닌, 여성의 시각으로 페미니즘을 표현하기 시작한 것. 그리고 1992년, 디자이너 존 갈리아노에 의해 슬립 드레스는 처음 하이패션 런웨이에 등장하게 된다. 이후 관능적인 패션을 추구하는 베르사체와 돌체앤가바나, 그런지 룩을 선보인 마크 제이콥스, 그리고 이 두 스타일과는 상반된 시각으로 슬립 드레스의 간결한 아름다움에 매료된 미니멀리스트들이 이 아이템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캘빈 클라인, 미우치아 프라다 등이 바로 그 주인공. 그렇게 슬립 드레스는 1990년대에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 시기 슬립 드레스를 상징하는 수많은 패션 아이콘들이 탄생했다. 케이트 모스는 1993년 리자 브루스의 슬립 드레스로 아이콘으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다졌고, 코트니 러브는 슬립 드레스에 그런지 감성을 불어넣었다. 디올의 네이비 슬립 드레스를 입은 다이애나 비, 1990년대를 대표하는 패션 아이콘 캐롤린 베셋 케네디는 슬립 드레스 형태의 웨딩드레스로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역사상 가장 세련된 브라이덜 룩을 남겼다. 제니퍼 애니스톤은 자타공인 슬립 드레스 마니아. 패션 큐레이터 에드위나 어만은 속옷을 겉옷으로 입는 것을 “현대의 도덕에 도전하는 방법”이라 말했다. 공적이어야 할 것과 숨겨야 할 것, 그리고 그러한 장벽을 허무는 행위를 여자들은 슬립 드레스를 통해 이뤄냈다. 찰스 왕세자와 이혼하고 불과 몇 달 후 멧 갈라 레드 카펫에 슬립 드레스를 입고 오른 자유로운 모습의 다이애나 비와 그런지 스타일로 슬립 드레스를 즐긴 코트니 러브의 모습에서 우리는 슬립 드레스가 그저 나른하고 편안한 드레스가 아닌, 하나의 위대한 ‘펑크’이자 세상의 편견과 선입견을 부수는 ‘강력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 Fashion Icons 」
「 From the Runway 」
슬립 드레스를 논할 때, 2016 S/S 시즌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이번 시즌보다도 더 훌륭한 슬립 드레스 룩이 많았던 시즌이기에 이 페이지를 빌려 잠시 그 시절의 베스트 피스들을 소환해보고자 한다. 먼저, 가장 강렬하고 파워풀한 슬립 드레스 룩을 선보인 디자이너는 에디 슬리먼. 당시 생 로랑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던 그는 코트니 러브를 오마주한 컬렉션을 선보였다. 코트니 러브의 1995년 슬립 드레스 룩에서 영감을 얻어 모든 룩에 티아라를 씌웠고, 퍼 재킷이나 바이커 재킷, 턱시도 재킷, 야상 재킷, 카디건과 같은 다양한 아우터와의 쿨한 매칭을 선보였다. 피비 필로의 셀린느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컬렉션. 화이트와 블랙 컬러가 조합된 세련된 슬립 드레스(2023년에도 이 피스를 구하기 위해 리세일 사이트를 뒤지고 있을 여자들이 눈에 선하다!)를 첼시 부츠와 매치해 모던하고 쿨한 룩을 완성했는데, 구조적인 주얼리와 클래식 백을 매치한 감각이 돋보인다. 슬립 드레스의 상징적 브랜드 중 하나인 캘빈클라인 컬렉션의 프란시스코 코스타는 모던하고 미니멀한 디자인을 통해 슬립 드레스의 전성기인 1990년대를 회상했다. 컬렉션 전체를 란제리 룩으로 구성한 리카르도 티시의 지방시와 알렉산더 왕의 발렌시아가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컬렉션. 물론, 이번 시즌에도 매력적인 슬립 드레스를 만날 수 있다. 역시나 평소 슬립 드레스를 즐겨 만들어온 디자이너들의 피스가 높은 완성도를 보였는데, ‘라 돌체 비타’ 시대의 관능적인 여배우들이 입었을 듯한 복고풍 디자인을 선보인 마크 제이콥스, 관능미가 폭발하는 글래머러스한 슬립 룩을 제안한 돌체앤가바나, 시폰, 레이스, 깃털 등 다양한 소재로 우아한 슬립 드레스를 지어낸 N˚21의 알레산드로 델라쿠아는 스타일링마저 훌륭했다. 여러 개의 슬립 드레스를 겹쳐 입은 뒤, 맨 위에 입은 슬립 드레스의 끈을 흘러내리게 해 아슬아슬하고도 나른한 슬립 드레스의 매력을 강조한 것. 이와 같은 방법으로 니트 톱을 드레스 위에 덧입기도 했는데, 슬립 드레스를 단독으로 입기 부담스럽다면 이 룩을 참고하자. 매 시즌 관능미와 우아함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란제리 룩을 선보이는 넨시 도자카는 이번 시즌에도 역시 매력적인 슬립 룩을 선보였다. 이 밖에도, 리본과 주얼 장식으로 마치 인형 옷처럼 보이는 사랑스러운 슬립 드레스를 제안한 시몬 로샤, 니트 액세서리로 편안하고도 지적인 무드를 불어넣은 펜디, 시폰 슬립에 청키한 콤배트 부츠를 매치한 코치, 단순한 디자인으로 세련미를 극대화한 보테가 베네타, 레더 소재로 고급미를 강조한 끌로에, 비대칭 실루엣으로 드라마틱함을 불어넣은 스텔라 맥카트니까지, 실로 다양한 슬립 드레스를 만날 수 있다.
그렇다면 셀렙들은 어떻게 슬립 드레스를 입을까? 여러 셀렙들의 슬립 드레스 룩을 찾아본 에디터의 결론은 역시나 단순한 또는 클래식한 디자인이 가장 훌륭하다는 것. 슬립 드레스의 원형인 레이스 디테일이 더해진 클래식한 디자인이나 잔잔한 플로럴 패턴의 디자인, 그리고 1990년대 무드의 미니멀한 디자인이 입는 사람의 매력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동시에 슬립 드레스의 은근한 매력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었다. 레이스 장식의 새틴 슬립 드레스를 입은 켄달 제너와 미니멀한 블랙 슬립 드레스를 입은 지지 하디드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렇다면 스타일링은? 데이타임에는 지지 하디드와 헤일리 비버처럼 로퍼나 클래식한 스니커즈(양말까지 신는다면 더욱 완벽하다!)와 같이 드레스와 대조적인 무드의 슈즈를 매치하고, 이브닝 타임에는 얇은 스트랩의 샌들로 드레스업해볼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