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모금]"마약은 업(흥분), 다운(행복), 환각제로 구분된다"

서믿음 2023. 9. 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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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 그 자체로 책 전체 내용을 함축하는 문장이 있는가 하면, 단숨에 독자의 마음에 가닿아 책과의 접점을 만드는 문장이 있습니다. 책에서 그런 유의미한 문장을 발췌해 소개합니다.

가정의학과에서 15년간 20만 명의 환자를 진찰해 온 저자가 소개하는 마약 해설서다. 마약 생산-유통-판매-소비의 고리를 추적하며 마약의 역사, 현황에 환자를 진료한 의사로서의 경험을 더해 소개한다. 2018~2020년 단 2년 사이에 국내 마약 사범 수는 50% 가까이 증가했고, 2015년까지 잠잠했던 대마초 사범 수는 2022년 4배 넘게 급증했다. 저자는 정부에 상당수 책임이 있다고 지적한다. 공급을 막는 단속·처벌과 수요를 억제하는 치료를 병행할 필요가 있음에도 현 정부에 이르기까지 취사선택하는 우를 범했다는 것. 저자는 이념과 정치 논리에 얽매여 마약 중독 확산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한 정치권을 겨냥해 마약중독자를 범죄자로만, 또는 환자로만 규정하는 불필요한 이념 전쟁을 멈추라고 일갈한다.

펜타닐, 정말 좋은 약이었다. 가장 강력한 마약성 진통제인 펜타닐 덕분에 김정철 씨는 ‘명절을 집에서 보내고 싶다’는 마지막 소원을 이룰 수 있었다. 펜타닐은 병을 낫게 하지는 못해도 꼼꼼하게 잘 쓰면 환자의 고통을 줄여줄 수 있다. 김정철 씨에게 펜타닐을 쓸 때는 중독을 고려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말기 암 환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암성 통증에 마약성 진통제를 쓰다 중독되는 경우가 꽤 있다. - p.25, 「1부 1장」 중에서

마약에 대해 알아갈 때는 약의 효능과 효과에 따라 업(흥분), 다운(행복), 환각제로 이해하면 좀 더 쉽다. 같은 칼이라도 주방장이 쓰면 요리 도구이지만 살인자가 쓰면 살인 도구가 되는 것처럼, 현재 의료용으로 사용되지만 환자가 임의로 사용해서 문제가 되는 약(마약성 진통제인 펜타닐, 신경안정제, 일부 다이어트 약, 수면제, 프로포폴)과 아예 불법으로 정해진 약(아편, 코카인, LSD, 엑스터시, 헤로인)으로 나누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또한 중독성이나 의존성, 위험성 정도에 따라 ‘소프트(마리화나, LSD, 엑스터시)-미디엄(술, 담배, 신경안정제)-하드(코카인, 헤로인, 히로뽕, 펜타닐) 드러그’ 정도로 구분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술은 다운 계열의 미디엄 드러그로 합법이지만, 히로뽕(코카인)은 업 계열에 처음부터 불법이며 중독성과 의존성이 강한 하드 드러그다. - p.45~46, 「1부 1장」 중에서

비교적 가벼운 약인 마리화나나 프로포폴 같은 향정신성 약물이 위험한 이유는 이처럼 더 강하고 위험한 약으로 가는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바로 관문이론이다. 과거 한국에서는 본드에서 가스로, 가스에서 알약(러미라Romilar)으로, 알약에서 대마로, 대마에서 필로폰으로 이어지는 마약중독을 ‘엘리트 코스’라고 했다. 미국에서는 대마로 시작해 LSD, 엑스터시, 코카인을 거쳐 헤로인, 펜타닐까지 가는 게 기본 코스다. - p.110~111, 「1부 2장」 중에서

당신은 마약중독자다. 내성으로 인해 어지간한 양으로는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환청과 환시를 겪고 있어 눈앞이 흐릿흐릿하고, 손은 마구 떨린다. 거기에다가 지금 당장 약을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 마약을 조금이라도 더 싸게 사기 위해 1회 분량인 0.03g이 아니라 1g 단위로 샀기 때문에 이를 소량으로 나눠야 한다. 쉽지 않다. 당장 급한 마음에 저울 따위는 쓰지 않고 어림짐작으로 대충 약을 투여한다. 적게 투여했는지, 약의 순도가 달라졌는지 효과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이번에는 2배, 아니 3배로 투여한다. 마약을 하다 보면 시간 개념이 없어진다. 방금 전에 했는지, 하루 전에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하고, 또 하고, 또 한다. 술을 마시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얼마나 마셨는지 모르고 계속 마시는 것처럼 그렇게 마약을 계속하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가 과다 복용이나 약물 부작용으로 인한 사망이다. - p.145, 「1부 3장」 중에서

마약을 하는 사람은 범죄자인 동시에 환자다. 절대로 마약을 해서는 안 되지만, 만약 마약을 하고 있다면 치료를 받아야 한다. 다리가 부러지면 우리는 수술을 받거나 깁스를 한다. 아무런 치료도 없이 단순히 의지만으로 걸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나중에 깁스를 푼다고 해도 바로 예전처럼 뛸 수는 없다. 뼈뿐만 아니라 근육이 약해진 상태에서 잘못하다가 넘어지면 간신히 붙은 뼈가 다시 부러질 수 있다. 예전처럼 완벽하게 걸으려면 천천히 힘을 주는 것부터 시작해 6개월에서 1년 정도의 재활 치료가 필요하다. 마약 또한 마찬가지다. 단순히 의지만으로 끊을 수 없다. 전문적인 의학적 치료가 필요하다. 증상이 심할 경우 2~3주 정도의 입원 치료가 필요하고 이어지는 외래 치료는 필수다. 약을 끊고 1년 정도 지나면 손상된 뇌와 신경 구조가 어느 정도 회복된다. 가족과의 관계, 경제적인 문제 등을 회복하기 위해 각종 재활 치료가 필요하다. 이런 재활 치료가 없으면 또 넘어져 다칠 수 있다. 의학적인 치료와 함께 재활이 필수다. - p.155~156, 「1부 4장」 중에서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모두 돈 때문이다. 콜롬비아 현지에서 500만 원이었던 코카인 1㎏은 미국에서 최소 7,000만 원에서 최대 1억 2,000만 원까지 올라간다. 미국 땅에 도착하면 적게는 14배에서 많게는 20배까지 껑충 뛰는 것이다. 코카인 1g은 15만 원으로, 같은 무게에 8만 원인 금보다 2배 비싸다. 하얀 황금, 아니 황금보다 더 비싼 것이 바로 코카인이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코카인이 마약 사용자의 손에 들어갈 때는 일반적으로 순도 50% 정도이기 때문에 2배로 양을 불릴 수 있다. 또한 코카인과 베이킹파우더를 섞어서 코가 아니라 담배처럼 피울 수 있게 만든 크랙crack의 경우, 코카인 1g으로 비율에 따라 대략 5~30배까지 양을 늘릴 수 있다. 크랙 1g 가격은 7만 원에서 13만 원 선이다. 코카인 1g을 크랙으로 만들어 팔면 또다시 3~10배의 수익을 올리게 된다. - p.182~183, 「2부 1장」 중에서

북한제 최고 상품은 핵무기나 미사일이 아니라 마약, 그중에서도 필로폰(메스암페타민)이다. 필로폰 결정이 얼음처럼 투명해 ‘얼음’, ‘아이스’, ‘크리스털’이라고 하는데, 중국과 북한에서는 빙두(독의 중국어 발음, 얼음독)라고 한다. 북한산 필로폰은 순도가 98~100%로 전 세계에서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합성마약인 필로폰은 대개 소수의 개인이나 집단이 감기약의 원료인 슈도에페드린을 원료로 해서 소규모로 만든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흥남제약공장’의 지하 2층에 있는 5직장에서 박사급 인력들이 국가의 명령 아래 전문적으로 필로폰을 생산한다. 품질이 나쁘려야 나쁠 수가 없다. - p.227, 「2부 2장」 중에서

옥시콘틴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던 중 2001년 9월 11일, 알카에다Al-Qaeda가 납치한 비행기가 뉴욕 맨해튼의 세계무역센터에 충돌했다. 3,000명에 가까운 사망자와 최소 6,0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9.11 테러는 세계무역센터를 무너뜨렸지만 한 회사를 살렸다. “이번 국가의 비극으로 전국 신문의 1면에서 옥시콘틴이 삭제될 수 있었다.” 9.11 테러 당시 퍼듀 파마의 영업 담당자가 남긴 메시지였다. 미국은 ‘마약과의 전쟁’ 대신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그 결과 9.11 테러로 죽은 사망자보다 수십 배나 많은 이들이 마약으로 목숨을 잃게 되었다. 하지만 옥시콘틴의 위험성에 대한 문제 제기와 소송은 9.11 테러로도 완전히 막을 수 없었다. FDA는 2002년 1월 옥시콘틴과 관련해서 국내 최고의 통증 전문가로 이루어진 자문위원회를 열었다. 하지만 그렇게 모인 통증 전문가 10명 중 8명은 퍼듀 파마와 다른 제약회사의 대변인이거나 강연료를 받고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결론은 예상한 대로였다. - p.262, 「2부 3장」 중에서

지금까지 살펴본 미국의 마약 파동을 간략히 정리하면 이렇다. 돈에 눈이 멀어 타락한 제약회사가 1995년 미국 땅에 옥시콘틴을 퍼뜨렸다. 1996년에 시작되어 2010~2011년에 정점을 찍은 옥시콘틴의 1차 파동이었다. 옥시콘틴 공급이 줄자 옥시콘틴에 중독된 사람들이 헤로인으로 갈아탔다. 2010년에 시작해 2015~2016년에 정점을 찍은 헤로인의 2차 파동이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멕시코 카르텔은 펜타닐을 자체 생산했다. 이렇게 옥시콘틴과 헤로인에 이어 펜타닐의 3차 파동이 2013년에 시작되었고, 이후 사망자가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지금 미국에서는 7분에 한 명씩 펜타닐로 사망하고 있다. 더 끔찍한 것은 이 파동이 아직 정점을 지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다. - p.278, 「2부 3장」 중에서

보수 세력이 정권을 잡으면 마약과 범죄 문제를 부각하려고 한다. 그것도 정권 초기에 말이다. ‘이전 정권이 잘못해서 늘어난 범죄와 마약을 정의로운 보수 정권이 퇴치하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과거의 선례를 보면, 1990년 노태우의 범죄와의 전쟁이나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실시된 강력한 마약 단속 등을 통해 2~3년간 마약 사범 수를 일시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풍선을 힘(단속)으로 눌러봤자, 바람(수요)을 빼지 않는 한 결국 몇 년 후 다시 원상복구된다는 사실을 역사가 증명한 바 있다. … 처음부터 불순한 동기로 마약과의 전쟁을 시작했던 리처드 닉슨과 50년째 전쟁을 이어가고 있는 미국은 사실상 전쟁에서 패배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이들이 죽을지 아무도 모른다. 한편 검사 시절, 마약과의 전쟁을 통해 인기를 얻은 로드리고 두테르테는 검사에서 시장으로, 시장에서 대통령까지 올랐기에 그의 마약과의 전쟁은 개인적으로 대성공이었다.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한 한동훈 장관과 보수 정권은 과연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인가? 2023년 6월 26일 법무부는 마약사범재활팀을 신설했다. 한동훈 장관은 이어진 인터뷰에서 “많이 잡고, 강하게 처벌하고, 제대로 치료하겠다”라며 마약과의 전쟁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밝혔다. 그는 어쩌면 로드리고 두테르테의 성공을 꿈꾸고 있을지 모르지만, 리처드 닉슨의 실패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 p.321-322, 「2부 4장」 중에서

공급은 수요를 낳고 수요는 공급을 낳는다. 공급과 공급-수요를 이어주는 유통, 판매를 막는 동시에 수요를 줄여야 한다. 수요가 줄면 자연스럽게 가격이 떨어진다. 마약 수요가 줄어 가격이 떨어지면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마약을 공급할 이유가 없다. ‘하이 리스크high risk(고위험), 하이 리턴high return(고수익)’에는 많은 이들이 뛰어들지만 ‘하이 리스크high risk(고위험), 로우 리턴low return(저수익)’에는 아무도 뛰어들지 않는다. 미국의 유명한 진보학자 노엄 촘스키Noam Chomsky 또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마약 문제는 수요가 근본적인 원인이지 공급에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정도의 추리는 상식입니다. 따라서 모든 문제의 근원은 미국에 있는 것이지 콜롬비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 p.329, 「에필로그」 중에서

마약 하는 마음, 마약 파는 사회 | 양성관 지음 | 히포크라테스 | 368쪽 | 1만8000원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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