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직장 이후 20년이 지나 알게 된 것

김지은 2023. 9. 7.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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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도 글도 어떻게든 노력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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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 기자]

유아교육학과를 나온 까닭에 졸업하자마자 유치원 교사를 했다. 유치원 교사를 하면서 힘들었던 것 중 하나는 내 노동이 쌓이지 않고 자꾸 흩어지는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열심히 준비한 수업은 아이들의 한쪽 귀로 들어가 다른 쪽 귀로 나가는 것 같고, 열심히 만든 자료들은 주제가 바뀌면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특히나 큰 행사를 하고 나서 심혈을 기울였던 전시 자료들을 버릴 때는 허무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뭔가 성취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내가 한 노동이 눈에 보였으면, 남았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회사에 가면 내가 한 일이 남아 그 일로 평가받겠지. 회사에서 일하고 싶다'라고 생각했다.

아동 출판사에 지원했고 다행히 붙어서 유치원 교사에서 출판사 직원이 되었다. 그런데 출판사에서도 고충이 있었다. 내가 하는 기획은 처음에는 잘 진행되는 듯하다가 자꾸 막판에 엎어졌다. 일 년 이상 진행했던 수학 교구 프로그램이 엎어지고, 자연 관찰 제품이 엎어지고, 심지어는 우리 회사 제품을 중국에 홍보해서 거의 중국 주재원으로 가기 일보 직전에 다 없던 일이 되었다.

회사를 옮겨도 마찬가지였다. 일 년 이상 기획하고 진행하던 동화 전집이 엎어졌다. 간간이 맡았던 소 전집들은 출시됐지만, 회사를 옮기는 동시에 판권 편집자 칸에 있던 내 이름이 사라졌다.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간혹 전집에 들어가는 원고를 쓰기도 했다. 그런데 나중에 출간된 책을 보면 내가 쓴 글이 아니다. 편집자가 많이 수정한 까닭이다. 왜지? 무슨 문제가 있었던 거지? 이름이 있는 작가가 아니라면 출판사 내부나 외부의 윤문 과정을 거처 글이 바뀐다 (물론 출판사마다 작가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다).
 
▲ 야구 경기 장면 야구 선수들이 그라운드 위에서 각자 자신의 역할을 하고 있다.
ⓒ 김지은
 
그러다 최근에 야구를 즐겨보며 뜬금없이 야구 선수라는 직업에 대해서 생각했다. 야구 선수는 팀과 선수를 응원하는 팬이 있기에 존재 가능한 직업이다. 어떻게 보면 연예인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하지만, 철저하게 실력이 데이터화 되어 평가된다.

한 번의 운으로 빛을 발하는 '반짝'이 있을 수 없다. 요행도 바랄 수 없다. 노력이 쌓여 실력이 된다. 그러나 야구 선수의 플레이는 경기하는 바로 그때, 한 번뿐이다. 그렇다면 선수의 플레이는 그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것인가.

야구 선수의 노력이 응축된 플레이는 팬들에게로 건너간다. 경기가 끝나더라도 팬들의 마음에, 기억에 남는다. 그렇다면 어쩌면 내가 유치원 교사로 했던 노동이 가장 남는 노동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단지 그 노동이 나에게 남지 않고 아이들에게로 건너가 남았을지도.

내가 전시한 자료들을 보고 아이들은 새로운 것을 알고 즐거워했을 것이다. 그 자료는 그걸로 쓰임을 다했다. 자료가 쓰레기통에 들어간 모습을 보고 그렇게 허무해 할 필요가 없었다.

처음 직업을 가졌던 때로부터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에야 알 것 같다. 내 노력이 내가 원하는 형태 그대로 남는 직업은 거의 없다는 걸 말이다. 나의 노력이 아예 없어진 것 같아도 그 순간의 기억으로, 또한 다른 사람에게 건너가서 어쩌면 시행착오로 내 경험속에 남는다.

내 노력이 내 눈에 보이든 안 보이든, 내가 원하는 형태로 남든 그렇지 않든, 그건 내 소관이 아니다. 내 소관은 노력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
 
▲ 롯데 자이언츠 긴 팔 티셔츠 롯데 자이언츠 팝업 스토어 한 켠에 빼곡하게 걸려있는 롯데 긴 팔 맨투맨 티셔츠 & 유니폼
ⓒ 김지은
 
아이와 함께 오는 10일까지 성수에서 열리는 롯데 자이언츠 팝업스토어에 다녀왔다. 선수들 이름이 있는 키링은 사직 야구장에 가야만 뽑을 수 있었는데 팝업스토어에도 있었다.

아이는 신이 나 랜덤 키링 자판기에서 키링을 두 개 뽑았다. 자기가 좋아하는 선수 이름이 있는 키링이 나왔다며 좋아한다. 우리 말고도 여러 사람들이 바구니 하나 가득 자이언츠 굿즈를 산다.

가을 야구에 가기 힘들 것 같은데도 긴 팔 맨투맨 티셔츠를 산다.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에서 선수들의 헬멧을 쓰고 사진을 찍었다. 생각보다 헬멧이 가볍지 않다. 매 경기 헬멧을 쓰고 뛰는 선수들을 떠올렸다.

갑자기, 선수들이 있음에 감사하단 생각이 들었다. 선수들이 있어 일상의 학업에서, 일에서 벗어나 아이와 야구 이야기를 하며 즐거워할 수 있다. 선수들의 플레이는 사라지지 않는다. 가을 야구가 힘들어 보이는 이 상황에도 긴 팔 티셔츠를 사는 팬들이 있다. 사실... 나도 샀다.

팬들이 보지 않을 때 한 연습이 쌓여서 팬들이 볼 때 좋은 플레이, 기억에 남는 플레이가 나온다.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나의 글들도 그와 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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