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을 가두려고 세운 벽, 그 남은 흔적 [가자, 서쪽으로]

김찬호 2023. 9. 7.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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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수난 많았던 수도 베를린

[김찬호 기자]

라이프치히에서 북쪽으로 달려 베를린에 도착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독일을 한 바퀴 돌아, 수난 많았던 독일 현대사의 수도 베를린에 도착했습니다.

베를린은 독일의 수도입니다. 독일 최대의 도시이기도 하죠. 그러나 국토 동쪽에 치우친 수도, 베를린에는 여전히 역사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무엇보다 분단의 도시라는 역사를 가지고 있죠. 냉전 시대의 상징과도 같았던 베를린 장벽이 있었던 도시니까요.
 
 베를린 장벽
ⓒ Widerstand
독일은 2차대전에서 패전한 뒤 연합군에 의해 지배를 받았습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이 독일의 영토를 나누어 지배했죠. 독일을 분할한 네 나라는 전후 독일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이 수도 베를린이었습니다. 베를린은 원칙대로라면 소련의 점령 지역에 속했습니다. 독일 영토의 동쪽에 있었고, 베를린을 처음 장악한 것은 소련군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베를린에는 수도라는 상징성이 있었습니다. 결국 연합국은 베를린을 네 나라가 나누어 지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949년 서독과 동독이 성립되면서도 문제는 계속되었습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의 지배 영역은 합쳐져 서독이 되었습니다. 소련의 지배 영역은 동독이 되었죠. 하지만 베를린은 여전히 나뉘어 있었습니다. 서베를린은 서독이, 동베를린은 동독이 행정권을 행사했죠.

베를린은 동독 영토 한가운데에 위치한 땅이었습니다. 결국 서베를린은 서독 영토와 한참 떨어진 월경지가 되었죠. 게다가 법적으로 베를린은 서독과 동독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고, 연합국 4개국의 공동 지배 지역이었습니다. 실질적으로는 서독과 동독이 행정을 담당했지만, 법적으로는 그랬습니다.

덕분에 서베를린은 서독 연방의원도 선출하지 못하고, 서독 기본법도 적용되지 못하는 지역이었습니다. 서독은 본을 행정수도로 삼아야 했죠. 공산권인 동독 영토 한가운데에 살아야 하는 서베를린 시민들은 안보 위협도 강하게 느껴야 했습니다.
 
 체크포인트 찰리
ⓒ Widerstand
이런 상황에서 서베를린을 통한 동독 주민들의 탈출도 계속되었습니다. 물론 엄격한 검문은 있었지만, 어디에나 이를 벗어나는 경우는 있었죠. 특히 서독과 동독은 엄격한 조건이 있기는 했지만 친지 방문이나 여행 등의 목적으로 양측을 오갈 수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기회를 통해 자유 세계로 탈출하고자 하는 동독인들은 계속해서 발생했죠.
동독 주민들의 서베를린을 통한 탈출이 빈발하자, 동독은 서구권 뿐 아니라 공산주의 세계까지를 놀라게 만든 초유의 결정을 내렸습니다. 서베를린 전체를 벽을 세워 포위하려는 계획을 세운 것이죠.

여러 반발이 있었지만, 결국 1961년부터 베를린 장벽의 건설이 시작됐습니다. 장벽을 넘는 사람을 막기 위해 철조망과 감시탑, 지뢰가 설치되었죠. 장벽을 지키는 군인들은 탈출하려는 사람들을 무차별로 사살했습니다.

이 벽과 철조망 자체가 냉전의 상징이었습니다. 철의 장막의 상징이었고, 동시에 공산권이 가지고 있는 폐쇄성의 상징이었습니다.
 
 한때 동서 베를린을 나누던 브란덴부르크 문
ⓒ Widerstand
1963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뒤 베를린에 방문한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유명한 연설을 했습니다. "나도 베를린 사람입니다"라는 연설이었죠. 케네디는 말했습니다. "민주주의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으며 완벽하지도 않지만, 우리는 결코 국민을 가두려고 벽을 만든 적은 없었다"고요.
케네디는 또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유를 찾는 날, 베를린이 하나가 되고 유럽 대륙이 하나가 되어 평화롭고 희망찬 날을 기대" 한다고요. 서베를린의 시민들은 그 자유의 최전선에 있고, 그러니 "모든 자유로운 사람들은 어디에 있건 베를린 사람"이라고요. 케네디는 그렇게 "나도 베를린 사람"이라고 선언했습니다.
1989년 동독 정부의 여행 자유화 선언 이후, 시민들은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베를린 장벽과 함께 동독도 붕괴했습니다. 독일은 통일되었죠. 베를린 장벽은 그 붕괴의 순간까지도 한 시대의 종말을 보여주는 상징이었습니다. 공산권의 폐쇄성이 무너지고, 자유세계의 승리가 입증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무너진 베를린 장벽
ⓒ Widerstand
지금 베를린에서 분단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짧은 여행이라서인지,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의 차이도 쉽게 제 눈에 띄지는 않았습니다. 베를린은 이제 클럽과 음악으로 유명한 젊은이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내 곳곳에는 베를린 장벽의 잔해가 남아 있습니다. 어느 곳에는 유적이 되어 남아 있습니다. 무너진 장벽의 파편은 시내 곳곳에 장식으로 남았습니다. 제가 머물던 숙소 앞에도 베를린 장벽의 잔해가 서 있더군요.
생각해보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은 40년도 채 되지 않은 일입니다. 흔적이 지워졌다고 해도, 사람들의 기억은 결코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 폐쇄와 단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베를린 시민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베를린 장벽 위의 조형물
ⓒ Widerstand
곳곳에 서 있는 베를린 장벽의 잔해를 보며, 그 어두운 시대를 상상했습니다. 장벽을 두고 그 시대를 함께했던 베를린이라는 한 도시의 시민들을 생각했습니다. 
어쩐지 베를린에 도착해 첫 날 방문한 홀로코스트 추모 공원이 생각났습니다. 베를린의 중심인 브란덴부르크 문 근처에는 홀로코스트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 공원이 있습니다. 공원의 모습은 독특합니다. 사각형의 기둥이 공원을 가득 메우고 있죠.
기둥 사이의 통로를 통해 들어가면, 경사는 점점 깊어지고 기둥은 점점 높아집니다. 걷다 보면 낮았던 기둥이 어느새 주변을 답답하게 메우고 있습니다. 시야는 트이지 않고, 위를 올려봐도 좁은 하늘만 보일 뿐입니다.
 
 홀로코스트 추모공원
ⓒ Widerstand
하지만 그 깊은 통로에서도, 위가 아니라 옆을 보면 사람들이 보입니다. 함께 이 어둠과 답답함을 지나고 있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우리의 도시도, 보이지 않는 벽을 쌓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벽을 올리고 철조망을 치지 않았을 뿐, 결코 넘을 수 없는 벽과 감시탑이 선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단절과 폭력의 시대가 멀리 있지 않은 것 같은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두운 시대를 극복해낸 것도, 그리 멀지 않은 시대의 동료 시민들이었습니다. 베를린이라는 하나의 도시에 발을 붙이고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베를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두운 시대일지라도, 다만 장벽 너머에 사람이 있음을 생각합니다. 우리가 같은 도시에서, 같은 공간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동료 시민이 있음을 생각합니다. 언젠가 우리의 벽도 그렇게 무너질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우리도, 어두운 시대를 함께 넘어서는 '베를린 사람'이 될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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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CHwiderstand.com)>에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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