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치전야 각종 사회단체 참여
[김삼웅 기자]
▲ 묵암 이종일 선생 |
ⓒ 묵암 이종일 선생 기념사업회 |
이종일은 대한자강회 기관지 『대한자강회월보』에 「대한자강회가」를 발표하는 등 열정을 바쳤다. 이 단체는 창설된 지 1년 반 만인 1907년 8월 21일 매국노 이완용의 집 방화사건에 연관되었다는 이유로 매국노 내부대신 송병준에 의해 해산되었다. 기관지는 13호까지 발행 되었다.
천도교는 1906년 6월 17일 손병희의 발의로 『만세보』를 창간했다. 이종일은 『제국신문』의 사장의 위치에 있어서 간부직을 맡지 않고 창간에 깊히 참여했다. 발행장소는 서울 남서회동(南署會洞) 85통 4호, 사장 오세창, 발행인 겸 편집인 신광희, 주필 이인직 체제였다. 창간 당시는 4면이었다가 1907년 3월 9일자부터 8면으로 증면하고 신문값은 1부에 일전(一錢)이었다. 사장 오세창은 개화사상가 오경석의 아들로 태어나 『한성주보』에 관여하고, 1902년 개화당의 역모사건에 혐의를 받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망명 중 손병희를 만나 천도교에 입교하고 함께 귀국하여 『만세보』의 책임을 맡았다.
『만세보』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한자에 한글 루비활자로 토를 달아 한자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이종일의 작품이다. 『만세보』는 친일단체인 일진회를 강경한 논설로 비판했으며 1906년 7월 23일자에서는 내부대신 이지용의 매국행위를 규탄하고, 10월 14일자에서는 군부대신 이근택의 비행을 폭로하였다.
『만세보』는 우리나라 신문연재의 첫 소설인 이인직의 「혈(血)의 누(淚)」에 이어 「귀(鬼)의 성(聲)」을 연재하는 등 화제를 불러모았다. 고종도 이 신문을 읽고 내탕금으로 1천 원을 하사하였다.
이인직은 『만세보』가 운영난에 빠지자 이완용의 힘을 빌어 시설을 인수하여 친일내각의 기관지 『대한신문』을 창간했으며 대한제국 병탄 때에는 이완용을 돕고 일왕 다이쇼(大正) 즉위식에 헌송문을 바치는 등 친일파가 되었다.
『만세보』는 천도교의 기관지이면서도 시사종합 신문으로서 조선통감부와 친일내각을 신랄히 규탄하여 국민의 지지를 받았으나 심한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여 창간 1년이 지난 1907년 6월 29일 제293호로서 종간호를 내고 문을 닫았다. 이종일은 『만세보』를 계기로 천도교와 더욱 가깝게 되었다.
그는 1907년 9월 23일 국문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위원장 윤치오(尹致旿), 위원은 이종일과 장원석·여운적·이승화·주시경 등이다.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제 손아귀에 넘어간 상태에서 학부(學部)의 국문연구소에 몸을 담았다는 것은 그의 살아온 행적이나 이후의 처신으로 보아 의문이 가는 대목이다. 한글학자 주시경 등 면면으로 보아 친일 어용이라기보다는 국문(한글)이라도 지켜야 한다는 단심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는 2년여간 국문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재임하였다. "이종일은 국문연구위원으로 피임된 직후 사임을 청원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가 사임을 청원한 사유는 분명치 않으며, 1913년 자신이 저술한 『언문의해』에서 '일찌기 국문의 보관(報官)에 여러 성상 종사한 적이 있다'고 스스로 국문연구위원으로 재임하였음을 밝힌 바 있다." (주석 56)
1908년 1월 10일 대한협회가 대한자강회의 후신으로 발족되었다. 회장 남궁억, 부회장 오세창, 총무 윤효정, 평의원은 권동진·장지연·유근·정교 등 사회 명사들이 망라되었다. 이종일은 평의원으로 참여하고 기관지 『대한협회회보』의 발행·편집인이었다.
대한협회는 '강령'에서 1, 교육의 보급 2, 산업의 개발 3, 생명·재산의 보호 4, 행정제도의 개선 5, 관민 폐습의 교정 6, 근면·저축의 실행 7, 권리 의무 책임, 복종의 사상을 고취를 들고, 이어서 "대한협회는 국가의 비운을 구하고 인민을 행복케 하려면, 실력을 길러야 하고 실력을 기르는 길은 정치·교육·산업을 강구·발달케 함에 있을 뿐이라 함이 그 취지"라 밝혔다.
1910년 9월 해신될 때까지 지회 104개, 회원 5만25천 명이었다. 이종일이 주관한 회보는 1908년 4월 창간하여 1909년 3월 통권 25호로 종간할 때까지 민족주의자들의 글을 주로 실었다. 창간호에 실린 단재 신채호의 「대한의 희망」은 사회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종일의 국문(한글) 사랑은 남달랐다. 『대한협회회보』 제2호(1908년 5월 25일자) 「논국문(論國文)」에서 국문 진흥을 강조했다. 한문만을 진서로 생각하고 외국문자는 문자가 아니며, 국문은 부녀자나 아이들이나 배울 문자라고 천시하는 사회풍조를 개탄하면서 우리글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주석
56> 박걸순, 앞의 책, 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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