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치'가 대통령의 전유물?... 헌법 무시하는 '폭력 정치' [소셜 코리아]

한상희 2023. 9. 7.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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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코리아] 법치주의 핵심은 '권력 통제'인데 기득권 지키려 오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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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희]

 윤석열 대통령이 8월 28일 인천에서 열린 2023 국민의힘 국회의원 연찬회 만찬에서 박수를 치고 있다.
ⓒ 연합뉴스
 
흔히 법치(法治)의 반대편에 인치(人治)를 둔다. 하지만 통치는 사람의 것이기에 이런 용어법은 혼란을 야기한다. 함무라비 법전 이래 법은 가장 유효하고 효율적인 통치의 수단이었다. 그 오랜 중국의 역사를 하나로 관통한 것 역시 덕치의 유교 사상이 아니라 신상필벌의 법가사상이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체제에서도, 스탈린의 공산 체제에서도 법은 한결같이 그 자리를 잃지 않았다.

문제는 그 통치하는 사람과 법의 관계다. 통치자 위에 법이 자리하는 경우를 우리는 '법의 지배(Rule of Law)' 혹은 '법치주의'라 이름하고, 반대로 통치자 아래에 법이 자리하는 경우를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라 한다. 전자의 법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권력을 통제하고 억제하는 법이다. 후자의 법은 통치자가 권력을 행사하는 수단이자 폭력으로서의 법이다. 전자의 법은 인권과 평화와 민주주의를 담아내는 그릇이지만, 후자의 법은 국민을 정치로부터 소외시키고 타자화하는 통치전략이 흘러가는 통로를 이룰 뿐이다.

그래서 법이 정치를 규율하는 민주사회와 달리 권위주의 사회는 법이 아닌, 법의 외관을 띤 폭력을 정치의 수단으로 삼는다. 법으로써 국가의 폭력을 은폐하고 또 엄폐하고자 하는 것이다.

법치는 시민의 것이다

윤석열 정부가 입에 달고 있는 "법치"는 어떤 것일까?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우리 국민들이 지난 대선에서 "불법집회를 단호히 막고 책임을 묻는 정부"를 선택하지 않았느냐고 되묻는다. 여기서 "법치"는 무엇이고 "불법"이란 어떤 의미의 것일까? 선거에서 승리한 정파면 어떤 법이든 맘대로 집행해도 괜찮은 것일까?

선거는 국민의 의사를 묻는 장치다. 선거에서 확인된 다수의 의사는 국가 정책의 핵심을 이룬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다수가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다. 그래서 한동훈 장관의 이 발언은 헌법적으로 큰 오류가 된다. 집회의 자유는 헌법상의 기본권이기에 모든 집회·시위는 일단 적법한 것이라는 추정을 받는다. 선거에 이겼다고 해서 거리에 나선 국민을 향해 함부로 "불법"이니 "책임"지라느니 하며 몰아세울 수 없다는 말이다. 어떤 정부든 헌법의 틀을 넘어설 수는 없기 때문이다. 특히 헌법이 정한 기본권만큼은 다수결의 선거 결과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 보호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법치주의다.  

헌법재판소는 이를 에둘러 말한다. "자유를 누리기 위해 다수파에 가담해야 하는 사회라면 그러한 사회에서는 진정한 자유가 존재한다고 보기 (어렵다.)" 선거에서 승리한 다수파라고 해서 모든 사람을 자기 뜻대로 부릴 수는 없다. 역으로 소수파의 사람도 언제든지 다수파의 의사를 거역할 수 있다. 법치주의는 이런 소수파의 '진정한 자유'를 헌법의 이름으로 보장한다.

헌법이 국민의 기본권에 관한 규정을 특별히 두고 있는 것은 이런 취지에서이다. 모든 국가권력, 특히 선거에서 다수 국민의 선택을 받은 대통령이나 국회 원내 다수당의 권력을 법으로써 통제하고, 이를 바탕으로 개인의 자유와 권리, 즉 개인의 사적 자율성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헌법이 정한 법치주의의 핵심적 명령이다.

그래서 법치주의라는 말은 대통령의 것이 될 수 없다. 그것은 힘없고 돈 없는 국민들이 정치권력이나 자본권력에 대항하여 자기를 지켜내기 위한 수단으로 외치는 단말마의 함성이다. 법치주의는 법으로써 권력을 통제하는 국가법 원리다. 따라서 권력의 정점에 위치해 있는 대통령은 법치의 대상일 뿐 법치의 주체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자유와 권리를 외칠 때, 대통령은 스스로 자신의 권력을 되돌아보며 자제하고 반성하며 교정해 나가야 하는 것이 진정한 법치주의다.

'법질서 정치'는 기득권 유지 수단
 
 한동훈 법무부장관이 8월 14일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8.15광복절 특사 명단을 발표하고 있다.
ⓒ 권우성
그럼에도 이 정부는 법치를 자신의 전유물인 양 오남용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틈만 나면 외치는 "법질서" 정치와, 국회의 입법권을 무력화시키면서 법률 자체를 왜곡해 버리는 시행령 통치, 그리고 반복되는 법률안 거부권의 행사다.

법질서 정치(Politics of Law and Order)는 보수정파들이 사회 변화를 향한 시민사회의 요구에 저항하여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법치를 오남용하는 사례를 말한다.

법질서 정치가 등장하던 미국의 19세기는 남북전쟁을 거치며 헌법을 주축으로 한 법치주의가 의미 있게 자리 잡아가던 시기였다. 청교도 지배 사회에 가톨릭 계열의 이민자들이 급증하고, 백인 지배 사회에 유색인종들이 법 앞에서의 평등을 외치며, 자본 지배 사회에 노동자들이 사람답게 살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보수 정파들의 대답은 헌법이 아니라 법질서였다. 이들은 다양한 생각과 다양한 이해관계와 다양한 삶의 방식들이 혼재하는 것을 혼란 내지는 사회적 악으로 규정하고, 이들과 더불어 사는 사회를 무법, 무질서의 상태로 단정했다. 아울러 발본색원식의 수색과 처벌, 엄중한 통제와 배제의 수단으로 경찰력, 사법권력 등 이런저런 법적 강제 장치들을 동원했다. 닉슨이나 부시, 트럼프 대통령의 법질서 정치는 이런 통치술을 이어받는다. 그들은 법이 추구하는 정의도, 질서가 터 잡아야 하는 평화도 주목하지 않았다. 오로지 소수자들을 짓밟으며 스스로의 권력 기반만 강고히 유지하기를 원했다.  

윤석열 정부의 법질서 정치도 이를 단순 반복한다. 이 정부가 "법질서"를 외칠 때 그 주된 타깃은 노동운동이고 길거리에 나와 집회하는 대중들이다.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우리 정치에서 제대로 대표되지 못했던 노동의 문제, 특히 IMF 사태를 빌미로 모든 산업영역에 침투한 비정규직 노동과 하청노동, 최근 급격히 팽창한 특수고용 노동 혹은 플랫폼 노동의 문제들이 법질서 정치의 공격 대상이다.

이 문제들을 제대로 해결할 의지도 능력도 없는 이 정부는 '목구멍 포도청'을 외치는 노동자들에게 예의 법질서를 내세우며 법폭력을 휘둘렀다. 노사법치니 건폭이니 하면서 노동자들의 외침을 사회악으로 규정하고,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이나 형법 같은 형사처벌법을 앞장세워 노동의 현안들을 폭력적으로 매장해 버렸다. 노동조합과 국민들을 이간시키는 전략을 취한 것이다.

여기서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3권의 기본권은 아무런 지침도 되지 못한다. 오로지 노동을 공격하여 자본의 이익에 봉사하고자 하는 정부의 맹목의지만 존재한다. 헌법과 법률이 정부를 통제하는 '법의 지배'가 아니라 국민 위에 군림하기 위하여 법률로써 폭력을 은폐·엄폐하는 '법에 의한 지배'만이 횡행하고 있는 것이다.

법치주의 부정하는 시행령 통치

시행령 통치와 거부권 행사는 법치의 또 다른 변태다. 권력분립의 틀에 입각한 자유민주주의의 체제에서 법치는 법을 집행하는 행정부가 법을 만드는 입법부의 의사에 복종해야 함을 요구한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는 이런 법치의 기본원리를 간단히 전복해 버린다.

시행령 통치의 출발은 국회의 직무유기에서 비롯한다. 무능하고 게으른 국회는 법률의 세부 사항들을 송두리째 정부입법에 위임해 버리는 관행에 빠져 있다. 정부는 이를 빌미로 아예 입법자의 의사를 넘어서는 시행령을 만든다.

정부 조직은 법률로 정한다는 헌법원칙(정부조직 법률주의)에도 불구하고 법률 근거도 없이 시행령으로 행안부에 경찰국을 설치한다든지, 정부조직법상 법무부의 권한 사항이 아님에도 법무부에 인사정보관리단을 둔 것, 심지어 소위 검수완박법까지도 무위로 돌려버리는 시행령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국민적 합의가 선행되어야 할 TV시청료 징수방법을 일방적인 시행령으로 바꿔 버리는 한편, 헌법재판소가 위헌이라 선언한 집시법 조항조차도 시행령으로 가공하여 집회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무력화시키는 경우도 현재의 상황이다.

한마디로 시행령을 남발하는 정부의 행위는 법치주의 틀 자체를 부정한다. 그 시행령들은 하나같이 법률의 위임 범위를 초과한다. 국회의 입법권을 무력화하는 동시에 국회를 통한 시민사회의 견제와 통제조차도 거부해 버린다. 그래서 시행령 통치는 법의 지배가 아니라 불법의 지배가 된다. 시행령 통치의 해악은 여기서 나온다. 과거 유신시대의 긴급조치가 그랬듯이 권력분립과 법치주의의 틀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급기야 정부 그 자체가 시민사회의 부정태(不定態)가 되어 버리는 반민주적 상황까지 초래하기에 이른다.

국회가 통과시킨 법률안에 대해 설익은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은 새로운 유형의 아류 법치다. 대통령제 체제에서 법률안 거부권 제도를 둔 취지는 대통령이 국회 위에 군림하게끔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국민 대표기관인 국회가 입법권을 오남용하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 또 다른 국민 대표기관인 대통령이 국민의 의사를 모아 그 입법을 저지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국회가 입법권을 전횡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그것은 대통령이 독단적으로 행사하는 권한이 아니라, 달리 어쩌지 못하는 순간에 국민적 토론과 합의의 과정을 거쳐 발동해야 하는 비정규적인 권한이다. 입법 과정에서 국회가 대표하지 않은 국민의 의사가 대통령을 통해 대표될 수 있도록 한 제도인 것이다. 그럼에도 윤석열 대통령은 법안을 추진하는 야당과 단 한 번의 협의 과정도 거치지 않은 채, 국민들에게 그 어떤 설명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내키는 대로 헌 칼 휘두르듯 거부권을 행사해 버린다.

법의 이름으로 수백만 명 살해
 
 민주노총 건설노조 조합원들이 5월 17일 오후 서울 중구 동화면세점에서 부터 숭례문 앞까지 모여 양회동열사 염원실현, 민생민주평화 파괴 윤석열정권 퇴진 민주노총 결의대회를 하고 있다.
ⓒ 이희훈
 
이 정부는 이런 모습을 "법치"라고 강변한다. 법이 추구하는 가치나 법의 이념은 내팽개치고 자신에 부여된 권한에 관한 규정만 최대한으로 확대 발전시킨다.

러시아 헌법재판소장 발레리 조르킨은 이런 '법치'를 개탄한다. "(히틀러의 나치체제와 스탈린 정부의 사회주의 체제에서) 수백만 명이 살해된 이유는 두 곳 모두에서 제정법이 곧 법의 전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제정법이란 히틀러나 스탈린이 선택한 법률 혹은 그들이 자의적으로 해석한 법률을 의미한다. 누군가가 법 위에 자리하여 자의적으로 법을 선택하고 해석하는 권력을 전유함으로써, 법의 이름으로 수백만 명을 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현대의 법치주의는 이런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청산에 기반한다. 대통령이 내세운다고 해서 법치가 정립되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 권력에 대한 국민들의 처절한 저항에서부터 법치주의가 구성된다. 거듭 말하거니와 법치주의란 대통령의 전유물이 아니라 우리 시민들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혹은 미국 독립선언이 강조하듯이 정부와 국가를 향해 총부리를 겨눌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우리 시민들의 법이 모든 권력의 위에 존재한다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우리 헌법 전문(前文)은 "우리 대한국민"이 헌법을 만들었음을 선언한다. 그 헌법을 읽으며 그 헌법을 생각하는 우리 모두가 헌법의 주체임을 밝힌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하버마스는 이를 헌법 애국주의로 표현한다. 그 헌법의 기본이념에 대한 우리들의 동의와 우리들의 충성이 곧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공동체를 구성하고 지배하는 최고의 기본법이라는 것이다. 제대로 된 법치주의는 이런 인식을 공유할 때 구성되고 또 구사된다.

윤석열 대통령은 신임 차관들에게 "저에게 충성하지 말고 헌법 정신에 충성하라"고 당부했다 한다. 하지만 그가 검사 시절 스스로를 "헌법주의자"라 했다는 전언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언명 또한 그 자신과 헌법을 동치(同値)시키는 것은 아니어야 한다. 이제 재임 기간의 4분의 1을 넘어서고 있는 이 정부가, 법치의 가면 아래 인치의 폭력을 휘두르다 엄청난 국민적 저항에 직면했던 지난날의 우리 정치사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한상희 /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한상희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헌법, 인권법, 법조사회학을 연구하며, 참여연대 공동대표를 겸하고 있습니다. 최근 정치의 지나친 사법화 현상을 주목하면서 사법개혁과 함께 시민정치를 복원할 수 있는 길을 찾고 있습니다. 그간 쓴 글로는 "시민 주도형 헌법 개정 절차", "정당정치와 헌법," "근대화와 법 발전" 등이 있고 번역서로 <헌법은 왜 중요한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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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에도 게재됐습니다. <소셜 코리아> 연재 글과 다양한 소식을 매주 받아보시려면 뉴스레터를 신청해주세요. 구독신청 : https://socialkorea.stibee.com/subscri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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