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3일만 나오세요"…영국 대학들 파격 '압축 수업' 속사정
'주 3일 수업'이 영국 대학들에 확산되고 있다. 대학이 나서 재학생들이 학업과 일을 병행할 수 있도록 학사 일정을 대폭 조정하고 있다. 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로 영국 경제가 휘청거리는 가운데, 생활비·임대료 마련에 어려움을 겪는 대학생들이 학업을 중단하지 않게 최대한 배려하겠다는 취지다.
5일(현지시간) 가디언과 텔레그래프 등에 따르면 올해 학기가 시작되는 가을부터 영국의 드 몽포르 대학, 코벤트리 대학(그리니치·대거넘 캠퍼스), 선더랜드 대학, 런던 로햄턴대학, 앵글리아 러스킨 대학(런던캠퍼스), 영국 법학대학 등은 '주 3일 압축 수업'을 시행한다.
학생이 임의로 한 주에 이틀·삼일을 몰아서 시간표를 짜는 게 아니라, 학교 차원에서 주 3일만 강의·세미나를 개설해 학생이 학교에 꼭 나와야 하는 시간을 줄이는 식이다. 여러 과목을 한 주에 듣는 게 아니라, 한 과목씩 7주 동안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블록티칭(Block Teaching)' 방식을 취했다. 출석하지 않아도 된 이틀 동안 학생들이 일자리를 구해 생활비를 벌도록 하자는 취지이다.
이미 지난해 일부 학과에 이 제도를 시범 운영한 드 몽포르 대학의 케티 노밍턴 부총장은 "재학생들로부터 좋은 피드백을 받았다"고 밝혔다. 이 학교의 자체 설문 결과 주 3회 수업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학생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삶의 질이 높아졌고, 10% 정도 더 행복감을 느꼈다.
주 3일 압축 수업을 대학들이 도입한 이유는 생활비 마련에 힘겨워하는 학생들이 많기 때문이다. 영국 고등교육정책연구소(HEPI)가 지난 6월 1만명의 대학교 재학생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76%가 임대료와 식료품 등 생활비 부담이 학업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답했다. 응답자의 절반 이상(55%)은 학업과 일을 병행하고 있고, 주당 평균 13.5시간을 일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예전에도 영국 대학생이 시간제 일자리(아르바이트) 등으로 부족한 생활비를 마련해왔다. 하지만 요즘 대학생들이 겪는 경제적 어려움은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라고 영국 매체들은 보도했다. 상당수 학생이 1주에 최소 2개 이상의 일을 병행해야 학업을 유지할 수 있다는 얘기다.
영국 하트퍼드셔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하는 클래리사 스트루터(26)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조교, 아동 돌봄이 등 주당 최대 4일은 일을 해야 버틸 수 있다. 학업에 지장이 생겨도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여러 개의 아르바이트를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강의를 건너뛸 수밖에 없다는 호소도 나온다. 러셀 그룹(영국 명문대 24곳) 학생회가 지난 3월 공개한 조사에 응답자 5명 중 1명은 생활비 문제로 중퇴를 고려한다고 답했다.
실제로 영국의 물가는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영국의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지난해 10월 11.1%를 기록했다. 이후 소폭 하락했지만(7월 6.8%) 여전히 가계에 큰 부담이다.
임대료도 골칫거리다. 영국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월 임대료는 836파운드(약 140만원)로, 전년보다 약 5.3% 증가했다. 주택 수요가 공급량을 앞지르며 지난 7월까지 영국 전역의 월 임대료가 주택 가격 상승률보다 두 배 이상 증가했다. 가족과 떨어져 학교 근처에서 따로 살아야 학생에겐 직격탄이다. 그래서 거리가 멀어도 통학을 택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영국 중앙은행(BOE)의 앤디 홀데일 전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스카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빨리 적절하게 금리를 올리고 통화 긴축을 해야 했는데, 양적 완화를 필요한 것보다 더 오랜 시간 지속했다"며 "정부가 인플레이션을 부채질하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말했다. 정부 실책의 유탄을 고스란히 학생들이 맞고 있는 셈이다. HEPI 관계자는 "정부가 제때 적절한 조처를 하지 않으면 대학이 소수의 부유층, 특권층 자녀만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걱정했다.
야당, '학생 구제' 내세우며 표심 공략
보수당 정부가 내년 말 조기 총선을 검토하는 상황에서 대학생의 생활고 등은 정치 이슈로 비화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최근 노동당의 키어 스타머 대표는 "내가 지금 학교를 다닌다면 암울한 경제 상황, 치솟는 물가로 생활비에 허덕이다 졸업도 못 했을 것"이라며 리시 수낵 정부를 비판했다.
그는 "임대료 인상과 생활비 증가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을 위해 실질적인 경제 구제책을 조만간 선보일 것"이라고 밝혔다. 영국 시장조사업체 오피니엄에 따르면 지난달 30일부터 1일까지 여론조사에서 노동당의 지지도(42%)가 보수당(28%)을 앞서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민정 기자 kim.minjeong4@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왜 한국을 중국 일부라 했나…이제야 드러났다, 시진핑 속내 | 중앙일보
- 고교생 딸 친구 26번 성폭행…통학차 기사, 2심서도 "난 무죄" | 중앙일보
- 조개구이는 옛말…모든 객실이 스위트룸, 승마도 즐기는 그 섬 | 중앙일보
- 용산 상공 400m서 핵폭발?…김정은 '최대 살상고도' 찾고있다 | 중앙일보
- 엑소 디오 코에서 연기 딱걸렸네…대기실서 흡연, 과태료 낸다 | 중앙일보
- "비싸서 안 가""무조건 해외로"…황금연휴에도 내수는 빨간불 | 중앙일보
- 김정은 딸 김주애 표정, 밝았다 어두워져…통일부 분석 보니 | 중앙일보
- 美서 '징역 100년' 서씨 사연 어떻길래…특별사면 여부 주목 | 중앙일보
- [단독] "쉿! 유출 안돼" 삼성, 반도체 개발에 '네이버 AI' 쓴다 | 팩플 | 중앙일보
- 문신 드러낸 채 직원 위협…'하얏트호텔 난동' 수노아파 자백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