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 실체 없는 싸움에 매몰된 한국 정치
뭘 의미하는가에 대해 사회적 합의는 없어
두 용어가 정치적 아군과 적군 구분 명패로만 사용되기 때문
지지세력 동원할 프레임 짜기 위한 것…
철 지난 이념논쟁과 뜬금없는 단식 모두
상대 진영 공격 위한 프레임일 뿐
시민들은 대한민국 미래 비전이 뭔지 묻고 따져야…
상대 진영 아닌 자기 진영에 물어
지지할 만한 정치인인지 확인하길
한국과 미국 가운데 어느 나라가 더 나은 민주주의를 하고 있나? 기득권 세력이 우리 사회 개혁을 막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매 학기 한국정치론 첫 시간에 학생들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개념에 대한 정의(定意)를 공유해야만 합리적이고 생산적인 토론이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민주주의, 기득권, 개혁 모두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이다. 민주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은 다양하다. 기득권 세력이 누구인지, 개혁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도 다르다. 동일한 용어지만 제각각 다른 의미로 사용할 가능성이 높다. 엄밀한 개념 정의가 없는 대화와 토론은 이해와 합의가 아닌 혼란과 불신만 가져올 뿐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공산전체주의를 추종하는 반국가세력에 속거나 굴복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이 말하는 공산전체주의와 반국가세력이 무엇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최근 간첩단 사건이 발생하지도 않았고 반국가 시위도 없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사즉생 각오로 민주주의 파괴를 막겠다며 무기한 단식에 돌입했다. 우리 민주주의가 어느 지점에서 야당 대표가 단식투쟁을 해야 할 만큼 무너졌는지 알 수 없다. 매년 세계 민주주의를 평가하는 이코노미스트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한국 민주주의 지수는 그 전해보다 몇 단계 낮으나 여전히 완전한 민주주의(full democracy)로 평가받고 있다.
미국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는 “갈등은 민주주의의 엔진”이라고 했다. 갈등이 없는 사회는 권위주의나 전체주의 국가다. 갈등을 통해 문제 해결의 대안이 드러나며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간다. 한국 정치를 걱정하는 이유는 여야 갈등이 심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갈등이 문제 해결의 대안을 제시하지도 못할뿐더러 사회적 합의를 만들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갈등이 민주주의의 엔진 기능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갈등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핵심 갈등 요인이라 할 수 있는 이념 갈등부터 그 실체가 불분명하다. 문제는 사용하는 용어가 모호하고 추상적인 데 있다. 과거 노무현 대통령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하면서 자신의 지지 집단인 진보 세력으로부터 엄청난 공격을 받았다. 당시 노 대통령은 본인의 이념 성향을 좌파적 신자유주의자라고 설명했다. 북한 문제에 있어서는 진보이고 시장에 대해서는 보수라는 뜻이다. 진보와 보수 양 진영이 동시에 그를 궤변론자라고 비난했다. 사실 시장 개방과 북한에 대한 태도가 같아야 할 논리적 근거는 없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지극히 상식적인 논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념 갈등이 한국 사회의 핵심적 갈등임에도 진보와 보수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없다. 실제 한국 사회에서 보수와 진보 개념은 서로 다른 가치체계가 혼재된 상태로 사용되고 있다. 서구 국가들이 사용하는 좌파와 우파 개념은 시장에 대한 태도를 기준으로 구분한다. 반면 우리의 진보와 보수 개념은 시장뿐 아니라 북한 문제와 도덕적 가치까지 담고 있다. 동일한 이념 집단 내에서도 지향하는 가치와 미래 비전이 다를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누구도 개념을 명확히 규정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진보와 보수는 토론과 합의를 위한 용어가 아니라 정치적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는 명패로만 사용하기 때문이다. 우리 편이 어떤 가치를 공유하는지, 상대는 우리와 뭐가 다른지 확인하지 않는다. 사회적 합의를 찾기 위한 대화도 필요 없다. 지지 세력을 동원하고 시민을 선동할 수 있는 프레임을 짜는 게 더 중요하다. 철 지난 이념 논쟁과 뜬금없는 민주주의 수호 단식 모두 상대 진영을 공격하기 위한 프레임이다. 문제는 자신들의 정쟁 프레임이 우리 사회를 망가트리지만 자기편을 결속하는 데 꽤 효과적이란 점이다.
권력을 탐하는 정치인들에게 합리적이고 생산적인 갈등 프레임을 기대하기 어렵다. 시민들이 묻고 따져야 한다. 복잡하고 어렵더라도 민주주의 엔진 기능을 할 수 있는 갈등 프레임을 짜야 한다. 그러려면 진보, 보수, 친일, 친북 같은 모호하고 선동적인 용어는 그만 사용해야 한다. 대신에 구체적이고 논리적인 토론을 할 수 있는 질문을 해야 한다. 갈수록 심각한 소득 양극화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저출산 고령사회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그리고 대한민국의 미래 비전은 무엇인지. 상대 진영이 아닌 지지하는 정치 세력에게 물어 과연 내가 지지할 만한 정치인이지 확인해야 한다.
윤성이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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