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렬의 시시각각] 재정중독 끊고 성장 해법 찾기
1997년 말 외환위기 당시 국제통화기금(IMF)과 한국 정부는 ‘재정 확대’를 놓고 격하게 대립했다. IMF는 구조조정 과정에서 재정을 더 쓰라고 밀어붙였고, 예산 당국은 건전 재정이 중요하다며 버텼다. IMF 관계자 입에서 “IMF가 적자 재정을 편성하라는데 버틴 나라는 한국밖에 없을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구제금융을 받는 나라는 포퓰리즘으로 재정이 파탄 난 경우가 많았기에 재정 긴축은 IMF의 단골 요구사항이었다. 그런 IMF에 재정 형편이 좋은데도 건전성 방어에 집착하는 한국은 이상한 나라로 비쳤다. 예산 당국이 필사적으로 지켜낸 재정은 외환위기 극복의 원동력이 됐다. 금융·기업 구조조정의 실탄이 됐던 169조원의 공적자금은 튼튼한 재정이 뒷받침한 것이었다. 현재 50%를 넘어선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이 97년엔 11.1%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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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57조 내년 예산, 여야 격돌 예고
9월 빚 폭탄 위기설 실체 없지만
1%대 저성장 벗어날 전략 시급
」
세계의 모범이었던 재정 건전성은 문재인 정부에서 급격히 흔들렸다. 문 정부는 재정을 경제정책의 선봉에 세웠다. 코로나 상황이란 특수성까지 작용했다. 문 대통령은 국가채무비율을 GDP의 40%대 초반에서 관리하겠다는 홍남기 경제부총리에게 40%의 근거를 캐묻기도 했다. 당·정·청엔 충분한 재정 투입이 성장률을 높여 국가채무비율 악화를 막는다는 ‘좋은 채무’ 논리가 득세했다. 위험한 발상이었다. 그 결과가 5년간 국가채무 400조원 증가다(2017년 660조원→2022년 1069조원).
문 정부의 재정 폭주 시대를 거치면서 재정정책은 이념의 상징이 됐다. 정치 진영에 따라 재정을 대하는 시각이 확연하게 갈렸다. 보수 진영은 방만한 재정이 국가 경제의 기초체력을 떨어뜨렸다며 긴축 필요성을 강조한다. 진보 진영은 재정 형편이 아직은 괜찮으니 재정을 적극적으로 쓰자고 주장한다. 보수와 진보의 상반된 인식은 정기국회에서 격렬한 충돌을 예고한다. 윤석열 정부의 내년도 예산안은 656조9000억원. 2005년 이후 최저 증가율(2.8%)이다. 윤 대통령은 ‘재정 만능주의와 선거 매표 예산의 배격’을 선언했다.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저성장과 경기 침체의 고통을 국민에게 떠넘긴 국민 포기 예산”이라며 6%(약 38조원) 이상 증액을 요구한다.
통상 경기가 어려우면 재정 지출을 통해 경기를 떠받쳐야 한다고 얘기한다. 재정의 경기 안정화 기능이다. 그러나 이런 논의는 방만 재정의 폐해가 산적한 상황에선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게다가 그 재원이 무리한 빚을 내는 것이라면 환영받지 못한다. 문 정부에서 그토록 재정 지출을 늘리고도 정작 경제 성장이 신통치 않았다는 사실도 재정 확대 논리의 발목을 잡는다. “빚내서 재정을 확대해 경기를 부양하는 것은 모르핀 주사”(추경호 경제부총리, 8월 22일 국회 기획재정위)라는 정부의 문제의식은 옳다.
문제는 성장이다. 정부의 올해 성장 전망치는 1.4%에 그친다. 외환위기 등 특수 상황을 제외하면 최저다. 정부는 돈을 풀어 경기를 인위적으로 끌어올리지 않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다른 성장 정책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기업과 소비자를 움직일 규제 완화도, 구조개혁도, 산업 정책도 잘 보이지 않는다. 시중엔 ‘9월 위기설’이 떠돈다. 핵심은 ‘빚 폭탄’이다. 코로나 기간에 중소 상공인에게 지원해 준 대출금 상환 유예 조치가 9월에 끝나는데, 이들이 빚을 갚지 못하면 금융 부실이 확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위기설은 ‘설’로 끝날 것이다. 금융당국에 따르면 6월 말 기준 대출 잔액의 93%인 71조원은 2025년까지 만기가 연장된다. 부실 위험이 있는 이자상환유예 규모는 1조500억원에 불과하다. 한국 경제에 위험이 될 수준은 아니다. 그런데도 위기설이 퍼진 것은 금융기관 연체율이 치솟고, 개인회생 신청이 급증하는 등 불황의 그늘이 짙기 때문이다. 성장하지 못하는 경제에선 온갖 문제가 꼬이는 법이다. 1%대 성장을 벗어날 과감한 전략이 시급하다.
이상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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