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재의 전쟁과 평화] 하루아침에 군함 이름 바꾼 미국판 ‘역사 바로세우기’

이철재 2023. 9. 7.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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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재 군사안보연구소장·국방선임기자

일본 요코스카(橫須賀)에 전진 배치된 미국 해군의 이지스 순양함인 챈슬러스빌함(CG 62)은 올 2월 27일 ‘로버트 스몰스함’이 됐다. 이 순양함은 1989년 취역한 뒤 걸프전과 이라크전에서 싸웠던 ‘역전의 용사’다. 2011년 일본 도호쿠(東北) 대지진 구조 작전에도 참가했다. 한국과 인연이 있다. 지난해 9월 핵추진 항공모함인 로널드 레이건함(CVN 76)과 함께 부산을 찾았고, 지난해 10월 동해에서 한·미·일 탄도미사일 방어 훈련을 뛰었다.

미 해군이 군함 이름을 바꾼 건 미국판 ‘역사 바로세우기’ 때문이었다. 미 국방부는 2021년부터 남북전쟁 당시 남군 또는 남군에서 복무한 사람을 기리는 군의 명칭·상징·전시물·기념물·설비를 제거하거나 개명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챈슬러스빌함은 1863년 4월 30일~5월 6일 버지니아주 챈슬러스빌에서 벌어졌던 남북전쟁 전투에서 유래했다. 이 전투에서 남군은 두 배나 많은 북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

챈슬러스빌함→로버트 스몰스함

미국 육군의 포트 브래그가 지난 6월 포트 리버티로 기지명을 바꿨다. 미군에서 남북전쟁 때 남군의 흔적을 지우는 작업의 일환이었다. 포트 리버티의 새 출입구다. [AP=연합뉴스]

로버트 스몰스는 흑인 노예 출신으로 남군 해군의 무장 수송선인 플랜터함의 선원이었다. 1862년 5월 13일 그는 가족과 다른 노예를 플랜터함에 태우고 남부를 탈출, 북군에 항복했다. 이후 플랜터함의 함장으로 활약했고, 5선 하원 의원을 역임했다.

카를로스 델 토로 미 해군장관은 챈슬러스빌함에서 로버트 스몰스함으로 이름을 바꾼 것 대해 “역사를 다시 쓰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신조와 맞지 않는 역사에 관심을 갖지 않도록 하고, 대신 우리가 간과했을 수도 있는 역사의 사건과 사람을 강조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로버트 스몰스는 함명의 자격이 있는 인물이며, 앞으로 그의 얘기는 이어지며 강조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미 해군은 지난 3월 8일 해양탐사선인 머리함(T-AGS-66)을 마리 타프함으로 달리 부르겠다고 밝혔다. 머리함은 미국의 유명 해양학자인 매슈 폰테인 머리를 기념한 함명이다. 머리는 바닷길을 최초로 학문적으로 연구한 ‘해양학의 아버지’다. 해양기상학과 해양지질학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는 남부연합(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으로의 분리와 남북전쟁을 반대했지만, 개전 후 남부연합에 가입한 고향인 버지니아주를 위해 남군 해군의 사령관이 됐다. 마리 타프함은 대서양 해저 지도를 만들고 대륙 이동설을 증명한 여성 과학자의 이름으로 명명했다.

미 국방부가 미군에서 남군의 흔적을 지우려는 배경엔 2020년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이 있었다. 플로이드는 체포 과정에서 경찰관에게 목을 눌려 질식사했다. 그의 죽음으로 미 경찰의 과잉진압에 대한 항의 시위가 미국에서부터 전 세계로까지 퍼져나가게 됐다.

또 인종차별과 연관된 동상과 기념물에 낙서하거나 이를 훼손하는 사건이 잇따랐다. 신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동상도 원주민 노예화와 대량학살의 원흉이란 재평가 때문에 공격 대상이었다. 일부 주·시 정부에선 관련 동상과 기념물을 철거했다.

2020년 흑인 과잉 진압 사건 여파

미 해군이 이름을 바꾼 마리 타프함. 옛 함명은 남군 제독과 남군이 이긴 전투에서 땄다. [사진 미 해군]

그러자 미 의회는 2021 회계연도 국방수권법(NDAA)에 국방부의 모든 자산에서 남군 색채를 빼라는 내용을 추가했다. 당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참전용사와 군대의 역사를 존중하지 않는 조항이 포함됐다”며 거부권을 행사했다. 하지만 미 상·하원의 재투표에서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서 국방수권법은 확정됐다. 진보적인 민주당과 보수적인 공화당이 법안의 취지에 공감했다는 뜻이다.

미 국방부는 2021년 3월 ‘국방부 물품 명칭 위원회(명칭위)’를 만들었다. 명칭위는 퇴역 장성과 양 정당에서 추천한 인사로 꾸려졌다. 이들은 열 달 간 활동하면서 개명 권고안 목록을 냈다. 미 육군에선 기지 9곳, 해군에선 함정 2척과 건물 2동, 공군에선 도로 1곳이 각각 권고대상이었다. 명칭위는 미 육군 기지의 새 이름을 지을 때 참고하라며 90명을 추천했는데, 이들은 여성·흑인·원주민(인디언)·히스패닉·일본계 등 성별과 인종이 다양한 전쟁영웅들이었다.

로버트 스몰스함과 마리 타프함은 미 해군이 명칭위의 권고안을 따른 결과다. 미 육군도 기지 9곳의 간판을 새것으로 갈았다. 이 작업에 6250만 달러(약 823억원)의 예산이 들어갔다.

미 해군이 이름을 바꾼 로버트 스몰스함. 옛 함명은 남군 제독과 남군이 이긴 전투에서 땄다. [사진 미 해군]

공수부대와 특수부대의 요람으로 알려진 포트 브래그는 지난 6월 2일 포트 리버티로 변했다. 포트 브래그는 남군의 브랙스턴 브래그 장군을 추모해 이름이 붙여졌다. 포트 리버티의 리버티(Liberty)는 미국 헌법적 가치인 자유를 딴 기지명이다. 공화당 대선 주자인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와 마이크 펜스 전 부통령은 “상징적 이름과 기지를 정치적으로 훼손했다”고 비판하면서 대통령 당선 후 포트 브래그로 되돌려놓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군은 깃발과 명칭 등 상징을 중요하게 여긴다. 충성심과 사기가 상징에서 비롯하거나 상징 때문에 강해진다고 믿는 게 군이란 조직이다. 그러나 미국의 사례에서 보듯 군의 상징은 영원불변하지 않을 수 있다. 재평가와 인식 변화에 따라 바뀔 수도 있다.

한국과 미국, 무엇이 달랐나

다만 미국은 여야가 합의했고, 위원회에서 신중히 검토했다. 육군사관학교의 독립영웅 흉상들을 옮기려 하는 우리 군 당국과는 전혀 다른 행보다. 독립영웅들 가운데 특히 공산당 경력이 있는 홍범도 장군이 논란의 중심에 섰다. 그의 이름으로 지은 잠수함인 홍범도함의 개명을 놓고 정부의 입장이 오락가락하고 있다.

미국에서처럼 군함 이름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있다. 그에 앞서 공개적으로 논의한 뒤 합의하는 과정은 필수다. 군 당국은 민주주의에선 명분 못지않게 중요한 게 절차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더군다나 지난달 24일 흉상들을 육사에서 독립기념관으로 이동하려다 무산됐다. 군사작전처럼 비밀리에 전격적으로 해야만 했을까.

이철재 군사안보연구소장·국방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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