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정연X정지돈 <우리는 가끔 아름다움의 섬광을 보았다>
Q : 한국영상자료원 홈페이지에 약 2년간 연재한 ‘한국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의 글이 한 권의 책으로 묶였습니다. 어떻게 시작된 건가요
A : 금정연(이하 금) 한국영상자료원이 두 작가가 친하니까 격주로 돌아가면서 20세기 한국영화에 대한 글을 연재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어요. 2000년대 영화 중에서 최고의 작품을 직접 꼽고 그에 대한 이유를 나열하는 형식의 글은 조금 부담스럽고, 재미를 더하고 싶어서 둘이 각자 영화에 대해 쓰는 게 아니라 서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식으로 쓰면 어떻겠냐고 한국영상자료원에 역으로 제안했어요. ‘어떤 내용을 연재할까’를 고민하는 이야기가 첫 화의 주제거든요. 우리가 한국영화를 이야기한다는 것이 단순할 수도 있지만 결코 단순하지 않은 일이에요. 영화의 정의와 산업, 문제 등 다양한 가지로 이야기가 뻗어나가기 때문이죠. 그래서 한국영화에 대해 말하는 방식을 직접 찾아나가는 과정을 연재 속에서 풀어보고 싶었어요.
A : 정지돈(이하 정) 좋아하는 한국영화를 꼽을 때 할 수 있는 이야기는 결국 뻔한 것이라 생각했고, 영화를 통해 삶에서 겪는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기획 방향을 틀었어요. 영화 한 편 정해서 리뷰하는 형식의 글을 쓸 때는 주제와 흐름, 소재가 정해져 있어요. 하지만 정해진 틀을 없애기로 결정했죠. 정연 씨가 말했듯 이야기를 주고받는 식으로 연재해도 좋을 거라고 믿었던 이유는 이전에 함께 글을 연재해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에요. 서로를 잘 알고 있고, 상대방이 어떤 주제나 소재를 던지더라도 받아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죠(웃음). 그렇게 연재했을 때 더 재미있기도 했고요. 캐치볼처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리듬이 살아 있는 글이 완성됐죠.
Q : 글을 연재하는 과정에서 잃지 않으려 한 건
A : 정 재미죠.
A : 금 그렇죠. 재미가 제대로 유지됐는지 읽어보고 판단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웃음). 대주제가 ‘한국영화’이니 한국영화라는 소재를 잃지 않는 데 유념했어요. 결과적으로 ‘한국에서 영화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무엇인가’가 전체 주제를 아우르는 질문이었던 것 같아요. 작품과 배우, 감독, 산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영화를 보고 즐기는 문화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요.
Q : 두 사람이 주고받으며 완성된 글은 표면적으로 봤을 때 상당히 유쾌합니다. 시시콜콜한 농담이 쏟아지죠. 두 사람에게 유머란
A : 금 삶에서 중요한 것이죠. 재미있는 걸 보고 쓰는 행위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 이 글을 연재할 때 대상이 되는 사람, 즉 수신인이 분명히 있고 ‘이렇게 쓰면 지돈 씨가 웃을 것 같은데’라고 생각했어요. 남들은 안 좋아할 수 있지만 나한테 웃긴 것들을 글에 넣는 것. 그 자체가 유머가 아닐는지.
A : 정 맞아요. 저는 최근 들어 웃기지 않은 건 보기 싫더라고요. 영화든 글이든. 옛날에는 비장하고 심각한 걸 좋아했지만, 이제는 모든 콘텐츠에 유머가 빠지면 섭섭해요. 블랙 코미디적인 요소가 깔려 있는 작품도 좋아하고요. 그래서 정연 씨의 글을 좋아하죠.
A : 금 사실 세상을 살면서 이해하지 못하는 건 유머 감각을 대하는 태도예요. 제가 보고 웃긴 걸 남이 웃기지 않다고 말하는 게 이해가 안 돼요. 제 글을 읽고 ‘호불호가 갈리는 농담 코드’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저는 그 말에 공감을 못하겠더라고요.
A : 정 코미디만큼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는 장르가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유머는 가장 지적이고 내밀한 작업의 하나죠. 하지만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한국영화에 코미디영화가 거의 없다는 점이에요. 서사 중간에 말장난이나 농담을 넣었을 뿐 코미디영화 장르 자체가 거의 사라지고 없어요. 문학도 유머가 중심이거나 코미디가 담기면 급이 낮은 취급을 당하는 경우가 있어요. ‘웃기려 든다, 이제 진지한 거 하자’는 식의 시선은 굉장히 심각한 문제인 것 같아요.
Q : 〈우리는 가끔 아름다움의 섬광을 보았다〉는 ‘펫 시티’라는 제목의 페이퍼 시네마 이야기로 시작해요. ‘페이퍼 시네마’라는 낯선 개념에 대해 설명한다면
A : 정 페이퍼 아키텍처라는 용어가 있어요. 실제 현실에선 구현되지 않는, 설계 도면으로만 존재하는 건축물을 말하죠. 이 개념을 빌려와 만든 페이퍼 시네마는 시나리오에서만 존재하는 이야기를 의미해요. 제작을 염두에 두고 쓰는 글에는 엄청난 제약이 따르거든요. 하지만 페이퍼 시네마에선 제약 없이 상상력을 따르면 되죠. 그 점이 흥미로웠고, 페이퍼 시네마라는 이름하에 몇 가지 연재 작업을 진행했어요.
Q : 비록 페이퍼 시네마지만 실제 영화로 탄생하면 어떨지 상상해 봤나요
A : 정 그런 생각은 전혀 없었던 것 같아요.
A : 금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쳤죠. 제작 같은 상업적 고려를 전혀 하지 않고 ‘이렇게 쓸 수 있나? 이렇게 써도 실어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제약 없이 썼거든요.
A : 정 작가에게 그런 기회가 정말 중요하고 필요한데, 지금 예술에서 그런 기능은 다 사라졌죠. 순수예술이라 해도 상업적 고려 없이는 안 이뤄지거든요.
Q : 책에는 영화와 얽힌 두 사람의 다양한 일화가 등장합니다. 이를테면 한일극장에서 〈클리프행어〉를 보기 위해 줄 서서 기다렸던 일화, 금정연 씨가 LP에 빠져 8개월 할부로 카드를 긁었다는 내용 등. 미처 싣지 못한 일화가 있다면
A : 금 사실 글에 아무거나 다 넣는 것 같아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박박 긁어서 넣기 때문에 아쉬운 건 없지만, 그래도 한국영화에 대해 말하는 글이니 제가 영화 현장에서 겪었던 일을 더 많이 쓸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책에서 볼 수 있듯이 〈나랏말싸미〉 제작에 참여했을 때 과정에 대해서도 농담처럼 가볍게 쓰고 넘어갔는데, 그 과정에 대해 자세히 쓸 수도 있었겠죠. 〈나랏말싸미〉 이후에 모 영화 대기업과 3~4개월간 소설 원작 영화를 작업했던 적이 있어요. 그 과정에서 느낀 환멸에 대해서도 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스치네요.
A : 정 영화평론가들 이야기도 다루는데요, 저는 이들의 비평을 좋아하고 늘 흥미로워하거든요. 비평과 관련한 이야기를 조금 더 다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요즘 제가 아쉬움을 느끼는 부분은 사람들이 비평 같은 글에 무관심하다는 거예요. 요즘 사람들은 비평보다 영상으로 영화 리뷰 영상이나 요약본에 더 흥미를 가지죠. 유튜브에서 영화를 리뷰해 준다는 것 자체를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영화를 요약, 설명하는 게 아니라 비평 방식으로 더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식으로 문화를 향유하는 걸 선호하는 사람들과 그런 콘텐츠가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Q : 요즘 유튜브로 요약본 형태의 영화를 시청하는 사람이 많더라고요
A : 금 옛날에는 영화가 정시 시작이면 극장에 5분만 늦게 도착해도 아예 안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영화를 처음부터 봐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경우가 거의 없죠.
A : 정 심지어 영화를 유튜브 요약본으로 보는 걸 더 재미있어하는 사람들도 있어요(웃음). 영화를 통째로 관람하는 것보다. 영화 요약 유튜버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맛있게 설명하고, 재미있는 부분만 쏙쏙 뽑아서 보여주니까요. 그러니 시청자들은 영화에서 진짜 재미있는 부분을 놓칠 수도 있어요. 예를 들어 〈타짜〉를 요약본으로 봤다면 영화 속 수많은 캐릭터가 과연 시청자 뇌리에 남았을까요? 그저 곽철용 ‘밈’만 살아남지 않았을까 하는 우려가 듭니다. 그런데 우리가 영화를 보고 진짜 즐거움을 느끼는 건 아주 사소한 장면 때문이기도 하거든요. 요약본을 보면 사소하지만 중요한 부분을 놓칠 수도 있어요.
Q : 두 사람에게 한국영화가 주는 행복과 슬픔은 무엇인가요
A : 금 한국영화가 주는 행복과 슬픔은 그것이 한국영화라는 점인 것 같아요. 한국영화가 한국적인 것을 너무 잘 표현하면 그게 기쁠 수도, 슬플 수도 있어요. 이를테면 저는 〈타짜〉를 정말 좋아해요. 좋아하는 이유는 ‘아무리 봐도 잘 찍었네. 어떻게 저런 호흡으로 대사를 하지?’ 하면서 끝까지 보게 되거든요. 외국영화 중에 그런 생각으로 보는 영화는 없어요. 제가 느끼기에 〈타짜〉는 한국 사회를 너무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그 영화에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고, 거기서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반대로 한국 배우가 못생긴 표정을 하고, 못생긴 한국어를 하면 싫어요. 항상 등장하는 진상, 조폭 같은 것 말이죠. 반복적으로 쓰는 한국적 클리셰라고 할까요. 한국영화에서 그런 것들이 등장하면 견디기 힘들어요. 한국인이고, 공감할 수밖에 없어서 그런 것 같아요.
A : 정 한국영화의 슬픔과 행복이라고 하니 예시로 〈범죄도시〉가 떠오릅니다. 마동석 배우가 등장해서 “야, 이리 와봐” 하며 주먹 한 방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장면을 보면 막 기뻐요. 그런데 그걸 보고 기뻐한다는 사실이 너무 슬픈 거죠. 〈범죄도시〉는 1000만 관객을 넘긴 최고의 히트작이고, 한국에서 제일 인기 있는 콘텐츠 중 하나잖아요. 사실 그 영화가 중요한 정치적·도덕적 문제를 단순화시켜 버린다고 생각하거든요. 영화 속에서 마동석은 경찰임에도 불구하고 법과 상관없이 범죄자를 응징하고, 그 부분이 확실한 ‘사이다’를 선사하죠. 하지만 그 사이다가 갖고 있는 문제는 큽니다.
A : 금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안에서 한쪽을 악마화하고 다른 한쪽을 피해자로 만드는 대중 서사가 너무 만연한 것 같아요. 누군가는 그걸 현실에 적용해서 어떤 이슈마다 항상 ‘쟤가 나쁜 놈이었어’라며 피해자와 가해자를 나누죠. 나눌 순 있지만 대개 많은 경우는 복잡하게 얽혀 있고, 초개인적 문제가 존재하기 마련이잖아요. 하지만 그런 것들이 잘 가려지는 것 같아요.
Q : 함께 새로운 글을 연재할 수 있다면 다뤄보고 싶은 주제나 소재가 있는지
A : 금 저는 굉장히 상업적인 글을 쓰고 싶어요. 기승전결이 분명하고 서스펜스가 있는 글. 많은 사람이 본 즉시 ‘재밌네’ 하고 빨려 들어갈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건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런 이야기를 아주 좋아하더라고요. 〈더 글로리〉처럼 고자극 콘텐츠, 도파민이 마구 뿜어져 나오는 K드라마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최근 들어 깨달았어요.
A : 정 사실 아이디어가 정말 많은데 실제로 써지는 건 별로 없어요. 그런데 이 자리에서 그 아이디어를 말할 수는 없죠(웃음).
A : 금 실패한 아이디어는 말할 수 있잖아요.
A : 정 그건 부끄러워서 말 못 해요. 아직 시도하지 않은 아이디어는 누군가에게 빼앗길까 봐 말 못 하고요. 부끄럽지 않은 선에서 실패한 아이디어를 말하자면 일제시대 식민지 시절 이야기를 히어로가 등장하는 SF 장르와 결합해서 구상한 적 있어요. 한국영화사나 문학사에서 식민지 시기는 아직도 무궁무진한 소재가 될 수 있거든요. 할리우드 작품에서도 제2차 세계대전, 미국의 역사가 담긴 이야기가 끝없이 만들어지잖아요. 우리나라 역사에도 상상력이 뻗어나갈 수 있는 지점이 많은데, 아직까지 역사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부분이 있어서 상상력을 결합한 이야기로 잘 구현되지 않는 것 같아요. 하지만 역사로 무언가를 창작하고 싶다는 생각은 언제나 갖고 있습니다.
Q : 가장 화두는 무엇입니까
A : 정 지금 소설을 쓰고 있거든요. 예전부터 관심 있던 주제에 관한 글인데, 한 단어로 표현하면 저출산이에요. 이 문제를 SF와 결합해서 생각했죠. 과학과 기술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표 중 하나가 단순히 병을 낫게 하는 지점을 넘어 노화까지 더디게 하는 것이죠. 그 종착지는 결국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과학과 기술은 이를 실현하는 중인 것 같아요. 삶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라면, 또 다른 하나는 그 반대편에 있는 탄생이겠죠. 탄생도 기술적으로 자동화할 수 있다는 이야기고요. 자동화한다는 것은 굳이 남녀의 신체를 통해 진행될 필요가 없고, 그런 세상이 오면 가족이라는 개념도 더 이상 지금과 같은 의미가 아니겠죠. 그러니 저출산 문제는 생명의 탄생을 기계가 해결할 수 있으면 함께 해결되지 않을까. 이런 아이디어를 갖고 있습니다. 과학과 기술이 계속 발전하면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어떻게 달라질까 하는 것과도 연관되죠.
A : 금 요즘 저는 되게 수동적인 상태라 특정한 관심사가 있지는 않아요. 트위터 타임라인에 올라오는 모든 뉴스가 저를 자극하죠. 그래서 그중 어떤 하나에 관심이 쏠린 채 몰입하지는 못해요. 많고 다양한 정보와 뉴스들을 보는 행위를 멈출 수 없고, 모두 저를 비슷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공격하고 기분 나쁘게 해서 세상에 관심을 끊고 싶어요(웃음). 정리하면 정신 분산의 형태로 세계 정보들, 안 좋은 뉴스들이 몰려들어오고 있고 저는 속수무책으로 허우적대고 있죠.
Q : 영화를 사랑하는 두 사람이 가장 애정하는 영화가 궁금합니다
A : 금 잘 모르겠네요. 영화를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아요.
A : 정 진짜 웃긴다. 이제 와서(웃음). 〈알로하〉 같은 영화 좋아했잖아요.
A : 금 아, 맞아요. 〈알로하〉라는 영화가 있어요. 제가 좋아하는 영화의 조건 네 가지가 있습니다. 엠마 스톤, 라이언 고슬링, 브래들리 쿠퍼, 강아지가 나오는 영화를 좋아해요. 그런 캐스팅인데 서사에 갈등이 없으면 금상첨화죠. 〈알로하〉가 그 조건을 충족하거든요. 라이언 고슬링 빼고 다 나오죠.
A : 정 저는 〈크레이지, 스투피드, 러브〉. 어처구니없이 재미있는 영화예요. 왜 재미있지 하면서 계속 봤어요. 특히 라이언 고슬링이 뉴발란스 신발 신은 스티브 커렐의 뺨을 때리며 “갭(Gap)보다 나은 사람이 되어야지”라고 말하는 장면이 너무 웃겨요.
Q : 두 사람 모두 한국영화를 꼽지 않았군요
A : 금 한국영화는 애증 같은 존재죠. 아무리 좋은 한국영화라도 우리가 한국인인 이상 그 영화를 마냥 긍정할 수만은 없는 것 같아요. 한국 사회의 많은 면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내가 특정 한국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할 때 자칫 영화가 담고 있는 안 좋은 부분까지 좋아하는 사람처럼 여겨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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