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훈 서울시의 '역사 지우기'... 참 공교로운 이유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 5일 오전 서울 중구 남산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에서 강제추행 혐의로 1심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은 임옥상 작가의 작품 '대지의 눈'이 철거되고 있다 |
ⓒ 연합뉴스 |
오세훈 시장의 서울시가 '위안부' 추모 공간인 서울 남산 '기억의 터'에서 임옥상 작가의 미술품을 철거했다. 2013년에 자신의 미술연구소 직원을 성추행한 혐의로 임 작가가 지난 8월 17일 1심에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사실이 철거 사유가 됐다.
서울시는 보도자료에서 "기억의 터 내에 있던 임옥상의 작품은 모두 철거됐다"며 "전쟁 성범죄 피해로 고통 받아온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공간에 성추행 유죄판결을 받은 작가의 작품을 존치하는 것은 위안부를 모독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서울시는 "기억의 터는 유지"하겠다며 "새로운 콘텐츠로 채우는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임옥상 작품을 중심으로 조성된 공간에서 그의 작품을 철거했으므로, 기억의 터가 갖고 있던 위안부 추모의 의미는 퇴색할 수밖에 없다. 서울시는 임옥상 작품을 철거했다고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위안부 기억의 터를 훼손한 거나 다름없다.
물론 성범죄를 저지른 인물이 다른 것도 아니고 여성 인권과 관련된 미술품을 만들었다면, 사회적 비판의 강도가 당연히 높아질 수밖에 없다. 서울시가 '기억의 터 건립추진위원회' 등 여성단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서 이번 조치를 했다면,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서울시는 그들의 목소리를 외면했다.
'기억의 터 건립추진위원회' 등 시민·여성 단체들은 지난 4일 '기억의 터 서울시 기습 철거 규탄행동'을 열고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임 작가의 성폭력을 단호하게 비판하면서도 "기억의 터 건립추진위는 성폭력 가해자는 지우되 건립의 의미를 이어갈 수 있는 대안을 서울시와 협의중에 있었다"라고 말했다.
이어 "'기억의 터'는 임옥상씨의 것도 서울시 것도 아니며 오직 국민들의 정성과 마음을 모아 국민 모금으로 세운 것"이라며 "서울시의 '기억의 터' 철거는 일본군'위안부' 역사 지우기이고, 여성폭력 저항의 역사 지우기다. 서울시는 성추행 가해자 임옥상을 핑계로 일본군 '위안부' 역사를 통째로 지우려 하고, 여성폭력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하고 있다"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 지난해 6월에 찍은 서울 남산 '기억의 터' |
ⓒ 김종성 |
▲ 4일 오전 서울 중구 남산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에서 기억의 터 건립추진위원회, 정의기억연대 관계자들이 서울시의 기억의 터 철거 결정을 규탄하고 있다. |
ⓒ 연합뉴스 |
일본이 노린 남산의 슬픈 역사
만약 오세훈 시장의 서울시가 친일파의 흔적을 지우는 일에도 이 정도 열의를 보였다면, 이번 철거를 바라보는 국민적 시선은 훨씬 부드러워졌을 것이다. 대한민국 곳곳은 물론이고 서울시에도 여기저기 산재한 친일파들의 흔적을 방치한 채 임옥상 작품을 맹비난하고 있으니, 공정성의 문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에 더해, 이번 조치는 1965년 한일협정 직후의 현상과 궤를 같이하는 측면이 있다. 박정희 정권의 대일 굴욕외교에 힘입어 일본이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반성 없이 한국에 '컴백'한 직후에 벌어진 일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한일협정은 1965년 6월 22일 체결되고 동년 12월 18일 발효됐다. 이때부터 생겨난 새로운 풍경이 있다. 1967년 10월 5일 자 <경향신문> 1면 하단은 그 풍경을 "한·일 국교 후 일본의 대사관이 서울에 설치되고 또한 동경은행도 문을 열였다. 따라서 많은 일본인이 드나들고 있다"는 문장으로 묘사했다.
그 당시 일본인들이 특별히 애착을 보인 공간이 있다. 임옥상 작품이 철거된 서울 남산이 바로 그곳이다. 1972년 12월 12일자 <경향신문> 6면 전체 기사에 따르면, 1965년에 5110명이었던 일본인 관광객이 한일협정 발효 뒤인 1966년에는 1만 6873명이 되고 1968년에는 2만 5219명이 되고, 1969년에는 3만 2181명으로 늘어났다. 1971년에는 이 숫자가 9만 명으로 불어났다.
이들 일본인들이 필수적으로 방문한 곳은 서울 남산과 명동이다. 이 기사는 "특히 일본인 관광객"을 지목하면서 이들의 방문 코스가 "서울 일원의 고궁·남산·북악스카이웨이"라고 소개했다.
일본인들이 서울 남산을 좋아한 것은 이곳이 일본의 한국 지배와 관련이 많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는 이곳에 일본군 주둔지가 있었다. 구한말에는 남산 기슭에 일본공사관이 들어섰고, 지금의 충무로에 해당하는 남산 밑 진고개에는 일본인 주거지가 형성됐다.
일본 신사도 남산에 들어섰다. 남산대신궁(경성신사), 조선신궁, 노기신사가 그것이다. 일본 신도의 총본부이자 일왕의 조상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숭배하는 이세신궁의 상징물 일부도 남산대신궁에 들어갔다.
왜성대공원도 남산에 들어섰다. 임란 때의 일본군 주둔지에 이 공원이 세워졌다. 이번에 논란이 된 기억의 터 자리에는 한국통감부가 세워졌다. 이 장소가 띠는 의미에 관해 서울역사편찬원이 펴낸 <서울역사 답사기> 제5권은 이렇게 서술한다.
"이곳은 19세기 말 일본공사관이 있던 자리로 1905년 일제가 통감부를 설치하면서 통감관저가 여기에 들어섰다. 통감관저는 강제병합 후 1939년까지 그대로 조선총독의 관저로 이용되었다. 통감관저가 현재의 청와대 자리로 옮겨간 후에는 식민통치의 역사를 선전하는 시정기념관으로 운영되었다.
이 자리는 조선통감이나 총독이 살던 곳일 뿐만 아니라 1910년 8월 22일 제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총리대신 이완용이 한일강제병합조약을 조인한 장소이기도 하다. 말 그대로 국치의 장소라고 할 수 있다."
▲ 서울 남산에 있는 통감관저터 |
ⓒ 김종성 |
남산을 중심으로 일본인들이 모여들고, 일본의 종교 시설과 군대는 물론이고 통감부 관저까지 모여들었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의 남산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상징하는 곳이었다. 지금의 숭의여대 내에 있는 남산대신궁 터의 안내문에도 "조선 정벌의 상징인 이곳"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지금은 서울 남산을 바라보며 남산타워·애국가·소나무 등을 연상하고 독재정권 시절에는 중앙정보부를 연상했던 데 비해, 일제강점기에는 그곳을 올려다보며 '대일본제국의 조선 정벌'을 연상했다. 한일협정 이후에 일본인 관광객들이 남산을 꼭 들르려 했던 것은 이곳이 자부심을 주기 때문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협조에 힘입어 한국에 컴백한 일본은 자국의 색깔을 남산에 다시 입히고 싶어 했다. 그래서 추진한 것이 일본대사관을 남산에 세우는 방안이었다. 위의 1967년 <경향신문> 기사는 "일본대사관을 남산 일각에 세우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한다"라고 한 뒤 이것이 한국 측의 협조를 받고 있음을 보도했다. "그것을 내락한 사람은 한국 사람"이라고 지적했다.
만약 여론이 험악해지지 않았다면, 남산에 일본대사관이 들어섰을 수도 있다. 그것이 여의치 않게 되자, 일본이 다음 카드로 꺼내든 것이 흥선대원군 자택인 운현궁이다. 일본에 의해 멸망한 조선왕실의 주택에 대사관을 세우고자 했던 것이다.
이를 두고 1968년 4월 5일 자 <경향신문> 3면 중간 기사는 "묘하게도 일본 측은 민족감정을 자극하기 쉬운 곳을 잡아 그만큼 여론도 컸다"고 지적했다. 한국인들의 감정을 고려해 무난한 장소를 고르지 않고, 하필이면 한국 지배와 관련된 장소들만 꼭 집어냈던 것이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대사관 부지로 확정된 곳이 광화문광장 동편의 옛 일본대사관 자리다.
일본은 한국 땅에서 자신들의 힘이 강해질 때마다 서울 남산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럴 때마다, 일본과 관련된 시설들이 남산에 하나둘 세워졌다. 임진왜란 때도 그랬고, 구한말에도 그랬고, 일제강점기에도 그랬다.
누구를 위해 기억의 터를 지우나
지금과 상황이 비슷한 1965년 한일협정 직후에도 그랬다. 이때는 일본공사관이 있었던 서울 남산에 일본대사관을 세우려는 움직임이 상당히 구체화됐다. 이처럼 일본의 힘이 강해질 때마다, 남산에서는 친일 색채가 더욱 농후해져 반일 색채가 그곳에 자리를 잡기 힘들어졌다.
지금은 한국에서 일본의 힘이 재차 강해지고 있다. 윤석열 정권에 의해 일방적인 양보가 거듭 되풀이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시가 '위안부' 기억의 터를 지우고 있다. <서울역사 답사기>에 서술된 곳처럼, 그곳은 일제의 한국 지배를 가장 잘 상징하는 공간이다. 그런 곳에서 반일 기운을 누그러트리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서울시는 임 작가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조선 정벌'을 상징하는 핵심 장소에서 반일 색채를 지워주는 측면도 적지 않음을 부인할 수 없다. 누구를 위해 기억의 터를 지우는 것인지를 따져보게 만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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