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티벌은 젊은이 전유물? 철원에선 달랐다

이현파 2023. 9. 6.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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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2023 DMZ 피스트레인 뮤직 페스티벌을 가다

[이현파 기자]

   
 2023 DMZ 피스트레인 뮤직 페스티벌 무대에 오른 밴드 실리카겔
ⓒ DMZ 피스트레인 뮤직 페스티벌
 

말년 병장 시절, 훈련을 위해 장갑차를 타고 철원에 갔다. 철원의 추위에 온몸이 얼다시피 했다. 철원을 떠나면서 '다시는 이곳에 올 일이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때까지는 알지 못했다. 뮤직 페스티벌에 가기 위해 주기적으로 철원을 찾게 될 줄은.

2018년 탄생한 'DMZ 피스트레인 뮤직 페스티벌(이하 피스트레인)'은 분단의 상흔이 남아있는 고장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상업성 대신 다양성을 추구한 큐레이션과 특유의 정겨운 분위기로 음악 마니아들의 뜨거운 지지를 받았다. 팬데믹과 두 번의 취소, 지방자치단체의 예산 삭감 등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지만, 끊임없이 활로를 모색해 왔다.

지난 9월 2일부터 3일까지, 강원도 철원군 고석정 일대에서 네 번째 피스트레인이 열렸고, 9개국 26팀의 아티스트가 참여했다. 올해에도 아티스트의 면면은 다채로웠다. 래퍼 짱유와 프로듀서 제이플로우의 '힙노시스 테라피'부터 그랬다. 짱유는 공연 도중 무대 밑으로 내려가 관객들과 함께 직접 슬램을 즐기고, 관객 다섯 명을 무대 위로 올렸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는 첫날 대낮부터 사라졌다.

'전자 음악가'의 정체성을 강조한 씨피카는 모처럼 많은 관객에게 자신의 세계를 마음껏 뽐냈다. 일본의 인디 밴드 데이글로(DYGL)는 스트록스의 젊은 날을 소환했다. 밴드 실리카겔은 자신들이 한국에서 가장 뜨거운 밴드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Z세대 록 팬의 송가가 된 노래 'NO PAIN'으로 관객을 단합시켰고, 'Tik Tak Tok'에서 김춘추가 들려준 기타 솔로는 철원을 환각의 세계로 인도했다.
 
 2023 DMZ 피스트레인 뮤직 페스티벌 무대에 오른 이상은
ⓒ DMZ 피스트레인 뮤직 페스티벌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하지만 이제 뒤돌아보니 우린 젊고 서로 사랑을 했구나"

- '언젠가는(이상은) 중

토요일 밤의 가장 서정적인 순간은 이상은이 만들었다. 이상은은 젊은 관객들을 "내가 데뷔했을 때는 태어나지도 않은 우주의 먼지"라고 표현했지만, 노래의 힘은 세대를 넘어선 동질감을 형성했다. '삶은 여행', '언젠가는'과 같은 명곡의 향연에 눈물을 흘리는 젊은 관객도 심심찮게 보였다.

일요일에도 축제는 쉬지 않았다. 죽음에 대한 사유가 담긴 'Kiddo'를 부르던 도중, "(안타까운 죽음이 이어지는 시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노래 뿐이니까"라며 절규하는 김뜻돌의 목소리는 크게 공명했다. 아도이, CHS, 마이 앤트 메리 등의 무대도 유독 큰 호응을 끌어냈다. 백발 가객 최백호의 목소리로 울려 퍼지는 '사랑 그 쓸쓸함에 관하여'와 '낭만에 대하여'는 단연 압도적인 체험이었다.

페스티벌 첫회부터 이어진, '음악사적 의미가 있는 전설을 초대한다'는 기조는 유지되었다. 놀라운 라이브를 보여준 영국의 HMLTD, 홍콩의 NYPD 등 포스트펑크 밴드가 여럿 섭외된 가운데, 이 장르의 시발점인 독일의 전설 노이(NEU!)의 비하엘 로터가 출연한 사실이 특별했다. 역사의 오랜 연결 고리를 철원에서 확인했다.

해체된 위계, 모두가 연결된 페스티벌
 
 DMZ 피스트레인 뮤직 페스티벌을 상징하는 분수 무대
ⓒ DMZ 피스트레인 뮤직 페스티벌
   

음악과 공간 못지 않게 페스티벌을 정의하는 것은 관객의 좋은 태도다. 이 페스티벌에서 관객은 또 하나의 라인업이라 할 만하다. 시리아나 콜롬비아 등 낯선 국가의 뮤지션이 여럿 등장했지만, 피스트레인에선 장벽이 되지 않았다. 관객 각자의 취향은 천차만별이지만, '다름'을 받아들이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다.

'너만의 리듬에 맞춰(Dance To Your Own Rhythm)'라는 올해 키 메시지에 맞게, 관객들은 자신의 방식으로 공연을 즐겼다. 누군가는 깃발 부대의 지휘 아래 '슬램'과 기차놀이를 즐겼다. 누군가는 그 풍경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으며, 잔디밭에 드러누워 맥주를 마시며 음악을 들었다. 아티스트 역시 또 다른 관객이 되어 행사장을 돌아다녔다. 공연을 마친 영국 밴드 HMLTD는 최백호의 목소리에 존경어린 열광을 보냈다.

SCR(서울 커뮤니티 라디오)가 맡은 분수대 앞 디제이 공연도 여전했다. 티켓을 구매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열린 무대는 페스티벌의 지향점을 잘 축약한다. 한 중년 남자가 하우스 음악에 맞춰 화려한 춤솜씨를 뽐내고, 젊은이들의 환호와 박수를 받았다. 부모님의 손을 잡은 어린이부터 근처 꽃밭을 구경하러 온 노인까지, 모두가 어우러져 춤을 췄다. 페스티벌 문화가 젊은 세대의 전유물이라 믿는 이들에게, 이 장면은 좋은 반례다.
 
 2023 DMZ 피스트레인 뮤직 페스티벌
ⓒ DMZ 피스트레인 뮤직 페스티벌
 

매년 철원에서 발견하는 것은 서로 다른 연결의 가치다. 아티스트와 관객 간의 위계가 해체된다. 단절된 시대가 연결된다. 페스티벌 때문에 철원을 찾은 사람들은 고석정과 주상절리의 풍경을 즐긴다. 행사장 주변의 맛집과도 자연스럽게 연을 맺게 된다. 페스티벌을 하루 앞두고 펼쳐진 전야제는 9월 중순에 열리는 타 페스티벌 '더 그레이트풀 캠프'와 협업해 꾸려지기도 했다.

토요일 새벽을 장식한 프로듀서 250 역시 연결의 달인이었다. 그의 디제잉은 본 조비의 'It's My Life'와 송대관의 '네박자'를 경유해 '뽕'으로 귀결되었다. 광란의 춤판이 펼쳐진 가운데, 엔딩곡으로 선택된 것은 코리아나의 '손에 손잡고'였다.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옆 사람과 손을 잡았다. 이곳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디서 모르는 이의 손을 선뜻 잡을 수 있을까? 혐오와 냉소, 타자화가 고개를 드는 시대에, 이 풍경은 유독 큰 값어치로 다가온다.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서로 서로 사랑하는 한마음 되자 손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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