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 단 20점...800년 전 고려 빛 담은 '나전국화상자' 일본에서 환수
오색찬란한 자개로 새긴 국화 770송이, 구슬을 꿰맨 듯 작은 원을 연결한 연주(連珠) 무늬 1670개, 뚜껑 테두리를 감싸며 피어난 모란…
800년 세월을 거슬러 만난 나전 상자는 고려의 빛을 한껏 뿜어냈다. 6일 서울 종로구 고궁박물관에서 열린 고려 나전 상자 환수 기념 기자간담회에서다. 이날 최응천 문화재청장은 "문화재청장이 아닌 학자로서 눈을 의심할 정도로 완벽한 상태로 남아있었다는 말씀을 드린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고려의 공예 기술이 집약된 귀한 나전 상자가 일본에서 고국으로 돌아왔다. 고려 나전칠기는 국내에 단 3점 남아 있고, 세계적으로도 20점 미만이어서 매우 희소한 가치를 지닌다.
나전칠기는 옻칠한 가구 표면에 전복·조개·소라 등 패류(貝類) 껍데기를 다듬어 장식한 공예품을 말한다. 나전칠기는 고려청자, 불화와 함께 고려 미술의 정수로 꼽힌다. 12세기 송나라 사신 서긍은 '고려도경'에 '고려의 나전 솜씨가 세밀해 가히 귀하다'고 기록했다. '고려사'에도 11세기에 고려 조정이 송·요 등 외국에 보내는 선물에 나전칠기가 있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유물은 13세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뚜껑, 본체, 속 상자로 이뤄진 가로 33cm, 세로 18.5cm, 높이 19.4cm 직사각형 상자다. 고려 나전칠기의 대표적인 문양인 국화 넝쿨무늬, 모란 넝쿨무늬 등이 촘촘히 새겨져 있다. 뚜껑과 몸체는 약 770개의 국화 넝쿨무늬 자개로 감쌌다. 뚜껑 윗면 테두리의 좁은 면에는 약 30개의 모란 넝쿨무늬를 장식해 화려함을 더했다. 국화꽃 무늬를 감싼 넝쿨줄기는 C자형 금속 선으로 표현됐다. 국화꽃 무늬는 중심 원이 약 1.7mm이다. 꽃잎 하나 크기는 약 2.5mm에 불과하다. 꽃잎 하나하나에 음각으로 선을 새겨 세부를 정교하게 묘사했다. 최 청장은 "고려 나전칠기의 전성기인 13세기의 전형적인 기법이 총동원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상자에 사용된 자개는 약 4만5000개다. 유물이 어떤 물건을 담는 용도로 쓰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박영규 용인대 명예교수(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원)는 "일반적으로 고려 나전은 경전함·염주 상자·향합 등 불교 관련 용품으로 쓰였다"고 설명했다.
이번 환수 조치로 한국은 고려 나전칠기 유물을 4점 보유하게 됐다. 기존의 유물 3점(나전모란넝쿨무늬경전함·나전국화넝쿨무늬불자·나전대모국화넝쿨무늬화장합)은 모두 중앙박물관에 있다.
이날 공개된 유물은 문화재청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일본의 개인 소장자에게 사들인 것이다. 일본의 한 개인 소장가가 오랜 시간 창고에 보관해 온 상자를 3년 전 한 고미술 관계자가 사들이며 존재가 드러났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지난해 7월 일본 현지 네트워크를 이용해 소식을 입수했고 이후 1년간의 줄다리기 협상 끝에 지난 7월 환수에 성공했다. 유물 매입에는 복권 기금이 쓰였다.
문화재청과 재단은 유물을 매입하기 전 국내에 들여와 지난 5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X선 촬영 등 유물 조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목재에 직물을 입히고 칠을 하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칠기 제작기법이 쓰인 점을 확인했다. 본 매입 전 대여 계약을 맺고 유물을 국내로 반입한 뒤 제작 기법과 보존 상태를 확인하고 매매 계약을 체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최 청장은 "유물이 얼마나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매입 전 대여 계약을 맺었다"고 설명했다.
유물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관·관리하며 정밀 조사를 거칠 예정이다.
홍지유 기자 hong.ji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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