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유토피아는 마침내 실현되었는가

김규종 2023. 9. 6.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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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콘크리트 유토피아> 에 나타난 인간과 사회

[김규종 기자]

유토피아는 영국의 정치가 토머스 모어(1477-1535)가 <유토피아>(1516)에서 그려낸 이상향(理想鄕)을 가리킨다. 유토피아는 그리스어 'ou'(없는)와 'topos'(장소)를 결합한 것이다. 그러므로 유토피아는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유토피아는 상상에서나 가능한 이상적인 정치 체제나 사회를 가리킨다.

콘크리트의 사전적인 의미는 '현실의', '구체적인',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따위를 가리킨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이 가운데 세 번째 정의에 가까우므로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유토피아'를 뜻한다. 한국인 대부분은 '콘크리트'라는 단어에서 '아파트'를 떠올리지 않을까.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아파트 유토피아'와 같은 말로 볼 수 있는 이유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설정은 단순하다.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인 대규모 지진으로 서울에 있는 모든 아파트가 붕괴한다. 딱 하나의 예외가 있으니 그것이 '황궁 아파트'다. 지진의 와중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황궁 아파트로 몰려든다. 기존의 아파트 주민들과 죽음을 피해 살고자 아파트에 들어온 사람들의 관계가 어떻게 될 것인지, 그것이 문제다.

황궁 아파트 주민 수칙

피터 잭슨의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악의 제국 '모르도르'의 불길하고 음산한 저녁놀을 연상시키는 잿빛 하늘에 붉은 태양이 서서히 저물어간다. 사람들의 입에서는 허연 입김이 나온다. 대재앙의 소용돌이 속에서 용케 살아남은 황궁 아파트 주민들이 모인다. 아파트 부녀회장 주도로 아파트 거주민들의 전원회의가 열리는 것이다.

점점 추워지는 날씨에 살아남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려는 것이 회의의 목표다. 부녀회장은 강렬한 희생정신과 놀라운 추진력을 가진 영탁을 황궁 아파트 대표로 만들고자 한다. 만장일치로 대표가 된 영탁은 회의 참가자들과 함께 <황궁 아파트 주민 수칙> 3개 항목을 만든다. '아파트는 주민의 것, 주민만이 살 수 있다'라는 제1항이 가장 강력하다.

기여도에 따른 차등 배급이나, 민주적 합의 따위를 언급하는 항목은 제1항에 비해 별 효력이 없다. 기여도는 수치나 무게로 계량화(計量化)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민주적 합의라는 추상적인 개념은 비상 상황에서는 언제든 공염불이 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이런 잣대가 어떻게 적용되는지 살펴보는 일도 흥미롭다.

노력한 만큼 가져간다는 차등 배급은 민주적인 합의에 모순된다. 거칠고 위험하며 더러운 노동을 담당한 사람들과 상대적으로 편하고 안전하며 청결한 노동 담당자들이 선명하게 양분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강자에게 빌붙어 목숨을 지키려고 애처로이 구걸(求乞)하는 약자의 모습 또한 민주적인 합의와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아파트는 주민의 것

나와 너, 우리와 그들을 구별하고 나누는 이분법은 단순하지만 강력하다. 그래서 황궁 아파트에 살지 않는 사람을 아파트 밖으로 내모는 일은 어렵지 않다. 외부인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상황과 마주하고 있느냐, 혹은 황궁 아파트 거주민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 하는 문제는 고려할 대상이 아니다. 주민 수칙 제1항이 모든 것을 우선한다.

여기서 신혼부부 성진과 명화의 관점이 갈라진다. 황궁 아파트 주민들의 생존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생각과 그렇게 명쾌하고 냉정하게 선을 그을 수는 없는 것 아니냐 하는 견해가 충돌한다. 내부자(우리)들과 외부인들 (우리 아닌 다른 사람들) 사이의 충돌은 피할 수 없다. 내부자를 결정하는 마지막 기준이 무엇인지, 영화는 묻는다.

황궁 아파트 주민이나 영화 관객이나 맨 처음 떠올리는 내부자의 기준은 가족일 것이다. 나와 아내 혹은 나와 남편 그리고 자식! 이것이 오늘날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최고-최상의 가족 범주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웃은 함께 설 자리조차 없다.

한 몸처럼 활동하는 영탁과 부녀회장은 명화와 성진보다 우리라는 개념을 훨씬 명쾌하게 구체화한다. 하지만 부녀회장의 아들 문제로 두 사람이 다투면서 '우리'가 균열한다. 이런 균열은 영탁 개인의 문제로 더욱 심화한다. 우리는 나와 아내, 나와 자식으로 좁혀진다. 이 대목에서 영화는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현수막을 영리하게 활용한다.

계급이 전도된 사회(?)

루벤 외스틀룬드의 칸영화제 대상작 <슬픔의 삼각형>(2022)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크루즈를 타고 가다가 높은 파도에 난파한다.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고 8명만 살아남는다. 그런데 무인도의 최고 지배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최하위에 있던 유색인 여성 청소부 에비게일이다. 그녀는 계급의 전복과 여성우월주의를 내세워 최고 권력자가 된다.

각본을 공동 집필한 엄태화 감독은 이것에 마음이 끌린 듯하다. 부녀회장이 가볍게 던진 말이 정곡을 찌른다. "이제 세상이 엎어진 거죠!" 하층민들이 거주하는 황궁 아파트 주민들을 향한 주변의 고급 아파트 주민들의 냉대와 차별은 유별난 것이었다. 그래선지 하루아침에 역전된 사회관계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의 복수심리가 하늘을 찌른다.

하지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기 마련이고, 하층민이 있으면 최하층민도 당연히 존재한다. 그래서 영화는 앞으로 나아가는 동력을 얻는다.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컴퓨터 그래픽에 의지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영화는 일상적인 평면 공간만큼 수직적 공간도 자주 보여준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피라미드 구조를 연상시킨다.

관객들이 가장 몰입하는 인물 영탁도 피라미드 구조에 속하며, 육교 하나 건너 아파트에 입주하는 데 23년이 걸렸다고 말하는 남자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평생 꿈꾸었던 황궁 아파트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반드시 지켜내야 할 천국이자 유토피아이기 때문이다. 감독은 '여러분의 공간인 아파트와 여러분의 관계를 이참에 생각해보라'고 권하는 듯하다.

완장과 권력

1966년 시작된 중국의 문화혁명은 최소 170만, 최대 200만에 이르는 사망자를 낳는다. 문화혁명의 정수로 호명된 홍위병은 대학생과 중고교생들로 이뤄졌는데, 어깨에 붉은색 완장을 차고 다녔다. 그들은 모택동을 찬양하면서 거리 시위를 벌이고, 부르주아 지식인들과 자본주의 추종 정치인들을 색출하고 처단했다. 완장은 힘이 세다.

나이가 많든 적든, 지식인이든 아니든, 여자든 남자든 완장을 차면 누구나 목소리가 커지고 시퍼런 눈에는 날이 선 섬광이 인다. 완장은 마침내 권력이 된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완장을 구현하는 영탁과 부녀회장 사이에서 사람들은 각자 생존을 도모한다. 계급이 사라진 세계에 또 다른 계급이 생겨나 새로운 계급사회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완장은 있었고, 지금도 완장은 있으며, 아마도 완장은 언제나 있을 것이다. 인간이 농업혁명으로 계급사회를 이루고, 국가를 건설한 이후 완장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자리한다. 안정된 사회와 국가에서 완장의 핵은 문자와 역사를 아는 지식인이었고, 사회주의 10월 혁명 이후 새롭게 창출된 권력 '노멘클라투라'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21세기 20년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에게 아파트는 무엇이며, 어째서 우리는 아파트에 열광하고 절망하며 시름에 잠기는지,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묻는다. 모든 것이 붕괴(崩壞)되어 사라지는 마지막 날까지 완장과 아파트, 그것에 기초한 '아파트 유토피아' 혹은 '아파트 공화국'은 살아남을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을 하게 만드는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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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저의 블로그에도 게재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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