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행복들로 버틸 수 있어" '카모메 식당' 감독의 위로
[조영준 기자]
▲ 영화 <강변의 무코리타> 스틸컷 |
ⓒ (주)디스테이션 |
*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사소한 행복들을 자잘하게 찾아가다보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어."
어느 해변 마을에 과거를 알 수 없는 청년 야마다 다케시(마츠야마 켄이치 분)가 도착한다. 오징어 통조림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 그는 공장 사장의 소개로 50년이나 된 아파트 무코리타 하이츠에도 입주하게 된다. 이곳에서 일상을 되찾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는 찰나, 오래되고 조용한 줄만 알았던 이 공동주택에 대한 기대감이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이웃집 남자 고조(무로 츠요시 분)가 난데없이 집안으로 쳐들어오면서다. 자신의 집에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는다며 첫날부터 욕실을 빌려 쓰겠다는 옆집 남자로 인해 야마다의 계획은 첫 시작부터 조금 어긋나는 듯하다.
그러던 어느 날, 야마다는 시청 사회 복지과의 공무원으로부터 오래전 인연을 끊고 살았던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전달받게 된다. 그로부터 전해진 편지에는 아버지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발견되었을 때는 이미 사망한 지 오래되어 심한 악취로 인한 이웃의 신고가 있었다는 사실도 함께였다. 마지막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고 세상을 떠났다는 아버지의 소식과 함께 야마다는 자신이 삼키고 있던 불편한 감정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곳, 무코리타 하이츠의 주민들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누군가를 애도하고 기리며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영화 <강변의 무코리타>는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영화 <카모메 식당>의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이 죽음이라는 소재를 중심으로 완성해 낸 또 하나의 따뜻한 이야기다. 각자의 사정을 가진 이들이 서로의 방식을 공유하며 따뜻한 음식을 나눠 먹으며 각자의 상처를 회복해 나가는 감독의 인장과도 같은 전체의 큰 틀은 이번 작품에서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일상의 요소들을 한데 잘 끌어모아 요란하거나 유난스럽지 않게 잘 쌓아왔던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 지난 작품들과 유사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이번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역시, 살아있는 이들의 이야기로부터 죽음의 자리까지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생자(生者)와 망자(亡者)를 잇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사랑과 죽음의 자리가 다를지언정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02.
이 영화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역시 공간의 해체다.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은 전작의 여러 작품을 통해 이미 타인에게 열려있는 공간의 의미를 보여준 바 있다. 이번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야마다가 입주한 방을 포함해 극의 기본 무대가 되는 무코리타 하이츠의 모든 공간은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거의 지켜지지 않는 곳으로 설정되어 있다. 옆방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소리도 전부 들리고, 창문 너머로 방안의 내부도 훤히 들여다 보인다. 여름이라는 시간적 배경도 한몫을 거든다. 에어컨조차 기본으로 달려있지 않은 탓에 뜨거운 여름의 날들을 잘 보내려면 항상 문을 열어두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방식을 통한 공간과 프라이버시의 적절한 붕괴는 자연스럽게 타인과의 소통과 관계 형성이 가능하도록 만든다. 아버지의 부고 소식 이후 방안에 널브러져 있던 야마다에게 고조씨가 관리하는 텃밭에서 수확한 오이와 토마토가 전해질 수 있는 이유다. [아들과 함께 가정 방문을 하며 묘석을 판매하는 미조구치(요시오카 히데타카 분)씨가 아들과 함께 몰래 먹으려던 스키야키를 다른 주민들에게 빼앗기게 되는 것처럼 의도하지 않은 부정적인 상황도 물론 때때로 일어난다.] 이번 작품에서 해체되지 못한 공간에서 생활을 이어간 인물은 야마다의 아버지가 유일한데 그 끝은 고독사라는 외롭고 쓸쓸한 결과로 이어진다.
▲ 영화 <강변의 무코리타> 스틸컷 |
ⓒ (주)디스테이션 |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듣고 야마다는 분노에 휩싸이는 모습이지만 고조의 친구가 스님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걱정부터 하는 것을 보면 아버지의 유골을 자신이 가져올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4살 때 부모가 이혼한 뒤로 혼자 자랐기 때문에 생각도 나지 않고, 유골함이나 무덤이니 해서 돈도 많이 들 테니 인수를 하지 않겠다고 말한다(아직 공장에서 첫 월급을 받기 전의 그는 몇 푼도 되지 않는 동전으로 마트에 들어갔다가 그냥 돌아 나와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럴 의무도 없다면서 말이다.
실제로 사회복지과의 한 창고에는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울 만큼 무연고자의 유골들이 가득 쌓여있다. 노숙자의 경우에는 이름을 모르는 경우도 많다고 하는데, 직원에 따르면 1년이 지나도록 찾는 사람이 없을 경우 그냥 공동묘지에 임의로 모시게 된다고 한다. 야마다의 아버지 역시 어쩌면 그런 처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홀로 죽음에 이르게 되는 고독사에 이어, 그 후에도 아무도 찾지 않는 무연고자의 신세로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과 함께 또 한 번 다시 외롭게 말이다. 그렇게 아버지를 영영 잃어버리게 될 아들과 죽어서도 혼자일 뻔한 아버지 모두를 구하는 것이 바로 옆집 남자 고조다. 아버지의 유골함을 포기하겠다는 야마다에게 '없었던 사람으로 만들면 안 된다'는 따끔한 충고를 한다.
그 이후의 일이야 어찌 되든 간에 일단 사회복지과를 찾아 담당자를 만나고 아버지의 마지막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것 모두가 삶에 갑작스럽게 뛰어들어온 이웃에 의해서라는 설정은 적어도 이 영화에서는 큰 의미를 가진다. 만약 야마다가 이곳 무코리타 하이츠에 머물게 되지 않았다면, 이 공동주택의 공간이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넘나들 수 있는 형태의 구조가 아니었다면, 옆집에 살던 남자가 지금의 고조가 아니라 자신의 영역 밖으로 결코 넘어오지 않는 쪽의 인물이었다면 높은 확률도 야마다 역시 자신의 아버지처럼 홀로 마지막을 맞이하게 되지 않았을까.
04.
홀로 죽음을 맞이했다는 아버지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를 해야겠다. 영화는 야마다와 그의 아버지 사이에 복잡한 사연을 굳이 집어넣지 않는다. 다분히 의도적이다. 이야기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에서 이탈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 최소한의 개연성을 드러내는 것은 필요하다. 그의 유골 인수를 꺼려하던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와 자신 사이에 결코 끊어낼 수 없는 연결 고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지켜보고 있는 관객에게도 마찬가지다.
그의 아버지에 대한 정보는 그의 화장에 유일하게 배석했던 사회복지과의 직원으로부터 처음 주어진다. 세상을 떠나기 전 아버지의 마지막 얼굴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묻는 야마다에게 그는 상태가 많이 좋지 않아서 표정 같은 건 판단하기 어려웠지만 울대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말을 건넨다. 사람의 울대가 이렇게까지 깨끗하게 남는 것은 드문 일인데 이는 그 사람의 평소 행실을 보여주는 증거와도 같다면서 말이다. [이는 좌선하고 있는 부처님의 모습과 유사하다는 뜻으로 울대뼈를 일본말로 '후불(喉仏)'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유래한 의미로 보인다.]
아버지에 대한 직원의 기억은 그리 과학적이지 못하지만, 삶의 마지막 순간에 남겨진 삶에 대한 그의 태도에는 담담하면서도 정갈한 부분이 있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대화를 나눌 사람도 없는 고독사의 경우에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죽음에 놀라 고인의 시신이 문쪽으로 향해있는 경우가 대다수인데 아버지는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반대로 집안을 향하게 되는 자살의 경우와도 달랐다. 어느 쪽으로도 향하고 있지 않은 아버지의 집 안에는 그가 마지막까지 돌보던 식물도 있었고, 이제 막 씻고 나와 마시는 듯했던 우유 절반이 담긴 컵도 식탁 위에 그대로인 상태였다.
▲ 영화 <강변의 무코리타> 스틸컷 |
ⓒ (주)디스테이션 |
"장례의 방식은 다양한 게 좋죠. 결국은 남은 이들이 애도를 하는 방식이니까."
극 중 시간의 순서에 따라 야마다가 자신의 아버지를 애도할 수 있게 되는 순간부터 무코리타 하이츠의 주민 모두가 안고 있던 슬픔의 자리가 땅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이 순간까지 모두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감춰두었던 이야기는 아니지만 대화를 통해 서로에게 전해지고 홀로 체감하는 장면들이 연이어 등장하게 된다.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난 옆집 남자 고조와 5년 전 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을 지금까지 일편단심으로 그리워하는 집주인 미나미(미츠시마 히카리 분), 그리고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를 생각하며 직접 뼈를 갈아냈다는 택시 아저씨까지. 모두는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자리에 놓인 슬픔을 삼켜낸다. 때때로 그 과정은 너무도 특이한 나머지 세상의 이해를 받을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 또한 각자의 애도 방식일 뿐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랜 슬픔 속에 눅눅히 절인 상태로 망가져 있어야 할 것만 같은 삶이지만 서로를 딛고 의지하며 나아가는 인생은 생각보다 그리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이제 아버지의 부재를 인정하고 상실의 시간을 받아들이게 될 야마다의 시간 역시 마찬가지다. 제때 월세를 잘 냈다며 작은 캐러멜을 하나 손에 쥐어주는 집주인과 자신 대신 아버지의 유골함을 향해 합장을 해주는 고조. 이제 막 취사가 끝난 밥솥의 꼬수운 단내와 계절이 되면 무르익는 뒤뜰의 새파란 열매들까지. 이웃이라는 단어의 번거로움과 살을 부대끼는 동안 일어나는 다소 귀찮은 시간은 어느새 사소한 따뜻함이 되어 튼튼한 버팀목이 된다.
06.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는 사랑을 나누고 애도의 뜻을 표하는 산 자들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극 중 인물들이 나란히 서서 강변의 둑을 걷는 동안 사랑을 하는 마음과 애도하는 마음의 자리에 대해 생각한다. 사랑에 각자의 방식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일은 사랑을 처음 경험하고도 한참이나 지난 후에나 가능하다. 유난스럽지 않은 태도로 상대의 방식을 받아들이고 함께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은 훨씬 더 이후에나 가능하다.
누군가를 애도하는 일 역시 마찬가지다. 여기에도 자신만의 방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는 모두 배우게 된다. 사랑에 비해서는 조금 더 빠르다. 대개는 그 삶에서 소중했던 존재와 처음 이별하는 순간에 그 형태는 모습을 갖춘다. 반드시 타인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자신의 죽음 이후에는 깨달을 필요가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랑에 은밀한 구석이 있다고 하나, 애도의 형태만큼은 아니다. 들숨과 날숨 사이에서 맴돌다 숨이 막히도록 가끔 부풀어 오른다. 살아 숨 쉬는 동안에 몇 번이나 그럴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때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다시 숨을 고른다.
이 영화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각자의 사랑과 애도의 방식이 그려지고 있는 부분이 마음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 강변의 둑을 걸으며 야마다 아버지를 기리는 동안에 모두가 다른 표정으로 저마다의 악기를 연주했던 데에는 분명 그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랑을 하는 방법과 애도를 하는 방식은 너무도 다르지만, 역시 가까운 구석이 있다. 그리고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은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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