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이름, 과거, 가족관계... 모두 거짓이었다

김성호 2023. 9. 6.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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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씨네만세 534] <한 남자>

[김성호 기자]

삶이 짐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그 무게가 버거워서 그만 콱 내려놓고 소리소리 지르며 떼를 쓰고 싶어질 때가 있다. 짊어진 짐 가운데 내가 집어올린 것이 얼마 되지 않는단 걸 깨달으면 그런 마음은 더욱 커질밖에 없다. 택한 적도 없는 짐이 어깨를 짓누르는 고통 속에서 삶의 불공평함을 깨닫는 나날이란 얼마나 괴로운가.

괴로워하는 이에게 특별한 기회가 다가온다고 상상해보자. 어느 누가 다가와서 너의 인생과 다른 누구의 인생을 바꾸어 주겠다고, 이제는 다른 누구가 되어 새로운 삶을 살라고 제안을 한다.

살아온 삶으로부터, 내가 택하지 않은 고통으로부터 구속받지 않고서, 온전히 새로운 삶을 살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를 선택할 만한 이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 한 남자 포스터
ⓒ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올해 일본 아카데미를 휩쓴 단 한 편의 영화

올해 있었던 제46회 일본 아카데미시상식의 주인공은 이시카와 케이의 <한 남자>였다. 작품상과 감독상, 각본상, 남우주연상 등 주요 부문을 싹쓸이한 이 영화는 제 삶을 남의 것과 바꾼 이들의 이야기다. 살아온 길이 괴로워서 살아갈 길을 걸을 자신이 없는 이들, 그들이 기꺼이 다른 이와 삶을 바꾸기로 한다. 누군가가 버린 삶이 다른 누구에게 구원일 수 있다는 역설이 이 영화가 주목하는 지점이다.

영화는 사라진 사내의 행방을 쫓는 변호사 키도(츠마부키 사토시 분)의 뒤를 따른다. 일본의 작은 마을에서 벌목꾼으로 일하던 남자가 사고로 사망한 뒤 그의 아내로부터 받은 의뢰가 이 추적의 시작이 된다. 아내는 남편의 장례 자리에서야 제가 알고 있던 남편이 실제 그가 아니란 사실을 깨닫는다. 남편이 쓰던 이름과 그가 이야기한 과거, 가족관계 따위가 모두 거짓이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남편은 도대체 누구인가. 이것이 리에(안도 사쿠라 분)가 키도에게 남편의 신원조사를 의뢰한 이유다.

키도는 리에의 남편 다이스케(쿠보타 마사타카 분)가 진짜로 누구였는지를 파헤치기 시작한다. 아내가 기억하는 정보가 죄다 가짜인 사내를 추적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완전히 불가능한 일도 아니어서 영화는 조금씩 키도가 사내의 과거에 다가서는 모습을 그려내기 시작한다.
 
▲ 한 남자 스틸컷
ⓒ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일본 영화산업 뒷받침하는 문학의 힘

영화산업이 쇠퇴기로에 들어섰다곤 하지만 파격적 설정만큼은 어디서도 빠지지 않는 일본이다. 특히 한국에 비해 탄탄한 수요층이 있는 문학은 꾸준히 수준급 작가와 작품을 배출해내고 있다.

서사를 중심축으로 한다는 공통점 때문일까. 문학과 영화는 서로 자주 어울리곤 한다. 일본에서 거듭 소설 원작 영화가 제작되는 배경이다. 이 영화 또한 그와 같아서, 아쿠타카와상 수상자 출신 히라노 게이치로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 되었다. 소설로부터 빌려온 치밀한 구성과 파격적 설정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쉬이 놓을 수 없는 긴장감을 자아낸다.

자발적 실종을 뜻하는 '죠하츠'는 일본에서 종종 사건화 되는 문제라고 전한다. 한국에선 유명한 사례가 딱히 없다지만 그들이 느끼는 감상을 이곳이라 해서 갖지 못할 이유가 없다. 역시 일본 소설이 원작인 영화 <화차>가 지난 10여 년 전에 제작된 데도 이러한 이유가 자리한다. 스스로 삶을 지우는 죠하츠의 무력감, 또 실패감은 어느덧 한국사회에도 싹을 틔우고 있는지 모르겠다.
 
▲ 한 남자 스틸컷
ⓒ 트윈플러스파트너스㈜
 
한 인간 안에 깃든 여러 얼굴에 대하여

영화 홍보를 위해 방한한 배우 츠마부키 사토시는 한 인간을 이루는 여러 면모에 집중해 연기를 했다고 말했다. 한 인간 안에 있는 여러 얼굴 가운데서 진짜 그 사람이라 여겨지는 정체성은 과연 얼마나 되는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어떤 얼굴은 무시되고, 어떤 얼굴은 존중받으며, 또 어떤 얼굴은 선택적으로 등장했다가는 필요를 다하면 사멸하는 순간이 얼마나 많은가.

작가 히가노 게이치로는 타인과 맺는 관계마다 자아가 존재하고, 이 자아의 총합이 모여서 하나의 인격을 이룬다는 분인주의를 나름의 사상처럼 이야기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다른 누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인간이 다른 인간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막막함에 도달하게 되는 영화, 그러나 그 막막함을 넘어선 이해도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되는 영화, 그게 <한 남자>가 아닌가 싶다. 이 영화가 일본에서 그토록 큰 관심을 받았다는 건, 일상을 사는 이들이 타인의 더욱 큰 이해를 갈구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이 영화가 오늘의 한국에서 어떻게 소비될지가 궁금하다.
 
▲ 한 남자 스틸컷
ⓒ 트윈플러스파트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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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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