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구구 원료조달·판로 불투명..플라스틱 재활용, 하고 싶어도 못한다
“재생 소재를 사용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할 시장이 올 거라는 건 알아요. 알긴 아는데 당장은 되는 게 없어요. 이게 맞는 건가 엄청난 고민을 하면서 가고 있습니다.” -폐플라스틱 재활용 사업을 추진 중인 한 석유화학기업 관계자 A씨.
LG화학, 롯데케미칼, SK지오센트릭 등 국내 석유화학업체들이 탈탄소 규제 대응 방안 중 하나로 폐플라스틱 재활용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관련 설비를 짓는 데만 수천억원이 들어간다. 그런데 재생 소재를 만들어도 사겠다는 곳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해외에는 있는데 국내엔 수요가 극히 적다.
일부 국내 엔드 유저(최종 사용자)가 사겠다고는 하지만 그 규모는 소량이다. 석유화학업계에서 엔드 유저는 식품업체, 화장품업체, 전자업체, 자동차업체 등 제품 또는 식품을 포장해 최종적으로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전방산업 기업을 말한다. 한 국내 소비재 기업 관계자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를 잘해야 투자자들에게 인정받으니 재생 소재 사용에 동참하긴 하는데 가격이 비싸서 최소한만 사용한다”고 말했다. 재생 소재로 플라스틱을 만들면 기존 납사(화학제품 원재료)로 만든 제품보다 가격이 30% 올라간다.
같은 국내 기업이라도 유럽 시장에선 사정이 달라진다. 예컨대 CJ제일제당은 식품 포장 용기에 쓸 폐플라스틱을 찾느라 바쁘다. 앞으로 유럽에서 즉석밥 ‘햇반’이나 ‘비비고’를 판매하려면 무조건 용기와 포장지를 재생원료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유럽은 플라스틱 제조업체뿐만 아니라 엔드 유저인 기업에 재생 원료 사용에 대한 강제성을 부여했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지난해 11월 공개한 ‘포장 및 포장재 폐기물 규정’ 개정안을 보면 2030년부터 EU 내에서 유통되는 모든 플라스틱 용기에 재생원료를 30% 이상 의무적으로 사용해야 하고, 플라스틱 포장의 라벨에는 재활용 플라스틱 원료 사용 내역을 명시해야 한다. 말하자면 가격에 상관없이 재생 소재를 무조건 사용해야 한다는 얘기다. 내년 11월엔 법적 구속력 있는 UN 플라스틱 국제협약도 만들어질 예정이다.
코카콜라, 로레알, 아디다스 등 글로벌 기업들은 자체 재생원료 사용 목표를 선언했으며 재생소재 확보를 위해 자국 업체에 이어 국내 석유화학업체들에도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한 석유화학업체 관계자는 “폐플라스틱 재활용 공장을 짓기도 전에 글로벌 업체들에서 문의가 빗발치고 있다”며 “이들 업체와 선판매 계약을 여러 건 체결했다”고 말했다.
반면 한국은 재생 원료 사용 의무가 플라스틱 소재를 구입하는 최종 사용자엔 아직 없고 플라스틱 생산자에만 있다. 연 1만t 이상 페트(PET) 원료를 생산하는 업체는 올해부터 의무적으로 재활용 원료를 3% 이상 사용해야 하고, 2030년부터는 이를 30%까지 끌어올려야 한다. 국내 석유화학업체들이 시장이 생기기도 전에 폐플라스틱 재활용 사업을 시작한 이유다. 최종 사용자는 포장지나 용기에 재생 원료 사용 비율을 표시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 재생 원료 투입과 산출 비율을 검증할 방법도 없다.
석유화학업계가 탄소중립을 위해 사업 구조를 순환경제 체제로 아무리 바꾸려고 해도 소비처가 없으면 그 노력은 무용지물이 된다. 탄소중립 관련과 관련한 세계 규제 당국의 개입이 늘어나는 만큼 순환경제를 위한 재활용 시스템이나 제반 인프라에 대한 정책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 석유화학업계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폐플라스틱의 안정적인 확보도 문제다. 국내에서 발생하는 폐플라스틱은 대부분 발전소 등에서 고형연료(Solid Refuse Fuel·SRF)로 쓰인다. 에너지회수용으로 쓰이고 있는 폐플라스틱을 ‘재활용할테니 달라’고 하기도 쉽지 않다. 한 석유화학업체 관계자는 “재활용 사업을 펼칠 수 있는 여건이나 구조가 마련돼 있지 않아 폐플라스틱을 대량으로 가져올 수도 없는 실정”이라며 “현재는 영세한 폐플라스틱 수거·선별 업체들에 기대고 있다”고 했다. 미래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기업들이 섣불리 대량 생산에 나서기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한 석유화학업체 대표이사는 “폐플라스틱 재활용 사업을 시작할까 해서 (재활용 소재 제품을 살 의향이 있는지) 고객사에 물어봤더니 60%는 비싸서 살 생각 없다고 하고 40%는 잘 모르겠다고 하더라”며 “‘퍼스트 무버’보다 ‘패스트 팔로어’가 되는 게 낫겠다 싶어 투자 타이밍만 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이 사업을 포기할 수도 없다. 석유화학업계 관계자는 “대기업은 내수용뿐만 아니라 수출까지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세계적 추세인 폐배터리 재활용 사업을 안 할 수도 없다”고 토로했다. 또 다른 석유화학업체 관계자는 “유럽, 일본, 대만처럼 폐플라스틱 재활용 인프라를 잘 갖춘 곳은 자국 내에서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많다. 현지 기업이 더 저렴하고 더 품질 좋은 재생 소재를 생산한다면 굳이 우리나라 재생 소재를 쓸 이유가 없다”며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인프라를 조성해 국내 폐플라스틱 재활용 시장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고 했다.
최서윤 기자 sychoi@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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