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나의 사랑스러운 털뭉치
나의 사랑스러운 털뭉치
출근하기 직전에 고양이를 앉혀놓고 타이르는 습관이 있다. “오늘은 꼭 빨래 개줄 거지?” “너도 세 살이면 청소기 정도는 돌릴 줄 알지?” 반려묘 맷돌이는 묵묵부답이다. 대답은커녕 듣기 싫을 땐 나를 할퀴기도 한다. 퇴근 후 돌아와보면 집은 100% 난장판이다. 특히 거슬리는 건 바닥에 자각자각 밟히는 고양이용 화장실 모래다. 나는 매일 한쪽 발을 반대쪽 다리에 비벼 모래를 털며 걸어 다닌다. 심지어 이 모래는 나름 최고급이라 비싸기까지 하다.
이 앙칼진 털 뭉치 때문에 불행하냐면 그렇지 않다. 모래는 모래고 돈은 돈이며 사랑은 사랑이다. 내게는 고양이로 인한 불편과 사랑이 상쇄의 문제는 아니다. 불편보다 사랑이 크기에 괜찮은 게 아니라, 불편과 사랑 사이에 연관성이 없다는 말이다. 고양이가 특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렇게 순수한 애정을 사람에겐 품을 수 없다. 가족이든 친구든 연인이든…. 사람을 상대하다 보면 끊임없이 감정의 플러스 마이너스 신호들이 밀려온다. 점수를 매기는 것까진 아니어도 무의식 어딘가에 켜켜이 쌓인 불유쾌들이 결국 상대와의 거리감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맷돌이는 무슨 짓을 해도 마이너스가 되지 않는다. 상전 아닌 상전을 부양하느라 통장이 거덜나도 그조차 손해라는 생각은 들지 않으니 신기할 따름이다.
나는 맷돌이에게 사람 말을 가르치는 데 실패했지만(빨래니 청소기니 하는 헛소리는 물론 “하지 마!”라는 세 글자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맷돌이가 내게 가르쳐준 것은 정말 많다. 가장 귀중한 건 ‘충만하다’는 느낌이다. 밖에서 바쁠 땐 돌아갈 집이 있어 벅차고, 집 안에서 함께 쉴 땐 둘이라서 편안하다. 맷돌이와 살게 된 후로 쓸쓸함이랄지 고독함이랄지 하는 감정을 잘 모르는 사람이 됐다. 산다는 건 언제나 무거운 일이지만 외롭지 않아도 많은 것이 가벼워진다. 그런 가벼움은 다시 세상으로 나아갈 용기가 된다.
어릴 땐 고독감을 오해하기도 했다. 홀로 도무지 어찌할 길 없는 쓸쓸함을 사람으로만 없앨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평생을 맹세한 우정은 민망할 정도로 쉽게 흩어졌고, 어제의 연인이 오늘 당장 남남이 되는 일 또한 빈번했다. 오히려 인간관계처럼 얄팍하고 불안한 게 없다. 나는 온갖 미디어를 통해 세뇌된 로맨스적 환상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더더욱 사랑은 TV나 영화에서 봤던 것처럼 깨끗하지 않았다. 물론 반려동물과 인간을 무작정 대치시킬 수도 없다는 것쯤은 안다. 하지만 사람과 살 것이냐 동물과 살 것이냐, 둘 중 하나의 선택지만 있다면 나는 언제나 후자를 고를 것 같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맷돌이는 내 가까이 있다. 정확히 그 애의 궁둥이가 내 얼굴 바로 옆에 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맷돌이는 내게 얼굴보다 항문을 더 자주 들이미는데, 놀랍게도 이런 행동은 고양이식 신뢰와 애정의 표현이라고 한다. 신뢰와 애정이 지나친 나머지 가끔씩 고양이 꼬리에 따귀를 맞으며 잠에서 깰 때도 있지만 행복하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문화권이 달라도 몇 가지 비언어적 소통만으로 공동생활이 가능하다.
‘미야오톡(MeowTalk)’이라는 애플리케이션이 있다. 고양이 울음소리를 분석해 외국어 번역기처럼 내용을 알려준다는 이 앱은 처음엔 재미 반 호기심 반으로 다운로드했다가 이내 유료 사용자가 됐다. 앱 개발자가 주장하는 논리나 번역 결과의 정확도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지만, 고양이 사진 옆에 말풍선을 띄우고 메시지를 제공하는 콘텐츠는 집사들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개인적으로 맷돌이가 했던 말 중 가장 마음이 아팠던 대사는 “아빠는 어디 있나요?”였다. 글쎄…? 엄밀하게 따지면 나는 양어머니이고, 맷돌이의 친모·친부가 어디에 있는지는 모른다. 아마 길에서 죽었거나 살아 있어도 맷돌이의 존재조차 잊은 상태일 거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그날은 “내가 아빠의 빈자리만큼 잘해줄게”라고 다짐하며 눈물을 조금 훔쳤다지만! 미야오톡의 진가는 집에 친구 H가 들이닥쳤을 때 드러났다. 맷돌이는 평소에도 행동이 요란하고 목소리가 낮은 H를 질색했는데, 그가 등장한 순간 미야오톡을 켜자 놀라운 대사들이 쏟아졌다. 사실 그때쯤 나는 미야오톡에 다소 흥미를 잃은 상태였다. 나랑 둘이 있을 때의 맷돌이는 “사랑에 빠졌어요!” “당신을 보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결합된 쌍입니다!” 같은 말밖에 안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H를 본 맷돌이는 거의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너무 아파!” “프라이빗한 곳으로 가자!” 눈에도 분노와 혐오가 가득했다. 결국 H는 맷돌이에 의해 거리로 쫓겨났다. 야밤에 안쓰럽긴 했지만 동거묘가 싫다니 나도 어쩔 수 없었다. 가끔씩 “고양이는 주인 못 알아본다며?”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이 일화를 말해 준다. 고양이는집안일을 안 할 뿐 사람은 기가 막히게 알아본다고, 말은 전혀 안 통해도 마음은 너무 잘 통한다고 말이다.
정지음
싫은 것들을 사랑하려고 글을 쓰는 1992년생. 25세에 ADHD 진단을 받은 이후 첫 번째 에세이 〈젊은 ADHD의 슬픔〉으로 제8회 브런치북 대상을 수상했고, 〈우리 모두 가끔은 미칠 때가 있지〉, 첫 소설 〈언러키 스타트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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