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재호 칼럼] 냉정과 열정 사이:귀납의 스캔들
영화로도 유명한 『냉정과 열정 사이』는 일본 작가 에쿠니 가오리(江國香織)와 츠지 히토나리(辻仁成)가 연인 사이의 감정을 서로 다른 시각에서 집필한 연작소설이다. 스무 살 대학에서 만나 연인이 된 두 사람이 우연한 오해로 헤어져 이탈리아 피렌체와 밀라노에서 각자 생활하다가 십년 전 여주인공의 서른 살 생일에 피렌체 두오모 성당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떠올려 재회하게 된다. 하지만 사랑의 열정과 합리적 냉정 사이에서 방황하는 두 연인의 애틋한 사랑은 결국 결실을 보지 못하고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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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짓 정보와 주장으로 오염된 정치
귀납적 증명조차 잠재적 참에 불과
정치 오류 가능성 깨닫고 겸손해야
유권자들 이성적 판단 능력 키워야
」
작가 에쿠니 가오리는 작품 후기에서 “어떤 사랑도 한 사람이 가진 분량은 절반에 불과하다”라고 적었다. 두 사람의 사랑하는 열정을 보면 반드시 맺어져야 하는 귀납적 결론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냉정함은 이를 거부하는 운명을 택한다. 한 사람의 마음속에도 열정과 냉정이 언제나 교차하기에 인생의 길은 어느 한 쪽으로만 귀결되지는 않는다. 기네스 펠트로가 주연한 ‘슬라이딩 도어즈’라는 영화에서도 한순간 지하철을 타지만 않았다면 인생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뀌게 되는 모습을 대조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렇기에 우연과 선택의 다양성 때문에 인생의 모습은 다채롭기 그지없고 수많은 소설이나 영화가 이를 감동적으로 묘사하게 된다.
인생에서 정답은 없다. 하지만 과학에서는 정답이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과학에서는 기존에 존재하는 많은 경험치를 바탕으로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통해 객관적 증거들을 분석하여 그 가설이 증명되면 이를 진실로 받아들이는 귀납적 방법을 택한다. 귀납적 방법으로 증명되면 정답으로 여긴다. 하지만 이것에도 한계는 있다. 흰 백조만 보다가 우연히 검은 백조가 나타나면 이 진실은 바뀌게 된다. 이처럼 귀납적 논리로 증명된 진실도 틀릴 가능성을 언제나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과학철학자 카를 포퍼(Karl Popper)는 ‘오류가능성(falsifiability)’이 존재해야만 과학이라고 했다. 과학은 새로운 발견이나 증명이 나타날 때까지만 잠정적 참이 된다. 언제나 변함없이 진실인 것은 믿음이고 종교의 영역에 속한다.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도 “우리는 이성이 완벽하지 않다는 전제하에서 이성을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이처럼 과학에서조차 틀릴 수 있는 가능성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데, 정치에서는 마치 자신의 주장이 진실인 것처럼 교만한 주장만을 내세운다. 종종 과학적 논쟁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개인 방송이나 SNS는 거짓 정보에 기인한 주장들을 확대재생산하고 정치가들은 이를 이용하여 우리를 맹목적 추종으로 이끈다. 우리 정치만의 문제는 아니다. 트럼프, 시진핑, 푸틴 등 전 세계의 정치지도자들도 자신의 이익과 이념을 위해 여론을 호도하고 냉정한 판단을 흐리게 한다.
최근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사태도 과학적 판단보다는 정치적 논리가 지배하고 있다. 과학자들도 둘로 갈라져서 객관적 사실을 다르게 해석한다. 과학적 근거에 기초한 확률적 판단보다는 정치적 신념을 우선한다. 하지만 이런 판단은 해석의 영역이지 진실의 영역은 아니다. 흄은 귀납의 스캔들을 이야기하며, 틀릴 수 있는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있지만 맞을 수 있는 확률이 더 높으면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이성적 판단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유권자들은 이성적 냉정함을 갖고 판단해야지 정치권의 감성적 열정의 부추김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포퍼는 그의 책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우리는 짐승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으로 남고자 한다면 오직 하나의 길 열린 사회의 길이 있을 뿐이다”라고 주장했다. 전체주의를 넘어 자신도 틀릴 수 있다는 열린 사회를 이해할 때 정치 선진화는 가능해진다. 심리학자 조던 피터슨(Jordan B. Peterson)은 최근 저서 『질서 너머』에서 이렇게 조언한다. “복잡한 일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서는 권력에 굶주려 이기적으로 현 상태를 옹호하는 사람과 진정한 보수주의자를 구별하고, 철학도 없이 자기기만에 빠져 무책임하게 반란을 꾀하는 사람과 진실로 창의적인 사람을 구별할 줄 아는 냉정한 눈이 필요하다.”
완벽한 증거를 가진 것 같은 귀납적 주장도 한계는 있다. 상대가 있는 사랑의 경우에도 한 사람은 절반의 분량만 갖고 있는데, 정치권은 자신이 전부를 갖고 있고 언제나 진리의 편인 것처럼 행동한다. 이제 여야 정치지도자는 겸손해야 한다. 자신들이 믿는 귀납적 진리의 오류가능성을 받아들여 상호 소통과 화합의 장으로 나가야 한다. 유권자들도 정치권의 일방적 주장에 동조하기보다는 객관적 설명력이 높은 주장을 잠정적 참으로 선택할 수 있는 안목을 갖추어야 한다. 과학의 냉정함과 정치의 열정 사이에서 보다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길거리마다 흩날리는 정치 현수막처럼 정보는 범람하고, 왜곡된 거짓 주장의 깃발이 나부끼는 혼돈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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