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미국 대선 맞춤형 ‘선제 외교’ 펼쳐야
한국의 외교정책 기조에는 최근 큰 변화가 있었다. 부정적인 국내 여론에도 한·일 관계 개선이 추진됐고, 동시에 한·미 동맹을 재확인하는 작업이 수행됐다. 이는 궁극적으로 한·미·일 공조 체제의 강화로 이어져 ‘가치 동맹’이라는 용어로 최근의 상황을 설명하는 전문가 분석까지 나오고 있다.
실제로 한국의 외교정책 노선은 과거보다 선명해졌다. 그런데 선명해진 만큼 불안이 줄었다는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한국 외교를 둘러싼 불안과 리스크가 줄지 않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역설적으로 최근 대선 경선이 시작된 미국의 정치 상황 때문이다. 최근 리처드 하스 전 미국외교협회(CFR) 회장이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말한 대로 지금 이 순간 세계 질서에 가장 심각한 위협을 주는 나라는 바로 미국이다. 그 위협의 핵심을 지적하라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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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이든·트럼프, 중산층에 올인
“미국 중산층 강화에 도움된다”
한국의 대미 투자 강조할 필요
」
네 건의 기소가 말해주는 사법 리스크에도 트럼프는 내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물론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더라도 백악관 재입성은 객관적으로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런데 혹시라도 내년에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한국과 미국 사이에 축적된 성과가 무너질 수 있다. 왜냐하면 지금의 트럼프는 조 바이든 대통령 민주당에 대한 복수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당선된다면 지난 임기 중에 전임자였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정책을 뒤집었듯이 바이든 행정부의 성과를 지우고 백지상태에서 시작할 것이 불 보듯 뻔해 보인다. 동시에 트럼프가 우크라이나 친화적인 행보를 보일 가능성이 희박하기에 가치동맹은 공허한 개념이 될 것이다. ‘워싱턴 선언’이 백지화되고 주한미군 철수 카드가 꺼내지는 상황을 맞이할 가능성이 높다.
결국 작게는 한·미 관계, 크게는 한·미·일 공조의 안정적인 정착을 위해서는 바이든 대통령의 재선이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다. 바이든은 민주당이 2016년 트럼프에게 빼앗긴 ‘러스트 벨트(Rust Belt)’, 즉 미시간·위스콘신·펜실베이니아에서 이겼다. 그뿐만 아니라 오랜 공화당 텃밭이었던 애리조나와 조지아에서도 이겨 당선됐다.
바이든 당선에 결정적이었던 러스트 벨트 지역은 1980년대 후반 이후 2012년까지 단 한 번도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이기지 못했던 곳이었다. 2016년엔 예상을 뒤엎고 트럼프가 이 지역의 고졸 백인 노동자의 표를 얻어 승리했는데 2020년 바이든이 잃어버렸던 표를 고스란히 회복했다.
내년에도 바이든 대통령이 미시간·위스콘신·펜실베이니아에서 승리하면 쉽게 재선에 성공할 수 있다. 바이든 대통령이 이 지역 고졸 백인 노동자의 표심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곳 유권자들에게 “인플레이션 감축법, 반도체 법 같은 기념비적인 입법을 성사시켜 일자리를 마련해 줬다”면서 “중산층을 탄탄히 하는 산업정책으로 중국의 추격을 따돌리겠다”고 약속했다.
이처럼 바이든 행정부가 대중 정책까지도 선거운동으로 활용하는 대목이 눈에 띈다. 오죽하면 바이든 대통령 취임 직후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이 ‘노동자를 위한 외교정책’이라는 표현까지 썼겠는가.
바이든 행정부가 중시하는 가치의 핵심은 두꺼운 중산층으로 지탱되는 자유민주주의다. 선거를 앞두고 있고 러스트 벨트에서 승리가 절실하기 때문에 자유민주주의보다 중산층에 방점을 찍었다고 봐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제시할 수 있는 메시지는 한·미동맹과 가치동맹 사이에 두꺼운 중산층을 끼워 넣는 것이다.
“전쟁의 잿더미였던 한국이 미국의 도움으로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뤘다. 성장의 원동력은 두꺼운 중산층이었다. 사회의 허리를 담당하는 중산층은 자유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필요하다. 최근 미국에서 성사된 한국 기업의 투자는 미국의 중산층 강화에 크게 일조할 것이다. 이렇게 한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의 공급망 강화에 기여할 것이다.”
이 정도의 메시지는 바이든 대통령뿐만 아니라 러스트 벨트에서 승리가 절실한 트럼프에게도 편향되게 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 정부의 선명한 외교정책 노선은 미국 선거와 미국의 국내정치 상황에 대한 냉철한 이해로 뒷받침돼야 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하상응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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