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율성 역사공원, 역사는 사라지고 '사업'만 남았다 [박용준이 소리내다]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 사업을 둘러싼 논란이 거세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이 독립운동가ㆍ음악가 정율성의 한국전쟁 중 ‘중공군’ 복무 경력 등을 문제 삼아 사업 철회를 요구하자 강기정 광주광역시장은 해당 사업을 차질 없이 추진하겠다고 발언했다.
그러자 여권이 광주시장을 맹비난하는 가운데 일부는 이에 편승하여 이념 공세, 지역 혐오에 나서고 있다. 한편, 논란에 대한 입장 표명을 둘러싸고 5·18 공법단체가 분열하는 동안 정작 정율성 기념사업에 적극적이었던 광주 지역 정치인, 시민단체, 교육계는 침묵하고 있다.
정율성의 생애를 간단히 살펴보자. 1914년 광주에서 출생해 학교를 다녔고 중국으로 건너가 의열단이 난징에서 운영한 조선혁명간부학교에서 수학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39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했고 훗날 중국인민해방군이 될 ‘팔로군’을 위해 〈팔로군 행진곡〉을 만드는 등 중국공산당 찬가를 다수 작곡했다.
해방 후 정율성은 소련 군정 하의 북한 지역에 정착했다. 그는 북조선로동당 황해도 위원회 선전부장, 조선인민군 구락부장과 협주단장 등을 역임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율성은 중국으로 돌아갔고 중국 국적을 취득했다. 그러나 그해 말 중국인민지원군(중공군)의 일원으로 돌아와 참전했고, 전선의 병사들을 위무했다. 그의 생애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시기일 것이다.
교육 교재엔 ‘중공군 참전’ 외면
‘정율성 음악제’ 개최, 동구 불로동과 남구 양림동 두 곳에 모두 자리잡은 ‘정율성 생가’, 양림동 일대의 ‘정율성로’, 거기에 세워진 거대한 흉상이 말해주듯 지역사회는 정율성을 지역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기억, 기념하고 있다. 단, 논란이 되는 그의 중국인민지원군 활동은 언급되지 않는다. 광주광역시교육청에서 발간한 중·고교 역사 교재 등에서도 마찬가지로 정율성을 기억, 기념하고 있다. 특히 해방 이후에서 한국전쟁에 이르는 시기 정율성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정율성은) 광복 후 잠시 북한에 들어가 음악 활동을 하였지만 6·25 전쟁 동안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작곡 활동에 전념하였다’(고교 주제로 보는 한국사, 2018). ‘그가 북에서 보여준 활동은 음악 활동에 국한돼 있으며, 6·25 참전도 중국 국적을 지닌 문화 인사로 참여한 것이었다’(경상도 땅에서 싸운 남도 사람들, 2021). 또는 해방 이후 정율성의 행적을 아예 서술하지 않았다(중학교 주제로 보는 역사, 2018). 이처럼 그의 북한 정권 및 중국인민지원군 참가 사실은 생략하거나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다.
반면 ‘2009년 중국 정부는 정율성을 신중국 창건 영웅 100인으로 선정하였으며’(고교 주제로 보는 한국사), ‘2014년 한국을 찾은 시진핑 주석은 한·중 우호 인물 아홉 명을 언급하였는데, 한국인 중 현대 인물로는 임시 정부 주석인 김구와 정율성뿐’(중학교 주제로 보는 역사) 등 정율성에 대한 중국 정부의 평가는 크게 강조한다.
‘광주역사문화자원’ 홈페이지에서는
「역사문화웹툰」
등 에서 정율성을 별도의 항목으로 다루면서도 한국전쟁 기간의 행적을 언급하지 않고 독립운동가·음악가이자 한·중 우호 인물로만 서술하고 있다.
정율성 역사공원을 둘러싼 논란은 사실상 정율성의 ‘중공군’ 경력만을 강조하는 정부 및 여당과 ‘독립운동가’ 경력만을 강조하는 광주광역시의 역사인식이 상호 충돌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 인물이 지닌 논란성을 인정하지 않는 흑백논리에 갇힌 역사인식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한국전쟁 참전, 산업화 등에 공로가 있다고 무작정 우상화해서는 안 되듯이 마찬가지로 독립운동가, 민주화운동가라는 이유만으로 우상화해서도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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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인물 무작정 찬양은 문제
그동안 지역에서 전개된 역사문화사업의 상당수는 지역 출신 역사적 인물을 어떻게든 더 찾아내어 진지한 역사적 평가를 거치지 않은 채 자랑거리로 만들어 기념비, 기념관, 기념상 등 각종 기념물을 세우고는 관광상품화하는 데만 혈안이 되었던 것은 아닌가. 그 과정에서 해당 인물이 지닌 논란 거리는 사업화 논리 속에 무시되어 왔다.
사실 광주광역시나 광주교육청 등에는 지역의 역사 문제를 다루는 여러 위원회, 포럼 등 공론장이 마련되어 있다. 정율성 역사공원이 타당한지도 이와 같은 장치를 통해 검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공론장을 활용하여 역사교사·역사학자 등 지역 내 전문가들이 과연 직접 의제를 설정하고 그와 관련된 견해를 자유롭게 제시할 수 있었는지, 당국은 이를 폭넓게, 깊이 수렴하고자 했는지는 의문이다.
지역에서 역사 담론을 주도하는 것은 전문가가 아니라 이런 사업을 통해 한몫 단단히 챙기려는 지역 사회의 ‘토호’들이다. 이들은 이런저런 영향력을 활용해 자신들의 역사 인식이 광주·전남의 목소리인 것처럼 지역 여론을 호도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지역 사회의 전문가 목소리는 배제되고 있으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박용준 광주광역시 역사 교사·자유역사교육자모임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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