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컷칼럼]합의가 사라진 정치, 모욕받는 역사
한국 정치는 상대를 부정하는 협량(狹量)에 갇혀 있다. 범부(凡夫)의 상식에 부합하는 최소합의에도 번번이 실패하고, 배는 산으로 가고 있다. 육사에 있던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영웅 홍범도(1868~1943) 장군의 흉상이 외부로 이전한다. 이번에도 여야 합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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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범도 공산당 입당 시비 건다면
루스벨트·처칠, 소련 협력도 문제
문재인 정부 일방 결정이 출발점
경직의 저주에서 풀려나야 산다
」
국방부는 홍 장군의 소련 공산당 입당, 자유시 참변 때의 독립군 탄압 역할을 이전 이유로 들었다. 북한 김일성이 등장하지 않았던 한 세기 전의 시대 상황을 고려하지 않았다. 당시 러시아(1922년부터는 소련)는 식민지 약소국의 독립을 지원했다. 한인 항일무장운동 그룹은 제국주의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과 싸우는 러시아와 자연스럽게 협력했다. 퇴역 후 고령이 되어 연금을 받기 위해 1927년 공산당에 입당했다는 이유로 홍범도 장군을 시비 걸 수 있을까. 그렇다면 제2차 세계대전 때 소련과 손잡고 나치 독일과 싸운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 처칠 총리도 “조국을 배신한 공산주의자”로 매도해야 할 판이다.
홍범도 장군은 1921년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이 희생당하자 솔밭에서 땅을 치고 울었다는 기록이 제시됐다. 독립군 탄압은 사실이 아니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박정희 정부는 1962년 홍 장군에게 훈장을 추서했고, 노태우 정부는 유해 송환을 추진했다. 박근혜 정부는 최신 잠수함을 홍범도함이라고 명명했다. 모두 보수정부가 한 일이다.
이번 소동에는 문재인 정부의 책임도 있다. 홍 장군 유해는 강제 이주됐던 카자흐스탄에서 2017년에 돌아왔다. 문 정부는 그를 포함한 다섯 분의 독립군 운동가 흉상을 만들어 육사 충무관으로 모셨다. 이들은 ‘군(軍)의 기원’이 됐다. “독립군 전통도 사관학교 교육과정에 반영하라”는 대통령 지시에 따른 일이었다. 육사 필수과목인 한국전쟁사는 선택과목으로 격하됐다. 민족, 항일투쟁을 강조하면서 국가와 안보의 측면이 약화됐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당시 야당 의견은 전혀 듣지 않았다.
우리는 정치에서 대화가 사라졌기 때문에 벌어진 희비극(喜悲劇)을 목도하고 있다. 숙고하고 상의했다면 이런 양 극단의 결정은 없었을 것이다. 지금의 여야 갈등은 내전(內戰) 수준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캠프 데이비드에서 한·미·일 신(新)삼각공조를 이끌어냈다. 최악의 한·일 관계를 과감하게 복원시켜 거둔 윤석열식 외교의 성과다. 중국과 러시아를 관리하기 위해서라도 초당적인 외교가 필요하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은 ‘닥치고 반대’ 모드다.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 배출을 “핵 오염수 배출”로 규정했고, “윤석열 심판”을 외치고 있다. 대통령은 국민의힘 의원과 장관들에게 “싸워라”고 독려하고 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국민항쟁’이라고 했지만 실은 방탄용이다. 200여 건의 민생 법안과 예산안을 처리해야 할 정기국회는 암초에 걸려 있다. 여야는 완전히 다른 나라에 살고 있다.
내편하고만 손 잡는 정치는 정치가 아니다. 나치와 싸웠던 독일 사민당의 브란트는 나치 선전부 간부 출신인 기민당 키징어와 손잡고 최초로 대연정에 참여했다. 브란트는 키징어 총리 내각에서 부총리 겸 외무장관이 됐다. 공산주의자였던 베너는 전독일부 장관, 나치 장교였던 슈트라우스는 재무장관이었다. 브란트는 나치 출신을 인사과 책임자로 기용해 큰 도움을 받았다. 작가 귄터 그라스는 브란트에게 편지를 보내 “나쁜 결혼”이라고 비난했지만 ‘화해의 연방정부’는 성공적이었다. “서독만이 독일을 대표하며 동독과 수교한 나라와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할슈타인 원칙을 폐기하고 동독을 포용하는 브란트의 파격적 동방정책은 키징어가 수용했기에 뿌리내릴 수 있었다.(『독일의 힘, 독일의 총리들』 김황식)
두 번이나 세계대전을 일으켜 유럽을 지옥으로 만들었던 전범(戰犯) 국가 독일은 분단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통일됐다. 지도자들의 타협과 성숙한 합의로 만들어낸 현대사의 기적이다. 키징어·브란트·슈미트·콜 총리를 거치는 동안 보수·진보 정권 모두 일관되게 동방정책을 추진했다. 한국은 피식민지 국가였지만 78년째 분단돼 준전시 상태로 남아 있다. 억울해 하기 전에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합의 능력을 잃은 정치 때문에 항일무장운동의 역사가 모욕당하는 현실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달성하려면 우리도 여야와 보수·진보가 타협하고 협력해야 할 것이다.
생명이 있는 모든 유기체는 부드럽다. 뻣뻣한 것은 죽은 것이다. 자유·민주·번영, 그 무엇도 잉태하고 출산할 수 없다. 정치는 전쟁터의 총검(銃劍)이 아니다. 상대의 모순까지도 포용해 차선의 합의를 이뤄내는 전환의 상호 고백이고 고해성사다. 반공의 상징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주의자였던 조봉암을 농림부 장관으로 기용해 농지개혁을 성공시키지 않았는가.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이 지독한 경직(硬直)의 저주에서 풀려날 때 우리는 모두 살 수 있다.
글=이하경 대기자 그림=임근홍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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