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앞 '독이 든 성배'… 푸틴과 거래 끝나면 후과 닥친다
각기 핵·미사일 고도화와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국제사회의 제재로 인해 대내외적으로 코너에 몰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위험한 거래'가 현실화할 조짐이다. 뉴욕 타임스(NYT)는 김정은이 이달 중 러시아를 방문해 푸틴 대통령과 무기 거래를 논의할 것이라고 4일(현지시간) 보도했다.
김정은 입장에선 단기적으로 경제적 난국을 타개하는 동시에 전통적인 우호 국가인 러시아와 반미(反美) 전선을 공고히 하며 얻는 전략적 이익이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전 전황의 변화나 미·러 관계 개선처럼 주체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변인의 영향으로 한순간에 손해만 남기고 끝나는 장사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당장은 '꽃놀이패'지만…
북·러 정상회담과 양국 간 군사협력은 미국 등 국제사회의 제재를 뚫고 모든 분야에서 정상국가의 반열에 오르고 싶은 김정은과 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로 리더십 위기까지 직면한 푸틴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로 볼 수 있다. 고난의 행군 이후 최대 역성장을 기록하고 있는 북한 경제와 당국의 개입에도 부질 없이 떨어지는 러시아 루블화 폭락세가 양 정상이 놓인 처지를 방증한다.
특히 김정은은 지난 5월과 8월 두 차례나 군사정찰위성 발사에 실패하고도 오는 10월에 또 재발사를 예고할 정도로 조바심을 내비치고 있다. 말로는 미국과의 '장기전'을 선포했지만(2022년 3월 24일 '화성-17형' 발사 현지지도), 실제로는 재래식과 전술핵 무기가 결합된 속전속결의 단기전을 염두에 둔 행보를 보이는 건 또다른 조바심의 징후다.(4일 국정원 국회 정보위원회 보고)
당초 계획처럼 녹록지 않은 우크라이나 침공 전황에 용병기업인 바그너 그룹의 수장인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감행한 무장반란으로 수세에 몰렸던 푸틴도 비슷한 상황이다. 푸틴 역시 프리고진을 제거하면서 다급한 속내를 드러냈다.
동방경제포럼(EEF, 9월 10~13일)을 계기로 김정은의 방러가 성사된다면 푸틴과의 정상회담에서 우크라이나전에 다양한 상당량의 탄약과 포탄 등 재래식 무기를 제공하겠다는 제안을 내놓을 가능성이 크다. 지난 7월 정전협정 70주년 행사 때 방북한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과 국방 현안을 논의한 김정은이 이후 잇달아 군수공장을 찾아 생산능력 강화를 촉구한 게 이를 뒷받침하는 대목이다. 군수공장에서 김정은은 처음으로 '국방경제사업'을 언급했다.
반대급부로 자신의 숙원사업 중 하나인 군사정찰위성이나 핵추진잠수함,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 핵무력 과업과 연관된 기술 제공을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식량 지원이나 열악한 공군력 보강을 위한 전투기 지원, 전후복구 사업에 북한 노동자를 투입하는 문제까지 폭넓게 논의될 가능성도 있다. 여기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를 뒷배로 삼아 가장 괴로운 제재를 가하는 안보리를 무력화시키는 것은 덤이다.
북핵은 물론 역내 안보까지 거론하며 협력을 강화하는 한·미·일에 맞선 북·중·러의 연대 구도를 공고히 하며 얻는 전략적 이득도 있다. 이와 관련, 국정원은 4일 국회 정보위 보고에서 "쇼이구 러 국방장관이 북한을 방문해 김정은과 면담할 당시 북·중·러 연합훈련에 대한 공식 제의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며 3국의 해상연합훈련 가능성을 언급했다.
통일부 당국자는 "북한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러시아를 노골적으로 지지하면서 러시아와의 밀착 관계를 과시해왔다"며 "여러 정황상 무기 거래를 매개로 협력할 가능성이 커지는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독이 든 성배" 될 수도
북한은 계기마다 "견해 일치", "공동전선", "전략적 단결" 등의 수사를 사용하며 러시아와의 밀착을 강조하고 있지만, 실상은 당장의 '니즈'가 맞아떨어져 뭉친 것일 뿐이란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평가다. 급하게 필요한 이해관계를 채워주는 일종의 '비즈니스 관계'라는 얘기다. 이는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에 기반을 둔 가치와 신념, 전략적 이해를 공유하고 있는 한·미·일의 협력 강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북·러가 전통적 친선을 내세우며 포장하고 있지만, 서로의 이익이 맞아 떨어지는 전략적 거래의 성격이 짙다"며 "어느 한쪽이라도 전략적 가치가 떨어진다는 판단이 서게 되면 멀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김정은 입장에선 '독이 든 성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마무리할 때 어떤 식으로든 미국과의 협상을 거칠 가능성이 크다. 미·러 간에 관계 재설정을 위해 주고받기가 이뤄지는 과정에서 북한이 '전쟁 파트너'에서 곧바로 '버리는 카드'로 전략할 가능성도 있다는 설명이다.
이와 별개로 김정은이 탄약과 포탄을 러시아에 공급하는 대가로 원하는 핵추진 잠수함과 군사정찰위성 관련 기술을 받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언뜻 봐도 서로 내밀고 있는 카드의 '등가성'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선 넘지 마라" 미국의 공개경고
그간 북한과 러시아 사이의 불법적인 무기거래를 공개적으로 경고해온 미국 정부는 NYT의 양국 정상 회담 가능성 보도 직후 이를 즉각 확인했다.
미국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에 돌입한 이후 이번처럼 정보사안을 선제 공개하는 방식으로 상대방의 판단과 행동을 수정토록 하는 일종의 인지전을 벌이고 있다. 이번에도 "다 들여다보고 있다", "선은 넘지 마라"는 암묵적인 경고를 공개적으로 내놓은 셈이다.
김정은 입장에서는 레드라인(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체급이 다른 '역대급 빌런(villain)'으로 거듭나는 대가(代價), 즉 손익계산서를 고민해야 할 상황이 놓였다는 지적도 나온다. 당장 재재만 하더라도 기존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에 추가로 대러 제재까지 함께 받는 상황으로 번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이는 단순히 한·미·일뿐 아니라 유럽도 더 확고한 대북 강경 모드를 굳히게 할 수 있다. 특히 러시아에 대한 살상 무기 공급은 중국조차도 넘지 않는 선이다. 미국은 물론 유럽을 비롯한 서방 진영의 '역린'(逆鱗)을 건드리는 기폭제가 될 가능성도 있다.
정영교 기자 chung.yeonggy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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