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날조로 홍범도 장군 도려내기, 설마 일본 때문인가
[김학규 기자]
▲ 홍범도 장군(연합뉴스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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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돌아갈 필요도 없다. 헌법을 보자. 우리나라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 나라다. 대한민국 국군은 당연히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대였던 한국광복군과 독립군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봐야 한다. 육사는 독립군 양성의 실질적·상징적 기관인 신흥무관학교를 당연히 자신의 뿌리로 삼아야 하는 것 아닌가.
육사는 최종적으로 홍범도 장군의 흉상만 철거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애초에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이회영, 청산리 전투의 영웅 김좌진,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청산리 전투의 영웅이자 한국광복군 제2지대장을 지낸 이범석 등의 흉상을 함께 철거한다고 했던 점을 상기한다면 이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행위다. 우리가 일제 식민지로 다시 전락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벌어져선 안 될 일이 벌어진 것이다.
▲ 같은 날 수산시장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일본 총리 일본 후쿠시마 제1원전 오염수 방류로 수산물 안전성에 대한 우려가 있는 가운데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31일 각각 자국의 수산시장을 방문했다. 사진 왼쪽은 이날 노량진 수산시장을 찾아 꽃게를 구매하는 윤석열 대통령, 오른쪽은 도쿄의 수산물 도매시장인 도요스 시장 찾아 문어를 시식하는 기시다 총리. 2023.8.31 [대통령실 제공 및 교도 통신. 재판매 및 DB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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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달이 단순히 육사 차원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는 건 많은 국민들이 알고 있다. 조태용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도 국회에서 "윤 대통령도 '어떻게 하라고 얘기하지 않겠다. 다만 문제를 제기하고 어떤 것이 옳은 일인지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이렇게 말씀했다"고 답변하지 않았나. 이 발언은 이미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왜 윤석열 정부는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 걸까? 그는 이미 이념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공산전체주의 세력에 맞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게 스스로의 정체성이란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면서 '체제 수호를 위한 가치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미동맹은 보편적 가치로 맺어진 평화의 동맹이자 번영의 동맹"이고, 일본은 "이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안보와 경제의 협력 파트너"라고 규정한 데서 이를 알 수 있다. 한미일 삼각동맹의 현실화를 위한 활동에 돌입한 상황이다.
'아군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적 이념에 사로잡힌 국방·외교 정책은 '국가간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금언을 무색케 하고 국가의 안녕과 실리 추구 역시 사라지게 만들었다.
윤 정부에게 북한은 '주적임에도 평화·통일을 함께 일궈내야 하는 특수관계'란 이중적 접근 대상이 아니다. 그냥 '공산전체주의' 세력으로 단순 치환됐을 뿐이다. 강력한 우리의 국방력과 한미동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까지 끌어들여야 막을 수 있는 세력으로 상정한 모양새다.
한미일 동맹의 현실화와 함께 윤 정부는 한일관계 개선에 방해가 될 수 있을만한 요소는 무엇이든 찾아내 잘라내겠다는 심산으로 보인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따른 국민적 걱정도 '괴담'으로 치부하고, 미국이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해도 항의하지 않는다. 그 여파가 이젠 독립영웅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친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독립전쟁 영웅들을 도려낸 자리에 백선엽이 들어설 것이란 전망은 결코 근거가 없어 보이지 않는다.
▲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고 홍범도 장군 흉상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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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다." 이탈리아 역사 철학자 크로체(Benedetto Croce)가 한 말이다. 역사는 항상 현재의 관점에서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다시 기술될 수밖에 없다.
윤석열 정부도 이러한 크로체의 생각에 충실해야 한다고 여겼을까? 단순히 육사 교정을 정비하는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역사를 다시 쓰기로 결심한 듯하니 말이다. 이제 '반공전체주의' 세력에 맞서는 굳건한 한미일 삼각동맹 체제 구축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은 쳐내고 이를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우리 사회 전반을 재조직하고 재정비하겠다고 나설 판이다.
그러나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새 주장을 하려면 최소한 역사적 사실에 기초해야지, 역사적 사실도 무시하고 심지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받아들여지는 게 아니라, '역사 쿠데타'로 비난받을 수밖에 없다.
한미일 삼각동맹을 통해 '공산전체주의'에 맞서 싸운다는 이념 방침이 중요해도, 항일독립전쟁 영웅 홍범도 장군의 흉상 철거를 정당화하려고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행태는 선을 넘어도 한참 넘는 행위다.
홍범도 부대를 비롯한 우리 독립군 부대가 러시아령을 넘던 1920년 말~1921년 초의 상황은 참혹했다. 일본군의 공격을 피해 러시아령으로 넘어간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 독립군의 통합과 재편성을 전망하면서 일시적 무장 해제를 수용한 일은 결코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무장해제 요구를 거부하고 만주로 되돌아간 김좌진 부대가 부딪힌 현실은 중국군에 무장해제 당하거나 스스로 해산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그렇다고 항일독립군이 일본군과 손잡고 적군(붉은군대)과 싸우던 백군(왕당파)에 합류하는 자기모순적인 행동을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피압박 민족의 해방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하고 이를 실천한 레닌과 손잡은 홍범도 장군과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선택은 정당했다. 이후 부하들의 정착과 노년의 삶을 생각하며 나이 60인 1927년에야 소련공산당 당원이 된 홍범도 장군의 불가피한 선택에 대해 '당신이 가입한 소련공산당은 20여 년 후에 벌어진 6.25 한국전쟁에서 북한군을 지원한 그 소련공산당이었으니 잘못된 선택이었어!'라고 비난하는 짓만큼 몰역사적인 관점도 없다.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불행한 사건이었던 1921년의 '자유시 참변'에 직접 관여한 사실이 없음에도 마치 홍범도 장군이 직접 관여한 듯이 역사를 뒤틀어 왜곡하고,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석하던 중 레닌과 회견하고 받은 권총을 자유시 참변에 개입한 대가로 받은 선물이라고 날조한다고 해서 역사적 사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이런 식의 비난 논리라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과 손잡고 일제에 맞서 싸운 미국과 영국, 장개석의 중국도 결국 '공산전체주의' 세력이 되고 말 것이다.
이쯤에서 일제가 소련의 위협을 강조하는 현실에 편승해 '소련의 노예로 사느니 차라리 일제의 식민지로 있는 게 더 낫다'는 해괴한 논리를 일기에 남긴 친일반민족행위자 윤치호의 파렴치한 작태를 떠올려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윤치호는 영국과 미국을 '귀축영미(鬼畜英美)'라 비난하며 일제의 아시아-태평양 침략전쟁을 옹호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을 일제의 총알받이로 전쟁에 몰아넣는 캠페인에 앞장서기까지 한 인물이었다. 윤치호는 묻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 2018년 6월 8일 오후 서울 노원구 육군사관학교 연병장에서 열린 독립군과 광복군의 전신인 신흥무관학교의 107주년 기념식에서 장교 두명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
ⓒ 이희훈 |
육사생도가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항일독립전쟁의 영웅 흉상 앞에서 '헌법에 따라 항일독립전쟁에 헌신한 분들의 정신을 기억하면서 대한민국과 국민을 지키는 참된 군인이 되겠다'고 약속하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답고 듬직한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의병과 독립군으로 평생을 일제에 맞서 싸웠고, 특히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항일독립전쟁의 영웅 홍범도 장군이 육사생도의 롤모델이 될 수 없다면 누가 육사생도의 롤모델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육사는 이미 2018년에 홍범도 장군에게 명예졸업장을 추서하면서 "귀하께서는 독립군의 일원으로서 조국의 자주 독립을 위해 고귀한 희생을 다하셨으며, 특히 독립전쟁 중 몸소 보여주신 숭고한 애국심과 투철한 군인정신은 위국헌신 군인본분의 길을 걷고자 하는 사관생도들에게 참다운 군인의 귀감이 되었으므로, 이에 육군사관학교 학칙에 따라 명예졸업증서를 드립니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런 그가 롤모델이 될 수 없다면 나라가 식민지가 되었는데도 독립전쟁에 나서기는커녕 개인의 출세만 생각하면서 일본군 장교가 돼 독립운동가를 참살하는 데 앞장섰던 백선엽 같은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단지 일제가 패망한 이후 한국군에 참여해 장군으로 있었다는 이유로 롤모델로 삼기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아니면 한국군에 참여한 이후 군사쿠데타까지 일으켜 장기간 독재를 휘두름으로써 대한민국의 '민주적 기본질서'를 근본적으로 훼손한 인물을 롤모델로 삼아야 한다는 건가.
▲ 서울 노원구 육군사관학교 정문. |
ⓒ 권우성 |
결국 육사는 "홍범도 장군 흉상은 육사의 정체성과 독립투사로서의 예우를 동시에 고려해 육사 외 독립운동 업적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적절한 장소로 이전한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육사에서 '버린' 홍범도 장군 흉상을 받을 곳은 없다. 이미 흉상 등을 설치하고 홍범도 장군을 기리는 공간은 전국에 수도 없이 많다. 심지어 국방부 청사 현관 앞에도 1998년부터 홍범도 장군 흉상이 설치돼 있지 않던가. 독립기념관이 '수장고에 받을 수는 있다'고 답했던 것도 이미 홍범도 장군 흉상을 전시하고 있던 탓이다.
사실 2018년 육사에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5명의 독립전쟁 영웅의 흉상을 설치한 건 비록 늦었지만 육사에게도 항일독립운동의 역사로부터 시작하는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를 제대로 가르쳐야 하고, 자신의 역사를 신흥무관학교에서부터 찾아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었다.
그런데 불과 5년 만에 홍범도 장군 흉상을 철거하겠다고 나온 건 육사의 존재 이유를 국민들이 근본적으로 회의하게 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육사는 이 점 역시 유념해야 한다.
만약 육사가 어떠한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대한민국의 영토와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우수한 장교를 양성하는 기관으로서 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희망이 없다면 지금의 육사는 차라리 문을 닫는 편이 낫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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