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히 툭 서있는 통나무, 이게 작품이다…조각가 나점수 시심 [더 하이엔드]
작가 나점수가 구한 정서의 형상
하얀 갤러리를 배경으로 배를 가른 나무판들이 바닥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통나무 하나가 무심히 툭 서 있을 뿐이다. 깎아 놓은 그대로의 나무들은 마치 조미료 없는 음식 같다. 의미를 곱씹을 것도 없이 순하고 심심한데, 자꾸 가만히 응시하게 만든다.
지난 5월 서울 성수동 ‘더 페이지 갤러리’에서 열린 조각가 나점수의 개인전 ‘함처(含處), 머금고 머무르다’의 풍경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조각가 나점수(54)는 당혹스러울 만큼 비어있는, 그래서 낯설기도 한 추상 조각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작가의 조각들은 어떤 의미를 지니기보다 자연의 상태에 집중한다. 흔히 말하는 형태를 만드는 조각이 아니라, 물질이 어떤 상태로 전환된 모습을 슬쩍 놓아두고, 제시한다. 혹은 가끔 일으켜 세우는 정도다.
30여 년 조각 작업을 해온 나 작가는 “어렸을 때는 펼쳐진 세상을 실제 그대로 옮기고 싶은 욕망이 컸지만 하다 보니 고스란히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의지를 갖추고 형태를 만들기보다, 나를 둘러싼 세상의 부분이나 전체를 유심히 보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시심(詩心) 찾기
작가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작업실은 경기도 양주의 한 유원지 인근이다. 모두 숲으로 둘러싸여 계절마다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나 작가에 따르면 낮에는 남루해도, 빛이 황금색으로 바뀌는 석양쯤에는 시심의 원천이 샘솟는 곳이다. 작업장 옆 큰 바위가 있어 종종 찾아가 옆의 부스러진 자갈과 구르는 먼지를 감상한다는 작가는 같은 지구에 살면서도 ‘지구를 낯설게 보는’ 사람이다.
낯설게 보다 보니 자연은 시시각각 변화했다. 멀리서 보면 하나의 숲이지만, 숲 안에서도 새로 태어나는 나무가 있고, 썩어가는 나무가 있었다. 갓 태어난 새싹들과 흩어져없어져 버리는 낙엽들의 순환 과정을 몇 년씩 지켜봤다. 그리고 어느 시점, 서로 다른 나무들의 시간을 잠깐 붙들어 전시장에 부려 놓는다.
Q : 작품들이 철학적이다.
A :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조용히 살펴보려고 한다. 자연을 어떻게 시적인 감각으로 전환해 바라볼 수 있을지, 시심을 찾다 보니 처음에는 그냥 들여다본다. 뭔가 움직이면 거기서부터 사유를 시작한다.
수천 번의 톱질과 수만 번의 끌질
나점수 작가는 ‘구도의 작가’로 불린다. 단순해 보이는 작품도 들여다보면 끝 모를 섬세함이 깃들어있다. 접합 부위가 보이지 않는 작품들은 통나무에서 얇은 판재가 될 때까지 깎아 들어간 것이다. 마치 ‘도’를 구하는 사람처럼, 나무를 껴안고 씨름한 결과다.
Q : 작업 과정은 어떠한가. 이제 됐다고 하는 ‘완성’의 지점이 있는지.
A : 처음 만났을 때 이미 완성되어 있는 물질이 있다. 다만 가지고 오면, 있던 장소와 연관 돼서 발생했던 시심이 작동하기 어려워진다. 이때 손을 대면서 내면에 떠올랐던 어떤 정서적 상태가 부각되는 시점의 느낌이 나오면 멈춘다.
나 작가에게 나무라는 물질은 순수하고 위선이 없는 친구다. 습도가 모자라면 이내 갈라져 버리고, 손을 대면 대는 형상대로 변화한다. 자연으로부터 받은 정서와 감성을 인식한 뒤, 손을 움직여 나무를 조각해 그 특정한 정서의 형상을 찾아가는 것이 작가의 방식이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목적성이 아니라 정신이 드러났으면 한다”고 했다.
Q : 평소 작업 과정을 ‘수행’에 빗대기도 하는데.
A : 작가들의 수행이 유행처럼 되어버린 것 같아 불편하다. 작업하면서 고민이 많은 사람일 뿐이지, 실제로 수행하고 참선에 이른 분들과 비교할 수 없다. 아마도 나무를 조각하기 위해 끌이나 전기톱 같은 위험한 도구들을 쓰고 노동에 가깝게 작업하기 때문에 그런 말들을 하는 것 같다.
관객 몫이 절반, 자신이 보고 싶은 것 봐야
자연을 대면하며 느낀 정서를 나무에 담아 미술관에 전시해두었지만, 같은 나무 조각을 보고도 사람마다 느끼는 것이 다를 것이다. 작품의 이름도 ‘무명’ ‘식물적 사유’ 등 의미를 지칭하지 않았다. 여백이 많은 작품은 관객의 자의적 해석이 필요하다. 그래서 마치 시 같다.
Q : 관객들이 뭘 봐야 할지 고민할 것 같다.
A : 허공에 있는 구름을 외로운 심정으로 보면 외로워 보이고, 기쁠 때는 마음껏 깨끗해 보이는 게 아닐까. 미술 작품을 바라보는 것도 시심에 따라 달라 보일 것이다. 오히려 관객에게 어떻게 봤는지 역으로 물어본다. 형태가 지닌 정서적 뉘앙스를 살펴보는 경험 정도면 된다고 생각한다.
Q : 조각은 덜어내는 것
A : 화가가 꿈이었던 나 작가는 고교 시절부터 조각에 흥미를 느꼈다고 한다. 조각은 만들어 놓고 보면 앞면과 측면, 뒷면의 형태가 모두 다르다는 매력이 있었다. 과거의 조각은 대상과 정확히 일치하게 하는 기예에 가까운 기술이었다. 나 작가는 “지금 하는 조각은 묘사라기보다 덜어냄에 가깝다”며 “떠오른 감정에 유사하게 맞아떨어질 때 멈추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조각이라는 말을 여전히 쓰지만, 덜어내는 것과 다가가는 것, 멈추는 것을 생각하는 게 내 일”이라고 말했다.
Q : 키아프에는 어떤 작품이 출품되나
A : ‘무명’이라는 작품이다. 정해지지 않은 상태, 막연한 상태의 정서를 구현하고자 했다. 어떤 형태를 만들어야겠다가 아니라, 방치되어 있던 것들을 가지고 와서 붙여보면서 형상을 구성했다. 그러다 보니 거칠고 들판 같은 느낌이 났고, 심리적 상태로 드러난다 싶어 걸어두었다.
Q : 벽에 거는 작품이다.
A : 벽은 나에게 생존의 공간이다. 우리나라에서 미술품을 놓을 공간이라고 한다면 주로 벽이니까. 아파트 생활을 하니 공간이 한정되어 있고 입체적인 조각을 두기 쉽지 않다. 조각만이 갖는 장점이 있는데, 보여주고 싶어도 아직 우리 사회에서 받아들이는 폭이 넓지 않은 것 같다.
Q : 조각이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A : 조각은 ‘압축된 폴더’ 같다. 회화처럼 그림 안에 공간이 있고, 서사를 풀어갈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함축되어 있어서 의미를 풀어가기가 쉽지 않다. 의미를 풀기보다, 작품들이 머금은 에너지와 함께 호흡했으면 한다.
■ 작가 나점수는...
「 1969년생.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조소과와 동대학교 대학원 조소과 졸업. 14회의 개인전과 다수의 기획전에 참가했다. 2016년 김종영 미술관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고, 2003년 송은문화재단 지원상(개인전), 1998년 청년미술제 본상, 1997년 뉴프론티어 대상 등을 수상했다. 작가의 작품은 장욱진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포항미술관 등에 소장돼 있다.
」
■
「 다시 한번 한국이 예술로 들썩이고 있습니다. 오는 9월 6~9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리는 키아프 서울·프리즈 서울이라는 걸출한 두 아트페어 덕분입니다. 두 페어의 개최 기간에 맞춰 전국 곳곳에서 열리는 아트 이벤트도 참 많습니다. 예술에 대한 관심이 폭증한 이때, 한국의 작가들에 대해 한 걸음 더 깊이 들여다보기 위해 중앙일보가 출품 준비에 한창인 작가들을 만났습니다. 키아프가 올해 처음으로 선정 발표한 '키아프 하이라이트 작가' 중 시간적·지리적으로 인터뷰가 가능했던 한국 국적의 작가들입니다. 직접 작가들을 만나보니 왜 이들이 스스로를 "노동집약형"이라고 말하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창의성을 오랜 시간을 들여 묵묵히 작업해 나가는 작가 10인을 매일 1명씩 '나는 한국의 아티스트다' 인터뷰로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
유지연 기자 yoo.jiyo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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