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풀들에 경배를!"···50년 간 자연 탐구한 미술가 임동식

이은주 2023. 9. 5.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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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평창동 가나아트 전관서
'인간과 자연 합일' 추구한 작업
실험미술 일상의 영역으로 확장
임동식, 갈대를 입에 문 청년, 2016-2023, 캔버스에 유채, 182 x 227cm. .사진 가나아트

미술 애호가들이 '2020년 최고의 미술 전시'를 꼽을 때 빠지지 않는 게 있다. 서울 서소문 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임동식(78) 회고전. 작가가 1970년대부터 자연과 현장을 기반으로 해온 작업을 300여 점의 작품과 기록물로 소개한 대규모 전시였다. 전시 기간은 3개월, 그러나 당시 코로나19 때문에 미술관이 문 연 날은 한 달이 채 안 됐다. 50년 가까이 자연과 예술, 그리고 인간의 관계를 탐구해온 70대 작가를 '우리 시대 새로운 거장'으로 조명한 전시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이끼를 들어 올리는 사람, 임동식'전(10월 1일까지)이 1일 개막했다. 규모와 내용 면에서 3년 전 전시와 나란히 비교하기 어렵지만, 국내 미술계에서 특별한 궤적을 그려온 작가를 만날 기회다. 1~3관 3개의 전시장에서 회화 40여 점과 드로잉 100여 점을 볼 수 있다.


75년 꽃지 해변 퍼포먼스


임동식, 1975 여름 안면도 꽃지해변의 기억, 2015-2020, 캔버스에 유채, 182 x 227cm. 사진 가나아트
1975년 안면도에서의 ‘어느 소년의 꿈을 위한 작업’의 사진 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
임동식, 온몸에 풀꽂고 걷기, 2016-2023 , 캔버스에 유채, 182 x 227cm. 사진 가나아트
1981년 공주 금강에서의 '온몸에 풀 꽂고 걷기' 퍼포먼스 모습. 사진 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
임동식, 이끼를 들어 올리는 사람 ,1993, 2004, 2020, 캔버스에 유채, 218 x 122.5cm(3ea). 1993년에 그린 것을 2004년, 2020년에 계속 수정하며 그렸다. 사진 가나아트
1991년 여름 '금강에서의 국제자연미술전' 임동식의 퍼포먼스 '이끼' 장면. 사진 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
그런데 전시장에서 들어서면서 처음 만나는 그림부터 범상치 않다. 공룡알과 같은 것이 여기저기 널려 있는 바닷가 풍경. 유화 물감으로 그리면서 최소한의 기름만 쓰고, 세필 터치가 두드러지는 화면엔 고요하면서도 독특한 기운이 감돈다. 다른 그림엔 풀들만 무성하다. 그 안에 사람 크기의 풀무더기가 보이는데 작품 제목이 '온몸에 풀 꽂고 걷기'다. 눈부시게 피어난 꽃들에 고개 숙여 인사하는 사람을 담은 그림 '겨울이 가고 봄이 오다'도 보인다. '자연'에 경의를 표하는 작가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진다.

임동식은 1974년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한 뒤 '한국청년미술작가회' 창립 멤버로 자연 현장 기반 작업을 시작했다. 그가 1975년 8월 충남 안면도 꽃지 해변 모래밭에서 벌인 퍼포먼스는 이번 전시에 '1975 여름 안면도 꽃지해변의 기억'이란 제목의 대형 회화로 나왔다. 바로 그 공룡 알 그림이다. 그는 81년 국내 최초 자연미술운동그룹 '야투'(野投·'들로 던진다'는 뜻)를 설립하는 등 자연미술을 지속해왔다.


"예술과 농사가 다르지 않다"


임동식, 겨울이 가고 봄이 오다, 2015~2016, 캔버스에 유채, 182x227cm. 사진 가나아트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 임동식 개인전 전시장에 재현한 작가의 작업실. 뉴시스 .
임동식 개인전 전시장 전경. 뉴시스
1970년대부터 자연 현장 기반 퍼포먼스를 해오며 드로잉, 회화 작업을 해온 임동식 화백. 뉴시스
81년 독일로 유학을 떠났던 그는 83년부터 국립 함부르크 미술대학(HFBK)에서 수학하고 90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공주 원골마을에 정착해 "농사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자연예술이자 생태예술"이라고 말하며 '예술과 마을' '자연예술가와 화가' 등 다양한 작업을 이어왔다. 2일 전시장에서 그를 만났다.

Q : 3년 전 전시가 호평을 받았지만 많은 사람이 보지 못했습니다.
A : 더 많은 사람이 보지 못해 아쉽지만 고마운 마음이 더 큽니다. 제가 깜짝 놀랄 정도로 전시가 좋았어요. 앞서 제가 서울시에 자료 1300건(5400여 점)을 기증했는데, 그 자료를 학예사들이 하나하나 분류해 작품과 함께 배치했죠. 환상적인 전시였습니다.

Q : 서울시에 기증한 자료가 지난 4월 서울 평창동에 개관한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에 '임동식 컬렉션'이란 이름으로 소장됐더군요.
A : 회화 중심으로 작업해왔다면 그런 자료가 나올 수 없었을 거예요. 그 순간이 지나면 사라지고 마는 야외 현장 작업이 많다 보니 작업 구상 드로잉부터 현장 사진, 메모 등 기록물 정리를 일과처럼 해왔습니다. 그게 또 재미있었고요. 드로잉도 회화도 제 작업의 한 갈래입니다.

Q : 일찌감치 야외에서 퍼포먼스를 많이 하셨는데요.
A : 옛날에도 풍경화가나 인상주의 화가들은 실내 작업실에서 벗어나 야외 현장에서 그림을 그렸죠. 한국에도 실경산수화 전통이 있었고요. 안팎을 따지는 건 두 번째 문제에요. 제게 중요한 것은 ‘미술이라는 것이 도시화한 환경과 틀 안에서만 생산되는 것처럼 여기고, 그것을 당연시하는 게 맞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서양 미술도 수 세기에 걸쳐 변화하며 발전해온 것이다. 그것을 인위적으로 따라가는 게 능사가 아니다"라며 "평생 하는 예술인데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내 것’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Q : 독일에 남아 작업할 수도 있었죠.
A : 게하르트 리히터(91)나 안젤름 키퍼(77) 등 독일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들을 보면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없는 특유의 감성이 있어요. 독일적이면서 리히터적이고, 독일적이면서 키퍼적인 것이죠. 무엇보다 철저히 자기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Q : 공주 원골에 정착한 이유는요.
A : 제 고향은 아니지만, 자연이 좋았어요. 제 작업이 자연 가까이 있어야 할 수 있으니까요. 서울에서 대학 시절을 보냈고, 제가 유학한 함부르크는 독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에요. 도시 생활은 충분히 했죠. 새가 우짖고 초목이 자라고 자연과 함께하는 동네 분들이 있는 곳이 제겐 더 새로운 곳이었어요.
그러면서 그는 이 얘기를 들려줬다. "원골로 가면서 전 서양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것을 하자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우리 입맛에 제일 잘 맞는 된장도 서양 사람들이 처음 먹어보면 그 맛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되죠. 입맛도, 보는 것도 세계가 보편타당하게 통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서양 화가인 파블로 피카소도 아프리카 미술에서 영감 받아 작업했어요. 문화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지만, 각자 자기 고유의 것을 찾아 표현해야죠.

Q : 자연 깊숙이 들어가 세상에서 잊힌다는 두려움은 없었나요.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내게 나를 알릴 에너지와 작업할 것과 그 내용이 있느냐가 더 중요하죠(웃음). 수도하는 스님은 보살님이 나를 알아보는가에 신경 쓰지 않고 자기 갈 길을 갑니다.

"자연과 인간의 의지가 균형을 이루는 예술을 하고 싶었다"는 그는 "불안을 자극하는 것들이 넘치는 세상에 내 작업이 고요한 힘으로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줄 수 있으면 그것을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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