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럭셔리, '올드머니'와 '콰이어트 럭셔리' 룩의 부상
'올드머니’와 '콰이어트 럭셔리', 그게 뭐길래
변화의 흐름에 기민한가? 매 시즌 한 발짝 앞서 성실한 쇼핑을 계획하는 J인가? 그렇다면 이미 눈치챘겠지. 메타버스에서 뛰쳐나온 듯한 ‘힙’이 저물어가고, 그 자리를 고요할 만큼 정숙한 룩이 차지하려 한다는 것을! 올드머니 룩은 직관적인 이름 그대로 부를 물려받는 이, 그러니까 ‘금수저’다운 고급진 룩을 가리킨다. 럭셔리 룩과 다른 거냐고? 유명 브랜드의 팬시한 신상을 입은 셀렙들의 레드 카펫 룩과 재벌 2·3세 룩의 차이를 생각하면 된다. 후자의 경우 더 프라이빗하고, 기품 있고, 클래식하며 조용한 파급력을 지녔다. 재벌가 여성들의 룩이 공개될 때마다 사람들의 관심이 ‘그 옷 어디 거’에 쏠리는 것처럼. 대개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브랜드가 포함되는데, 이내 ‘찐 부자들의 브랜드’ 같은 홍보의 계기가 되기도. ‘스웨그’ 같은 노골적인 과시는 지양한다. 그런 건 이제 막 부를 얻은 이들의 서툰 방식이니까. 그런 무리수 없이도 귀티가 흐르는, ‘진짜’들의 룩. 그렇다면 '콰이어트 럭셔리’는? 말 그대로 '고요한 럭셔리'. 고급스러운 소재로 만들어진 절제된 디자인의 잘 만들어진 옷들! 최근에는 제너 자매마저 올드머니와 콰이어트 럭셔리 룩으로 방향키를 틀었다는 소식. LA 걸 켄달 제너는 지난 파리 패션 위크 기간에 유러피안 걸로 변신을 꾀했다. 그간 미니멀한 룩을 시도해온 바 있으나, 최근 선보인 몇몇 룩은 유럽 명문가의 여식을 연상케 했다. 힙한 느낌은 쏙 빼고 단아해진 모습에 소피아 리치의 패션을 따라 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크림색 미니드레스에 플랫 슈즈, 켈리 백에 헤어밴드…. 불과 몇 달 전 전신 시스루 드레스를 입고 파티를 즐기던 켄달과 동일인이라니. 카일리 제너 역시 미국 10대들의 아이돌다운 팬시한 모습을 뒤로하고 새하얀 룩을 즐기기 시작했다. 특히 화이트 컬러의 알라이아 드레스를 입고 청순미를 어필했던 당시, 티모시 샬라메와의 열애설과 맞물려 더욱 주목받기도!
소피아 리치가 누구길래 켄달, 카일리가 따라 했다고 난리일까? 세계적인 팝 스타 라이오넬 리치의 딸이자 2000년대 초 패션 아이콘인 니콜 리치의 동생으로, 마이클 잭슨이 대부였던 대표 금수저다. 유니버설뮤직 CEO의 아들 엘리엇 그레인지와 올린 결혼식에서는 3벌의 드레스를 모두 샤넬 커스텀 제품으로 입었다. 그의 룩은 우아하고 심플한데, 액세서리나 헤어스타일로 귀여운 무드를 더해 결코 지루하지 않다. 핀터레스트에서 올드머니 룩 관련 가장 많이 검색된, 지금 미국 10대들이 가장 선호하는 올드머니 룩 아이콘이다. 올드머니 룩은 오랜 부를 바탕으로 한 패션인 만큼 스타일 아이콘도 다양한 시대에 걸쳐 있다. 이 스타일의 뿌리와도 같은 재클린 케네디, 다이애나 비뿐 아니라 모던한 콰이어트 럭셔리 룩의 참고서 캐럴린 베셋 케네디부터 안젤리나 졸리, 귀네스 팰트로, 올슨 자매에 이르기까지. 다이애나 비의 심플하고 우아한 룩은 올드머니 룩의 전형이다. 몸에 잘 맞는 슈트, 흰 셔츠와 진주 주얼리…. 영화와 화보 속 다이애나로 분했던 크리스틴 스튜어트부터 헤일리 비버까지, 현존하는 스타일 아이콘 중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이는 없으리라. 도회적인 올드머니 룩과 콰이어트 럭셔리 룩의 표본인 캐럴린 베셋 케네디는 존 F. 케네디 주니어의 아내로, 캘빈클라인 PR 출신다운 미니멀리즘의 대가였다. 셔츠, 치노 팬츠, 코트 등 반듯한 옷차림에 반다나, 헤어밴드를 더하는 그의 룩은 지금 따라 입어도 무방할 정도! 안젤리나 졸리 역시 기품 있는 클래식 룩의 대명사. 크림·화이트·블랙 컬러로만 이뤄진 룩은 콰이어트 럭셔리라는 이름에 걸맞다. 귀네스 팰트로는 영화에서도, 현실에서도 올드머니와 콰이어트 럭셔리 룩이 찰떡같이 어울리는 배우다. 최근에는 휴가 중 생긴 사고로 법정에 출두했는데, 출석 때마다 옷차림이 재판 내용보다 더 화제가 됐을 만큼 고급진 감각이 돋보였다. 미드 〈가십걸〉 속 ‘릴리’(세레나 엄마 역)를 연상케 하기도! 더 로우의 디자이너 메리 케이트 올슨과 애슐리 올슨은 빼어난 취향과 노련함이 돋보이는 패션 자매다. 아담한 체구지만 루스한 하의, 발목까지 오는 아우터를 완벽한 핏으로 연출해 모던한 콰이어트 럭셔리 룩을 선보인다.
문득 의문이 생긴다. 어쩌다 1020마저 이런 차분한 룩을 선망하게 된 걸까? 요란한 Y2K 유행이 지나간 자리에 든 올드머니와 콰이어트 럭셔리 룩은 정적같이 차분해 대조가 선명하다. 그러나 유행은 돌고 도는 것이라, 이런 흐름이 낯설지는 않다. 2010년대 초반 지방시, HBA, 파이렉스 등이 이끈 스트리트 무드가 한바탕 휩쓴 직후에도 단순한 매력의 놈코어 트렌드가 찾아온 적 있었으니까. 자극적인 배달 음식을 연거푸 먹으면 담백한 집밥이 생각나지 않던가. 시시각각 바뀌는 유행을 좇다 지쳐버린 사람들이 쉬어 갈 템포를 찾아낸 것 아닐지! 대놓고 부자의 모습을 선망하는 올드머니 룩은 태생적으로 피상적·배금주의적 뉘앙스를 지니게 마련이다. 그래서 누군가에겐 ‘이런 유행이 괜찮은 건가?’ 의문을 품게 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위와 비슷한 심리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팬데믹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비롯, 예측 불가한 여러 사건과 사고를 겪어낸 사람들이 평온했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담긴 것. 국내외 정세에 따라 사회·경제·문화가 끊임없이 격동하고, 매일 미디어는 자극으로 꽉 채워지는 ‘도파민 중독’의 시대. 일상을 견디는 것만으로 급류를 헤친 듯한 피로가 어깨를 누르는 때다. 이런 때 올드머니와 콰이어트 럭셔리 룩이 좋아 보이는 건 어쩌면 ‘금수저’의 부 자체보다 그것으로부터 얻어지는 안온한 상태를 나타내는 상징성 때문일 것이다.
소리도 없이, 콰이어트 럭셔리
올드머니와 콰이어트 럭셔리 룩 아이콘들이 고수하는 조용한 럭셔리의 철칙은? 스타일은 드러내되, 로고는 숨길 것. 벌써 몇몇 브랜드가 떠오르지 않나? 에르메스, 로로피아나는 폭넓은 연령대를 아우르는 클래식 중의 클래식이다. 이들의 제품은 고가인 대신 대를 이어 사용할 수 있는 타임리스 디자인과 뛰어난 소재를 다 가졌다. 버킨·켈리 백 같은 에르메스의 백 시리즈는 물론 지지 하디드가 컬러별로 소장한 로로피아나의 엑스트라 포켓 파우치 백을 보라. ‘아는 사람은 아는’ 시그너처 스타일은 나타나도 로고를 드러내는 법은 좀처럼 없다. 약간의 로맨틱함을 더하고 싶다면 케이트, 가브리엘라 허스트, 알라이아를 주목할 것. 결이 고운 가죽에 주름을 잡거나 펀칭을 더하는 독창적인 방식으로 로맨틱 무드를 불어넣는다.
하이엔드 브랜드뿐 아니라 우리가 잘 아는 옷으로도 올드머니와 콰이어트 럭셔리 룩을 완성할 수 있다. 르메르, 질샌더, 더로우, 토템처럼 트렌드와 무관하게 꾸준히 사랑받아온 브랜드 말이다. 여기에 올드 셀린느의 히로인 피비 필로도 개인 브랜드를 론칭해 9월 중 화려하게 컴백할 예정. 르메르부터 올드 셀린느까지 국내에서 꾸준히 사랑받아온 브랜드들의 공통점은? 특유의 분위기와 담백한 미감을 지녔다는 것이다. 세상이 ‘힙’을 외치는 시기에도 기본에 충실한 디자인으로 직장인의 출근 룩이 돼줬으며, 저렴하지는 않아도 훌륭한 품질로 옷 입는 즐거움을 선사해왔다. 가성비와 플렉스라는 2가지 상반된 기준을 중시하는 국내 소비자를 사로잡은 이들이야말로 합리적인 럭셔리의 표본이다. 최근 유통가에서는 이렇게 소리 없이 강한 브랜드를 묶어 ‘신명품’이라고 부르며 더욱 주목하기도.
럭셔리라는 태도
올드머니와 콰이어트 럭셔리 룩에서 값비싼 물건이 빛을 발하는 건 필연적이다. 그러나 ‘진정한 럭셔리’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태도 역시 중요한 요소가 된다. 화려한 꾸밈새보다 잘 관리된 태도에서 풍기는 품위야말로 올드머니와 콰이어트 럭셔리 룩의 핵심인 ‘진정한 부내’를 완성하니까. 단편적으로는 피부부터 손끝까지 청결하게 관리하고, 옷과 액세서리를 몸에 맞게 수선해 관리하고, 어디서나 말쑥한 옷태와 바른 자세를 유지하는 것. 치장이나 과시보다는 정도를 지키는 절제감, 차분하고 교양 있는 말과 행동도 필수다. 이런 태도를 견지하기 위해 스스로 럭셔리와 삶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돌아보는 것도 좋다. 르메르의 디자이너 크리스토프 르메르는 한 인터뷰에서 럭셔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나를 둘러싼 물건과 내가 입는 옷을 통해 좋은 기분을 느끼는 것, (…) 결국 럭셔리는 삶의 질에 관한 것이다.” 단지 값나가는 것을 가져서가 아닌, 어떤 취향과 가치가 나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하는지에 대한 고찰이 전제된다면 모든 소비가 더 큰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가십걸〉 ‘릴리’ 역의 켈리 러더포드는 극 중에서도, 실제로도 에르메스 마니아로 잘 알려진 인물. 값비싼 에르메스 백을 산책할 때도, 잔뜩 장을 볼 때도 둘러메고 즐거운 일상을 보내는 그의 모습은 물건을 구매하고 가지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내가 만족할 만한 좋은 물건을 고르는 안목, 그리고 그 물건이 주는 기쁨을 오래도록 잘 누리는 방법. 이것이야말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든, 그렇지 않든 스스로에게 선물할 수 있는 중요한 덕목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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