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 더글러스 맥아더 소환할까?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 이종섭 국방부 장관이 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의원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
ⓒ 남소연 |
4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 출석한 이종섭 국방부 장관은 "육군사관학교에 맥아더·백선엽 장군 동상을 만들겠다는 계획이 기본적으로 없었다", "현재 계획은 없다"라고 발언했다. '기본적으로', '현재'라는 단서가 여운을 남기는 답변이다.
육사에 맥아더 흉상이 들어서면, 이 학교는 미국 육군사관학교의 분교로 전락할 수도 있다. 웨스트포인트의 한국 캠퍼스로 만들 계획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흉상이 육사에 세워지고 않고를 떠나, 맥아더는 윤석열 정권에 의해 앞으로 얼마든지 소환될 수 있는 존재다. 인천상륙작전의 주역이라는 점 말고, 그가 윤석열 정권의 국정운영 기조에 명분을 제공할 여지가 크기 때문이다. 맥아더와 이승만 사이의 일들을 살펴보면, 윤 정권이 맥아더를 얼마든지 활용할 가능성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친일세력의 지원으로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와해시켜 친일청산을 무산시켰으면서도, 일본에 대해서는 상당히 강경한 듯 보이는 태도를 견지했다. 하지만 그런 태도에는 한계가 있었다. 맥아더가 그어놓은 레드라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1950년 2월 16일 도쿄를 방문한 이승만은 다음날 일본군정 최고사령관인 맥아더와 회담을 가졌다. 맥아더가 이승만을 불러들인 목적은 이 회담에 대한 미국 언론의 과장된 보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해 2월 18일 자 <경향신문>에 실린 17일 자 AP통신 기사는 "동경으로부터 들어온 모 소식통 담(談)에 의하면, 방일 중의 이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 영도하에 있는 일본과의 반공동맹 체결을 제창하고 있다 한다"라고 전했다.
이승만이 한일동맹을 제창했다는 보도는 과장된 것이었다. 당시 <경향신문>에 실린 17일 자 AP통신 기사에 따르면, 이승만은 도쿄 도착 직후에 "성장하는 공산주의 팽창으로부터 일어나는 공통의 위험은 한국과 일본을 단결시켜야 하며, 과거의 적대관계는 망각되고 현재의 제(諸)곤란이 해결되어야 한다"고 발언했다.
맥아더의 한일동맹에 대한 애착
이승만은 현재의 모든 곤란을 해결하려면 한일 양국이 과거를 잊고 단결해야 한다고는 말했지만, 한일동맹에 대해서는 명확한 승인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그가 한일동맹을 제창했다는 보도가 해외에서 나온 것은 맥아더 측의 희망사항이 언론에 흘러나간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며칠 후인 21일 자 <경향신문>에 실린 도쿄발 UP 통신 기사는 맥아더가 한일동맹에 애착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국과 일본은 직접 동맹을 체결하지 않는다 하드라도, 중·소 동맹조약에 대한 반공진영 내부의 최초의 반향으로써 밀접한 협조를 할 것으로 보인다. 미 고관 측에 의하면,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전주(前週) 감람의 가지(화평의 상징)을 가지고 도일한 것은 냉전이 격화되는 경우 일본의 전(前) 적국들이 취할 태도라고 한다."
이 보도는 도쿄에서 나온 것이었으므로, 기사에 언급된 "미 고관 측"은 도쿄에 주재하는 맥아더 사령부의 당국자다. 따라서 보도에 언급된 미국의 의중은 다름 아닌 맥아더의 의중이다
이승만이 평화적 분위기를 연출하며 일본을 방문한 것은 일본의 옛 적국들이 일본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맥아더가 이승만을 도쿄로 불러들여 그런 분위기를 연출하게 한 것은 '일본과 손잡고 소련·중국에 맞서야 한다'는 메시지를 동맹국들에 표시하기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맥아더의 연출을 위해 이승만이 배우로 불려 갔던 것이다.
맥아더는 일본군을 재무장시키고 태평양동맹을 결성해 소련·중국에 대항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1949년 8월 10일 자 <경향신문> 기사 '태맹은 불가결, 맥 원수 중대 관심'에 실린 도쿄발 UP통신은 태맹으로 간칭되는 태평양동맹에 대해 맥아더가 "극히 찬동"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런데 맥아더는 한국과 일본을 동맹으로 묶는 일에는 관심을 기울였지만, 양국을 진정으로 화해시키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양국이 그때로부터 불과 몇 년 전인 1945년 이전의 식민지배를 과감히 잊어버리고 무조건 손잡기를 희망했다.
이승만-맥아더 회담 때 이승만이 기자들 앞에서 했던 발언이 있다. 1953년 1월 8일 자 <조선일보> 사설은 "전번 맥아더 장군 방문 당시"를 언급하면서 그 자리에서 이승만이 "한국과 일본 양국은 왕사(往事)를 용서하고 잊어버림으로써 양국을 위협하는 공산세력에 대항하여 결속하여야 한다"고 발언했다고 언급했다.
이승만이 한국인들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그렇게 발언한 것은 바로 옆에 맥아더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국이 과거사를 무조건 용서하고 잊어버리기를 바라는 맥아더와 미국 정부의 희망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기념식장에 참석한 맥아더 장군 맥아더 장군과 이승만 대통령. |
ⓒ 맥아더기념관 |
그해 9월 12일 자 <경향신문>에 실린 AP통신 기사는 "북한 방송은 최근 2차나 일본으로부터 미국인 및 일본인 장교의 군사위원단이 남한에 올 것이라고 방송"했다고 전했다. 동일한 내용이 같은 날 <조선일보>에는 '왜(倭)장교 초빙설'이라는 제목으로 보도됐다.
미국인 장교와 '왜국인 장교'가 "일본으로부터" 한국에 온다는 것은 맥아더 사령부가 파견한 미국인과 일본인 고문이 한국에 온다는 의미였다. 이런 내용이 두 차례나 북한에서 보도되자, 서울 주재 외국 기자가 이승만에게 확인을 요청했다. AP통신에 따르면, 그 자리에서 이승만은 이렇게 말했다.
"일본 장교를 남한 군대 훈련을 위하여 초빙하리라는 공산주의자의 보도는 명백하고 단순한 허설이다. 우리는 결코 일본 장교를 받아드리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을 맥아더 장군은 잘 알 것이다. 한국군은 현재 장교 결핍에 당면하고 있음은 사실이나, 일본 장교를 초빙할 만큼 결핍되지는 않는다."
세 번째 문장의 "사실을"이 <조선일보>에는 "이 사실을"로 표기돼 있다. 이승만은 외국기자 앞에서 북한 보도를 부인한 뒤 곧바로 맥아더를 거론했다. "이 사실을 맥아더 장군은 잘 알 것"이라며 일본군 장교가 필요 없다는 점을 재차 강조했다.
즉흥적으로 나온 것으로 보이는 이 답변은 이승만이 이 문제를 우려하고 있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북한 보도이므로 믿을 수 없다고 한 직후에, 맥아더를 거명하면서 '일본인 장교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거듭 강조했다. 맥아더 들으라는 식의 발언으로 보인다. 이승만과 맥아더 사이에 일본인 고문 파견에 관한 논의 혹은 논쟁이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시기 맥아더는 한국과 일본을 군사동맹으로 묶는 데 관심이 있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그가 일본인 군사고문 파견을 통해 양국 군대의 결속을 도모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윤 정부는 과거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않고 무조건 덮어버리는 가운데 한국과 일본의 군사동맹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런 일을 선구적으로 권유한 인물이 맥아더다. 한국인의 의식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맥아더가 그런 의지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은 윤 정권의 향후 행보에 명분이 될 여지가 있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윤석열 정권의 가려운 데를 긁어줄 수 있는 인물이다. 육사에 맥아더 흉상이 세워지고 않고를 떠나, 윤 정권이 맥아더 사례를 제시하며 한일동맹을 본격화하려 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존재한다. 홍범도 흉상으로 인한 논란의 와중에 불쑥 튀어나온 맥아더 흉상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그런 논란이 발생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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