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 최대 산유국의 '자기반성'... 우리와 얼마나 다른가
[김성호 기자]
2017년, 나는 유럽과 아시아를 오가는 상선에 몸을 싣고 있었다. 다른 자리에 서서 다른 풍경을 볼 때 비로소 다른 시선을 얻게 된다는 오랜 가르침을 나는 몸소 깨우치고 있었다. 수많은 광경, 이를테면 전속 항진하는 배의 선수를 먼저 지나치겠다 달려드는 수십 마리 돌고래 떼라거나 한가롭게 유영하며 푸우푸우 물을 뿜어대는 어미고래와 아이고래의 모습, 서울 하늘을 비좁게 여길 만큼 광대하게 펼쳐진 하늘 따위를 나는 보았었다.
사방 무엇도 없는 망망대해 가운데 가득 흩뿌려진 별빛을 올려다보면 어디까지가 내가 딛고 선 것이고 또 어디까지가 내가 이를 수 있는 곳인지가 헷갈릴 지경이 되고는 하였다. 이따금은 육지가 수백킬로미터는 더 떨어진 바다 가운데서 솟구치는 불길을 발견하고는 하였는데 선원들은 그것이 바다에 구멍을 뚫어 석유를 뽑아올리는 해양플랜트라 하였다.
그런 해양플랜트는 그야말로 곳곳에 있었다. 인도양과 아프리카 근해, 유럽에서까지도 수시로 해양플랜트를 마주했다.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 그 설비는 아래로 수백미터나 관을 뻗고, 그 관 안에서 길쭉한 드릴을 돌려 해저면에 구멍을 뚫는다고 했다. 그리고는 관으로 원유를 빨아올리니, 그렇게 뽑아낸 원유를 정제하여 우리는 에너지로 쓰고 있는 것이다.
▲ 더 버닝 씨 포스터 |
ⓒ (주)엣나인필름 |
노르웨이는 북해 북면 길게 뻗은 스칸디나비아 반도 동편의 국가다. 고도로 발전된 민주주의 국가이자 북유럽 5개국 가운데서도 가장 부유한 국가로 꼽히는 나라이기도 하다. 인구가 적고, 소득은 높으며, 천혜의 자연까지 보존한 이 나라를 세상 많은 이들이 부러워하는데, 그 근저에 활성화된 석유산업이 있다는 사실은 생각만큼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배를 타고 베르겐항 북쪽을 지날 때면 그야말로 수많은 석유플랜트를 볼 수가 있는데, 이것은 노르웨이가 자국 영토는 물론 영해에서까지 악착같이 석유를 시추해 팔아먹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노르웨이는 그렇게 세계 10위권 산유국이 되었고, 그로부터 벌어들인 비용으로 자국 경제를 부흥시키고 있는 것이다.
<더 버닝 씨>는 해양재난액션영화다.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노르웨이 영화로, 다름 아닌 석유시추 과정에서 발생한 대규모 석유유출사고를 다룬다. 이와 관련해서는 지난 2010년 멕시코만에서 발생한 '딥워터 호라이즌'호 폭발사고가 소환될 밖에 없는데, 부러진 시추파이프를 통해 7억 7860만L의 원유가 해수면으로 떠올라 광대한 기름막을 이룬 역사상 최악의 해난사고로 꼽히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해당 시설이 현대중공업이 설계해 제작한 해양플랜트였다는 점에서 한국에서도 관심을 모았던 이 사건은 2016년 영화로 제작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 더 버닝 씨 스틸컷 |
ⓒ (주)엣나인필름 |
<더 버닝 씨>는 해양플랜트를 통한 석유시추를 주된 산업으로 삼고 있는 노르웨이에서 만들어진 재난영화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지반침하로 무려 300개가 넘는 시추공이 부러져나간다는 설정으로부터 이야기를 풀어간다. 딥워터 호라이즌호 폭발이 단 한 개 시추공이 부러지면서 일어났다는 점을 돌아보면 이 영화가 다루는 재난의 규모가 어떠할지 짐작이 간다. 영화는 그 속에서 있을 법한 정부와 사업체, 노동자들의 대응을 긴박하게 그려낸다. 북유럽 사람 특유의 진중하며 합리적인 태도가 재난영화와 어우러져 독특한 감상을 자아낸다.
소피아(크리스틴 쿠야트 소프 분)는 유능한 엔지니어다. 해양탐사로봇을 개발하는 그녀에겐 일 년 쯤 된 연인이 있는데, 해양플랜트 노동자로 일하는 스티앙(헨리크 비엘란 분)이다. 그는 홀로 아들을 키우며 성실히 살아가는 사내로, 둘은 서로의 삶에 귀한 활력으로 자리한다.
불행은 한순간 덮쳐든다. 언제나처럼 해양로봇을 시험하던 소피아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온다. 수화기 너머의 사내는 석유시추업체 관계자로, 당장 로봇을 챙겨 해양플랜트로 가야한다고 말한다. 준비를 마친 소피아와 그녀의 동료에게 다가온 관계자는 그들 앞에 서류와 펜을 내민다. 다름아닌 비밀유지서약서, 둘은 재촉하는 관계자에게 떠밀려 서류에 서명을 하고 헬리콥터에 오른다.
▲ 더 버닝 씨 스틸컷 |
ⓒ (주)엣나인필름 |
도착한 현장은 참담하다. 해양플랜트는 바다 밑에 침몰해 있고 소피아에겐 침몰한 배 아래 생존자를 찾는 임무가 주어진다. 아직은 에어포켓이 남아 있으니, 로봇을 내려 보내 생존자를 찾아달라는 것이다. 신고하지 않고 저를 불러다 임무를 맡긴 저의가 의심스럽지만 급박한 상황에 따를 밖에 도리가 없다.
그로부터 이어지는 전개는 급박하기 짝이 없다. 지반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침하하고 그 사이로 가스가 새어 올라온다. 어느 한 곳이 아니라 넓게 퍼진 지반 전체가 침하할 수 있다는 위기가 감돈다. 그 지역에만 수백 대의 시추선이 떴고, 시추공은 350개에 달한다. 막대한 손실을 감당하며 사업을 중단할 것인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위기를 무시할 것인가, 그 앞에서 결단해야 하는 이의 어깨가 무겁게만 보인다.
사랑하는 이의 고립, 어떻게든 구해내려는 분투, 속수무책으로 다가오는 재난, 공권력이며 시스템의 무력함이 파도처럼 영화를 밀어 나간다. 북유럽의 정서 때문일까. 비슷한 류의 한국영화에서 흔히 발견되는 신파적 정서는 영화 내내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그럼에도 비어져 나오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마음이 재난 가운데 더욱 선명히 색을 발한다.
▲ 더 버닝 씨 스틸컷 |
ⓒ (주)엣나인필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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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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