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치 직전에 '제국신문' 문 닫아

김삼웅 2023. 9. 5.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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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인물열전 - 잊혀진 선각자, 묵암 이종일 평전 15]

[김삼웅 기자]

이종일은 68세의 생애에서 10여 년 이상을 언론활동을 해온 언론인이다. <제국신문> 뿐만 아니라 <만세보>, <대한협회보>, <천도교회월보> 등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고, 3.1혁명기에는 비밀지하신문 <조선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한말 민족수난기와 식민지 초기의 엄혹했던 시기에 그는 투철한 언론인으로서 책임과 시대적 소명에 모든 것을 바쳤다. 자신이 발행하는 신문 외에도 <대한협회보>, <대한자강회월보>, <천도교회월보> 등 민족주의 계열의 매체에도 논설을 집필하며 자주·자강을 역설하였다.

어두운 시기에 <제국신문>보다 조금 먼저 발행한 <황성신문>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민중계몽과 국정개혁, 외세의 이권침탈 등을 매섭게 질타했다. <황성신문>이 소수의 지식층을 상대로 한 데 비해 <제국신문>은 일반 서민과 여성들이 쉽게 접촉할 수 있는 한글신문으로 시종하였다. 그는 <제국신문>이 창간되고 3년, 1천일이 되는 날에 소회의 일단을 발표했다.

신문이란 것은 결국 인민을 위하여 발간하는 것인고로 외국사람들은 신문사에 무슨 재앙이 있어 결간이 난다던지 재정이 궁졸하여 정지될 경우를 당하게 되면 그 나라 유지한 친구들이 분발협력하여 자기의 일로 알고 재물을 보조해서 완구히 성립이 되게 하는데….(1901년 5월 4일자)

재정난이 가증되면서 시민들의 지원을 바랐다.
  
 이종일 선생이 창간한 <제국신문>
ⓒ 묵암 이종일 선생 기념사업회
 
<제국신문>은 수차례 걸쳐 공식적으로 사회 유지들의 의연금을 받았다. 예를 들면 휴간 중 창신사로부터 복간을 위한 기부금을 받았으며, 각 부인단체에서 복간을 위해 모금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또한 1908년 8월 18일에는 김가진을 비롯한 박은식·유근·김윤오· 유동열 등이<제국신문> 찬성회를 발기하여 <제국신문>을 적극 후원하기도 하였다. (주석 46) 

하지만 정부 관료들의 배척, 봉건 유생들의 공격과 성토, 일제의 탄압, 그리고 정부의 우편료 인상으로 신문의 지방 발송 비용을 크게 악화시켰다. 지방 관청에서 관찰사와 군수들이 잇따라 구독을 거절하였다. 이종일은 이와 관련 지방관들의 시대적 각성을 촉구하였다.

(…)본사에서는 지방 군청 경비의 궁색함을 잘 알고 신문을 한 장씩만 보내고 있으며 결코 이익을 얻고자 억지로 구독케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본사에서 지방 군청에 신문을 발송 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 본지는 국문으로 발행해서 우리나라의 자주독립 정신을 함양하고 있으며, 둘째, 본지가 <황성신문>과 함께 우리나라 신문계의 중추적 위치에 있음을 보이기 위함이다.

우리나라의 모든 관찰사와 군수들이여. 그저 월급이나 타 먹고 백성들 재물을 뺏던 낡은 시대의 꿈에서 깨라. 그럼으로써 조금이라도 나라와 백성을 위해 올바른 정사를 펴고 문명을 발전시켜 하루 빨리 국권을 회복하도록 힘써주기 바란다. 모든 지방관들이 신문을 바로 읽고 독립정신에 투철하며, 신문명과 세계정세를 알고 분발하면 국권회복에 큰 힘이 될 것이다. (주석 47) 

정부의 우표값 인상에도 강한 어조로 비판하였다.

첫째, 정부에서는 신문이 없을수록 편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관리의 일가 친척이 모두 지방관인데 거의가 선치는 안하고 학정을 하고 있으며 신문에서는 이들의 학정을 기사로 발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백성들이 신문을 읽어 정신이 개명될수록 멋대로 원 노릇을 하기가 힘들 것이며 자기들 마음대로 벼슬을 팔거나 땅을 팔아 협잡하는 일이 샅샅이 신문에 나면 전국민은 물론 외국까지 알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주석 48)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언론탄압에 철저했다. 일제는 반일민족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1907년 7월 24일 언론·출판의 자유를 금지하는 신문지법을 제정 공포했다. 그리고 사전검열을 통해 이를 통제하였다. 이종일은 1907년 2월 7일자에 검열에 걸린 기사를 삭제하지 않고 그대로 발행했다가 2일간 정간 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해제된 2월 10일자에서 이를 비판했다.

이번으로 동지가 세 번째 정간이며, 이는 우리나라 신문이 왜인에게 검열을 받는 연고요, 그 검열받는 연고는 우리나라에 권리가 없는 연고다.(…) 우리 동포로 말하여도 검열 받는 신문을 발간하여 무엇하느냐 하는 이가 있다 하나(…)국권 없는 것을 통분히 여길 것이요.

검열을 받고 무수 곤란을 당하여 가면서 미진 심력하는 신문사를 나무라지 말고 더욱더욱 각 신문을 많이 보아 지식을 늘려 가지고 국권회복하여 검열 받지 않고 신문을 하여 보기 힘쓸지어다. (주석 49)
  
 묵암 이종일 선생
ⓒ 묵암 이종일 선생 기념사업회
 
이종일은 1898년 『제국신문』을 창간한 이래 힘겨운 경영과 탄압 속에서도 끈질기에 명맥을 이어갔다. 그 사이에 점차 나라가 위기에 처하게 되고 일제의 검열은 더욱 옥죄었다. "창간 당시 신문의 구독료는 한 장에 4푼, 한 달 선금으로 엽전 6돈이었다. 구독료를 상대적으로 싸게 책정한 것은 좀 더 많은 독자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광고료는 1행에 6전을 받았다." (주석 50) 10여 년 동안 그는 이를 유지하였다.

그는 1907년 6월 7일 <제국신문> 운영 책임을 정운복에게 넘겼다가 다시 복귀하여 국치가 막바지에 달한 1910년 8월 2일 문을 닫았다. 10여 년 동안 격동기에 '암신문'이라는 일반 대중의 신문을 힘겹게 발행하다가 일제의 대한제국 병탄 직전에 스스로 폐간한 것이다.

주석
46> 박걸순, 앞의 책, 49쪽.
47> 『제국신문』, 1907년 4월 13일자.
48> 앞의 신문, 1899년 1월 19일자.
49> 앞의 신문, 1899년 1월 19일자.
50> 김민환,『한국언론사』, 125쪽, 사회비평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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