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모금]K 문학의 탄생…번역의 고민
편집자주 - 그 자체로 책 전체 내용을 함축하는 문장이 있는가 하면, 단숨에 독자의 마음에 가닿아 책과의 접점을 만드는 문장이 있습니다. 책에서 그런 유의미한 문장을 발췌해 소개합니다.
지난 수년간 한국문학의 세계적 위상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과거 세계에 한국 문학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면, 이제는 세계가 우리 문학을 알기 위해 노력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문학 작품 판권 거래 논의도 크게 증가했다. 이 과정에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데 번역가도 그중 한명이다. 단순한 의미 전달을 넘어 문학성을 바로 전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번역가들의 이야기. 하나의 번역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어떤 과정에서 고민하는지, 창조적 번역을 위해 무얼 노력하는지, 마주한 당면과제는 무엇인지 등을 책에 담았다. 한국 현대 시 번역의 최고 권위자 안선재와 한국 현대 소설 번역의 최고 권위자 브루스 풀턴을 비롯하여 조남주의 소설 '82년생 김지영' 등을 번역한 제이미 장, 김혜순의 시집 '한 잔의 붉은 거울' 등을 번역한 로렌 알빈과 배수현, 윤고은의 소설 '밤의 여행자들' 등을 번역한 리지 뷸러, 김이듬의 시집 '히스테리아' 등을 번역한 제이크 레빈 등 해외 주요 문학상 후보에 오르고 또 수상하며 한국문학을 세계에 알린 번역가들의 진솔하고 진지한 이야기를 전한다.
트라우마를 소설로 구성할 때의 어려움은 끔찍한 소재로부터 적절한 서사적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작가는 이를 위해 서사의 범위를 한 명의 경험에 국한하지 않고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모두의 경험으로 넓혔다. 또한 독자를 주인공의 ‘위안부’ 기억에만 의존하게 하지 않고, 주인공의 현재 시점에서 외부 환경이나 움직임을 계속 보여주면서 서사적 거리를 구축한다. … 작가는 ‘위안부’ 다수의 경험담을 주인공 안에 합쳐 넣었고, 주인공이 ‘위안소’를 회상할 때 세부 사항의 출처를 316개에 달하는 주석으로 제시했다.
‘회음부’는 일상뿐 아니라 시에서도 자주 쓰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 시인은 왜 그 말을 가지고 온 것일까? 그걸 그대로 옮겼을 때 도착어권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이 시를 읽고 그들이 느낄 생경함과 난처함이 전해졌다. 그렇다고 역자 마음대로 손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로 대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시인이 의도적으로 선택한 그 단어를 살리는 것이 한국 독자들이 원작을 읽고 느꼈던 그 낯선 분위기를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전문 번역가는 문학 작품이 독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충분히 알고 있다. 번역가 자신이 먼저 열린 마음의 열정적인 독자가 되는 것으로 작업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신경망 기계는 인간처럼 문학을 읽지도, 문학에 감동받지도 못한다. 그러니 독자의 마음을 무엇으로 어떻게 건드려야 하는지 훈련받을 수 없다. 나는 인간 번역가가 독자로서 하는 경험이 번역가 자신의 창조적 상상력과 결합했을 때, 기계 번역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질적 우위를 보여준다고 믿는다.
번역된 단어들은 자유롭고 창조적인 흐름에서 나오지 않는다. 읽고 또 읽으면서 이해하려 노력하고, 다른 언어의 단어와 문법을 사용해 (어쩔 수 없이 대부분 의미적 수준에서) 원작 시를 흉내 내고 재창조하는 힘겨운 타협의 결과물이다. 번역가는 원작자 시인이 아니다. 작업 결과물을 ‘번역’ 아닌 ‘편역’이라 부른다 해도 시인을 배신하고 자유로이 작업할 가능성은 주어지지 않는다. 위대한 시인이 누리는 위대함은 아무리 재능 있는 번역가라 해도 누릴 수 없는 종류의 위대함이다.
외국 문학을 한국어로 번역할 경우, 대부분의 진지한 번역자, 편집자, 출판사에서는 글의 흐름을 끊을 가능성을 무릅쓰고 각주를 붙이는 쪽을 선호한다. 번역·출판인이나 독자 모두 두 언어와 문화 사이의 다름을 존중하고, 상대방에게서 배우고 취할 점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영어권 출판계에서는 번역 문학에서 글의 흐름을 방해하는 각주는 금물이다. 의역이나 심지어 오역이 있더라도 영어로 잘 읽히는 쪽을 선택하는 편이다.
번역 또한 실험과 실패에 오랜 시간을 바쳐야 하는 일이다. 실험과 실패 작업으로 번역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쓸 만한 결과물이 나올지 아니면 결과물이 아예 없을지 알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실험과 실패에 상당한 시간을 써야 하는 번역 작업은 시 쓰기 작업과 형태는 다르다고 해도 꽤 비슷하게 느껴진다. 경제적 혹은 시장지향적 목표에서 자유로운 노동은 창의성에 대한, 예술 창작에 대한 자유로운 상상을 이끈다. 그저 이끌려서 번역하고 있노라 말하는 번역가들이 바로 그런 경우다.
K 문학의 탄생 | 조의연·이상빈·제이미 장·로렌 알빈·배수현 외 9명 | 416쪽 | 김영사 | 2만원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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