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SNS 계정 폭파뒤 후원 나섰다…이 명품의 남다른 행보 [더 하이엔드]
요즘 사진 기반의 소셜 미디어 인스타그램은 패션 업계 최대 홍보 채널이다. 새로운 컬렉션 발표나 브랜드 소식을 가장 빠르게 알리는 디지털 소통 창구 역할도 한다. 그런데 여기 더는 인스타그램을 운영하지 않는 브랜드가 있다. 지난 2021년 1월 모든 SNS 계정 폐쇄를 단행한 이탈리아 럭셔리 패션 브랜드 보테가 베네타다. 현재까지도 주요 명품 브랜드 가운데 인스타그램·트위터·페이스북 등 SNS 채널을 운영하지 않는 거의 유일한 브랜드다.
‘팬진’ 펴내고, 예술 잡지 창간 도와
당시 이에 대한 별다른 ‘입장 발표’를 하지 않았던 보테가 베네타는 약 2년 뒤 그에 대한 답을 내놓는 듯 브랜드의 이야기를 전하는 인쇄물 ‘팬진’을 만들어 매장에서 무료로 배포하고 있다. 2023 봄·여름 팬진에는 컬렉션의 제작과정이 수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마티유블라지의 오랜 동경의 대상이었던 모델 케이트 모스와의 캠페인 작업 과정이 실렸다.
많은 브랜드가 소셜 미디어 마케팅에 주력하는 상황에서, 보테가 베네타의 인쇄물 작업은 다소 고전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보테가 베네타가 장인들의 ‘수공’ 작업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진 브랜드라는 측면에선 꽤 어울리는 조합이다.
실제로 인쇄 매체인 잡지는 보테가 베네타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1972년 미국 뉴욕 매디슨가에 최초 매장을 열었을 당시 보테가 베네타는 앤디 워홀 등 뉴욕 예술가 커뮤니티와 빠르게 관계를 맺었다. 1978년에는 ‘당신의 이니셜만으로 충분할 때’라는 캠페인을 앤디 워홀이 창간한 전설적 잡지 ‘인터뷰(interview)’에서 시작했다.
지난 8월 보테가 베네타는 이런 ‘인터뷰’와 같은 문화 잡지를 계승하는 ‘마그마’의 창간을 도왔다. 예술가와 작가가 협업하고 공동 창작할 수 있는 실험의 장을 제공하는 데 목적을 둔 프랑스 예술 잡지다. 창간호에는 18명의 예술가와 80여개의 예술·문학 작품이 소개됐다. 앞서 6월에는 아프리카 재외 국민의 창의성을 위한 플랫폼인 ‘에어 아프리카’ 잡지의 창간을, 지난해 3월에는 약 10년 전 역사 속으로 사라진 성 소수자를 위한 문화지 ‘버트(BUTT)’의 귀환을 후원했다.
디지털 콘텐트가 아닌 손으로 만져지는 종이 매체의 물성은 보테가 베네타가 추구해온 장인 정신과 수공 기법을 상징한다. 보테가 베네타 측은 이런 잡지 후원의 의미에 대해 “소규모 출간물이 지닌 조용한 힘을 인식하고 있다”며 “잡지는 고품질의 디자인, 비전의 명확성과 독창성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한국 작가 강서경의 리움 전시 후원도
인쇄 매체 등 손으로 만든 것들에 대한 경의를 뚜렷하게 표현하고 있는 보테가 베네타는 예술 후원에도 남다른 움직임을 보인다. 특히 최근에는 미술 작가의 전시를 후원하고 댄스 비엔날레 등 예술 행사의 파트너십을 자처하는 등 광폭 행보를 보여 눈길을 끈다.
오는 7일부터는 서울 용산구 한남동 리움미술관에서 개최되는 강서경 작가의 ‘버들 북 꾀꼬리’의 전시 후원에 나선다. 국내 최대 아트 페어인 프리즈 서울 기간에 맞춰 열리는 이번 전시를 통해 강 작가의 작품을 전 세계에 소개하는 데 기여하겠다는 계획이다. 보테가 베네타는 이전에도 베네치아의 팔라초 그라시푼타 델라 도가나 미술관, 뉴욕 디아 비컨 미술관, 상파울루 리나 보 바르디 인스티튜트를 후원해왔다.
3년 전부터는 베네치아 댄스 비엔날레의 주요 파트너로 지원에 나서고 있다. 올해는 비엔날레 댄스 대학의 새로운 작품인 ‘내가 당신과 마주할 때’의 의상 작업에 참여했다. 지난 7월 비엔날레 댄스 대학 댄서들은 마티유블라지 보테가 베네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직접 디자인한 무대 의상을 입고 공연했다.
건축가가 만든 매장의 ‘동굴’
문화와 예술에 더 가까이 가려는 보테가 베네타의 움직임은 매장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 4월 보테가 베네타의 밀라노 몬테나폴레오네 플래그십 스토어(대표 매장)에 색다른 ‘동굴’이 설치됐다. 매장 전체를 가로지르는 몰입형 설치 작품으로, 마치 관람객이 동굴 속을 여행하는 듯한 독특한 경험을 선사했다.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예술가인 가에타노페세의 작품으로, 레진과 패브릭 등으로 구현된 실험적 작품이다.
동굴 안쪽에는 가에타노페세가 디자인하고 보테가 베네타가 구현한 한정판 핸드백 ‘마이디어 마운틴’ ‘마이디어 프레리’가 전시됐다. 매장에서 한정판으로 판매된 이 핸드백에 대해 페세는 “일출과 일몰을 배경으로 두 개의 산을 형상화한 가방”이라며 “비유적이며 소통할 수 있고, 이야기를 가진 미래의 디자인을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그동안 패션 브랜드의 예술계 지원 및 협업 앞에는 늘 ‘마케팅’이라는 꼬리표가 붙어왔다. 비슷한 소비자층을 공략한다는 목적이 부각되면서다. 하지만 최근에는 보테가 베네타 사례처럼 예술을 보다 가깝게 끌어들이려는 진지한 접근이 이어지고 있다. 더 이상 마케팅으로만 논하기에는 그 깊이와 범위가 넓고도 깊다는 평가도 나온다. ‘느리게 만든 귀한 것’을 추구하는 럭셔리 브랜드와 예술 분야의 동행은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유지연 기자 yoo.jiyo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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