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환·서경원 밀입북, 재야 영웅주의가 일을 악화시켰다”-김대중 육성 회고록〈17〉

고대훈, 강병철, 오욱진, 우수진 2023. 9. 5.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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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육성 회고록 〈17〉


서경원 평화민주당 의원의 밀입북 사건으로 공안 당국의 조사를 받기 위해 1989년 8월 서울 중부 경찰서에 들어가고 있다. 왼쪽부터 김옥두 비서실 차장, 한광옥 의원(총재 비서실장), 김대중 평민당 총재, 권노갑 의원, 박상천 의원.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1987년 12·16 대선에서 3김(김대중·김영삼·김종필)은 노태우 후보에게 졌다. 국민은 패배 원인을 양김(김대중·김영삼)에게 물었다.

자신들의 대권 욕망에 빠져 단일화를 외면하는 바람에 학생·시민의 희생과 투쟁으로 힘겹게 얻어낸 절호의 정권 교체 기회를 그르쳤다고 비판했다.

그래서 88년 4·26 총선이라는 대결전을 앞두고 야권 통합 여론을 외면할 수 없었다. 나, 김대중(DJ)은 기자간담회를 통해 공언했다.

“평화민주당(평민당, 총재 김대중)과 통일민주당(민주당, 총재 김영삼)·재야의 3자 대통합이 이뤄지면 나는 2선으로 물러나 통합된 당의 총선 승리를 위해 미력이나마 최선을 다하겠다.”

그런데 민주당에서 흡수 통합 방식을 고집했다. YS는 “야권은 정통 민주 세력인 민주당 중심으로 뭉치는 것이 역사의 순리”라며 평민당의 투항을 요구했다.

합당은 불발됐다. 총선도 대선처럼 ‘1여 3야’ 4파전이 됐다. 여당 민주정의당(민정당) 대 평민·민주·공화 세 야당이 맞붙게 됐다.

평민당의 제1 야당 부상

북한 김일성과 밀입북한 문익환 목사가 89년 3월 면담한 뒤 손을 맞잡고 나오고 있다. [중앙포토]

나는 전국구(비례대표) 후보 11번으로 나서 배수진을 쳤다. 평민당은 잘해야 지역구에서 30석 정도 얻을 것이라는 세간의 관측대로라면 국회 진입에 실패한다.

평민당 후보가 나온 지역은 밤잠을 안 자고 어디든 달려갔다. ‘김대중 바람’을 일으킨 덕분에 4·26 총선에서 70석을 확보함으로써 민주당(59석), 공화당(35석)을 따돌리고 제1 야당에 올라섰다. 전국구 16석을 차지해 나도 당선의 기쁨을 누렸다.

여당인 민정당은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했고, ‘여소야대’ 국회가 등장했다. 개인적으로는 72년 10월 유신 체제를 피해 일본에 망명하며 국회의원직을 잃은 지 16년 만에 국회 재입성이었다.

국회가 개원되자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진상 규명과 5공 청산이 이슈로 떠올랐다.

87년 민주화는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는 형식으로 이뤄진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었다. 5공 청산 문제도 타협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어떠한 정치 보복도 반대한다”는 전제 아래 “전두환 전 대통령의 진상 공개와 사죄”를 타협 조건으로 제시했다.

재야에서 ‘전두환·이순자 구속 처단 운동본부’를 만들고 참여를 요청했으나 거절했다. 보복보다 제도와 법률을 통해 민주화를 일궈내야 한다는 게 나의 신조다.

그래서 전두환과 신군부의 죄상을 국회 청문회에서 밝히고, 국민에게 알리려 했다. 5공 청산은 88년 11월 전두환의 백담사 유배와 5공·광주 청문회 증언대에 세우는 것으로 매듭지었다.

노태우의 중간평가 족쇄 풀어줘

서경원 평화민주당 의원이 89년 6월 공안 당국에 체포돼 구속 수감되는 장면. 앞선 88년 8월 밀입북한 혐의로 수사를 받게 됐다. [중앙포토]

89년에 접어들자 노태우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던 중간평가가 쟁점으로 부상했다. 당선을 위해 한 말이 족쇄가 됐다. 야 3당은 중간평가를 5년 임기 중 2년은 하고 난 뒤 해야지, 1년밖에 안 된 상황에서 할 수 없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런데 민주당의 YS가 중간평가를 하자고 느닷없이 들고 나왔다. 제1 야당 자리를 빼앗긴 YS가 판을 흔들고 싶었던 것이다.

나와 YS는 민심을 물어야 했다. 평민당은 경기도 부천에서, 민주당은 충남 온양에서 중간평가를 놓고 각각 장외집회를 열었다. 청와대는 집회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우리는 “시기상조”를, 민주당은 “약속이행”을 각각 내걸었다. 우리 집회에는 시민 1만 명 이상이 모여 동조했다. 반면에 민주당 온양 집회에는 1000~2000명에 불과했다.

부천과 온양에서 민심을 읽은 노 대통령은 자신감을 얻고 중간평가 백지화를 선언했다. 나와 우리 평민당이 족쇄를 풀어준 셈이었다.

탄압 빌미 제공한 문익환 방북

중간평가 문제가 해소되고 정국이 안정되는가 싶더니 큰 소동이 벌어졌다. 나는 3월 16일 청와대 뒤 올림피아호텔에서 문익환 목사와 문동환 의원 형제를 만났다.

앞서 88년 7월 7일 노태우 대통령은 남북 동포의 상호 교류, 남북 간 대결 외교 종결 등을 담은 ‘7·7 선언’을 했다.

(문익환): “북한에 갔다 오겠네.”

(DJ): “정부 허가를 받고 가십니까?”

(문익환): “허가는 안 받았는데….”

(DJ): “법에 걸리는데 어떻게 하시려고요?”

(문익환): “그래도 가겠네. 저들이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

(DJ): “목사님, 북한에 갔다 오면 구속됩니다.”

(문익환): “노태우가 갔다 오라 하지 않았나?”

(DJ): “민주화운동 하는 사람들이 탄압받습니다. 국민 여론도 그렇고, 민주화운동이 침체 상태로 들어갈 겁니다.”

‘구속, 탄압, 침체’를 걱정하는 나의 조언을 문 목사는 듣지 않았다. 열흘 뒤인 3월 25일 TV를 보고 있었는데 문 목사가 북한 김일성과 회담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문 목사는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초청을 받고 정부의 허가 없이 평양을 방문했다.

김일성과 만나고 “7·4 남북공동성명에서 확인된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에 기초해 통일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문 목사는 실정법을 어겼다. 10일간의 방북 일정을 마치고 귀환한 뒤 곧바로 구속됐다. 국가보안법상 찬양고무 등의 혐의였다. 예상대로 거센 후폭풍이 불었다.

정부는 “좌경 성향의 반(反)국가단체를 뿌리 뽑는다”며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등 재야 단체와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에 나섰다.

문 목사의 순수한 열정이었지만, 이재오·이부영 등이 대거 구속되는 탄압의 빌미를 제공했다.

DJ 정치생명을 끊으려는 공안 바람

김경진 기자

6월 어느 날 김원기 원내총무가 나를 찾았다.

(김원기): “이상한 말이 떠돌고 있습니다.”

(DJ): “무슨 얘기인가?”

(김원기): “우리 당 서경원 의원이 북한에 갔다 왔다고 그럽니다.”

(DJ): “에이, 가기는 뭘 가. 김 총무, 혹시 사전에 그런 말 들은 일 있는가?”

(김원기):“저도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

(DJ): “그럼 헛소문이겠지.”

낭설이라고 무시해 버렸다. 그런데 며칠 뒤 다급하게 찾아온 김 총무의 보고를 듣고 깜짝 놀랐다.

(김원기): “오늘 서경원 의원을 만났는데 북한에 다녀왔다고 합니다.”

(DJ): “서 의원을 당장 불러 박세직 안기부장에게 인계하시오. 당도 생각 안 하고, 국민 여론도 생각 안 한 행동이네.”

공안당국은 6월 27일 ‘서경원 의원 밀입북 사건’을 터뜨렸다. 서 의원이 1년 전인 88년 8월 체코 프라하에서 평양으로 들어가 머물며 김일성과 면담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구속된 서 의원을 상대로 나의 연루 여부를 추궁했다.

모진 고문을 가해 서 의원이 나에게 보고한 뒤 북한에 다녀왔고, 북한에서 받은 돈 중 1만 달러를 나에게 줬다는 허위 사실을 날조했다. 제1 야당 총재인 나를 용공 혐의로 엮어 정치생명을 끊으려는 저열한 수작이었다.

나는 서울 중부경찰서에서 심야 조사를 받았지만 증거가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서 의원으로부터 방북 사실을 미리 보고받아 알고도 당국에 고지하지 않았다’는 국가보안법상 불고지죄(不告知罪)로 불구속기소 했다.

그나마 재판에서 서 의원이 고문에 의한 허위 진술이라 밝힌 뒤 공소는 취소됐다. 이것이 내가 서경원 밀입국에 개입했다는 의혹의 실체였다.

재야 시민운동 쪽에 할 말이 있다. 그들은 원칙을 얘기하지만, 정치는 원칙을 지키면서 현실에 입각해 행동해야 한다.

영웅주의적 생각으로 하면 일을 악화시킨다. 나는 민주화 과정에서 투쟁도 했지만, 과속을 견제하고 통제하는 데 나름의 역할을 했다고 자부한다.

DJ 뺀 그들만의 ‘3당 합당’ 전조

공안 정국을 계기로 노태우 대통령을 괘씸하게 보게 됐다. 내가 중간평가 문제로 난처한 처지에 몰리던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대통령직에서 쫓겨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안기부를 시켜 나에게 없는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공작을 폈다. 나를 제거하려는 저열한 음모였다.

공안 정국의 소용돌이 속에 민주당과 공화당의 도움은 없었다. 나와 평민당만 당했다. 이는 90년 새해 벽두에 터진 민정당·민주당·공화당 그들만의 ‘3당 합당’의 전조였던 셈이다.

※ 더중앙플러스에서 연재 중인 김대중 육성 회고록 전문(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80321)을 보실 수 있습니다.

18회 〈3당 합당의 전말〉이 이어집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고대훈·강병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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