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수 석방” 한·중·일 이민자가 함께 외쳤던 이유는
1973년 미국 샌프랜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중국인 갱 살해 누명을 쓰고 체포된 한인 청년 이철수씨. 당시 21세 이씨는 동양인 외모 구분을 못 하는 백인 목격자들의 허술한 증언으로 범인에 몰렸다. 차이나타운 검거 실적에 혈안이 된 현지 경찰은 얼렁뚱땅 수사를 마무리했다. 교도소에 수감된 이씨는 백인우월주의 죄수에게 맞서다 그를 살해한다. 정당방위를 주장했지만, 법원은 재범의 가중죄로 사형을 선고한다.
그대로 묻힐 뻔한 사건은 당시 미국 주류 언론 최초 한인 기자였던 이경원 새크라멘토 유니온 기자의 취재로 알려졌다. 미국 사법체계와 사회 시스템의 인종차별적인 무지·무신경함이 낳은 사회적 참사였다. 한인 교포 사회, 종교계를 거쳐 아시아 공동체에서 구명 운동이 시작됐다. 한복 차림 할머니부터 청바지 입은 대학생까지 ‘프리 철수 리(Free, Chol Soo Lee·이철수를 석방하라)’를 적은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1970~80년대 미국 내 불평등·차별에 맞서 한·중·일 이민자들이 드물게 뭉친, 아시아 이민자들의 대표적 저항운동으로 기록됐다.
그러나 이후 40년간 ‘이철수’란 이름은 빠르게 잊혀졌다. 유명 인권변호사들까지 힘을 보태 1983년 마침내 석방됐던 청년은 2014년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오랜 방황 끝에 갱단 사주로 자신이 저지른 방화 사건 때 입은 화상 흉터를 간직한 채였다.
그간 잘 알려지지 않은 이철수씨의 석방 이후를 담은 다큐멘터리 ‘프리 철수 리’가 10월 18일 개봉한다. 지난해 초 미국 선댄스영화제에서 최초 공개돼 “정의의 실패가 남은 생애에 어떻게 파문을 일으켰는지 보여줬다”(뉴욕타임스), “지지자·친구들의 인터뷰와 기록 영상을 능숙하게 엮어내 이씨의 복잡한 초상화를 흔들림 없이 구현했다”(할리우드 리포터) 등의 호평을 받은 데 이어서다.
공동 연출을 맡은 재미교포 하줄리(51)·이성민(47) 감독은 기자 출신으로 장편 다큐는 이번이 첫 도전이다. 전날 내한한 두 사람을 4일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에서 만났다.
이철수 보도로 퓰리처상 후보에 오른 후에도 이씨의 사회적 아버지 역할을 한 이경원 기자는 하 감독의 언론계 스승이자 멘토다. 하 감독은 2014년 이씨 장례식 때 그가 비통해하는 모습을 보며 ‘프리 철수 리’ 운동을 기록하기로 결심했다.
하 감독과 한인 잡지 ‘코리암’(2015년 폐간)에서 함께 일했던 이 감독은 “‘프리 철수 리’처럼 역사적이고 중요한 운동을 어떤 공적 교육 시스템에서도 배운 적 없다는 게 놀라웠다”고 했다.
이씨는 1952년 한국전쟁 중 혼외자로 태어나 친척집에 맡겨졌다. 다큐 속 지인 증언에 따르면, 어머니가 성폭행 당해 낳은 아이였다. 미군과 결혼한 어머니를 따라 12살에 미국에 갔지만 한국인이라곤 없는 샌프란시스코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 했다. 교장에게 대들다 소년원에 갔고 짧은 영어 탓에 오해 받아 정신병원까지 다녀왔다. 먹고 살기 위해 클럽 호객꾼 등을 전전하며 목적 없이 살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겐 상냥하고 조용했다. 구명운동에 앞장선 유재건 변호사, 이경원 기자 등이 사회로 돌아온 후까지 그의 곁을 지켰다.
그러나 교도소 시절의 그림자는 가시지 않았다. 이씨는 출소하자마자 유명세에 시달렸고, 평범한 직장생활에 익숙해지지 못했다. 술·마약에 찌들다 결국 범죄에 손을 댔다. 마음을 다잡고 강연 활동 등을 했지만, 위장 질환에 걸린 뒤 수술을 거부하고 숨을 거뒀다.
그는 세상이 원한 ‘피해자다움’과 거리가 멀었다. “나는 천사가 아닙니다. 그러나 악마도 아닙니다.” 생전 언론 인터뷰에서 그가 토해낸 고백이다.
다큐에 나온 자료들은 모두 한인·아시아 공동체에서 얻었다. 이성민 감독은 “미국에서 소수 인종에 관한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사회적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라며 “1983년부터 수년간 이씨를 인터뷰한 방송기자 산드라 진의 자료에 특히 신세를 많이 졌다”고 했다. 이씨의 생전 메모 및 발표문, 이경원 기자와의 육성 인터뷰 음원 등을 활용했다. 이씨가 말년에 초안을 쓴 자서전 『정의 없는 자유(Freedom Without Justice)』도 그의 사후 출간됐다.
하 감독은 이철수 사건을 재조명한 의미를 이렇게 짚었다. “지금 시대에도 또 다른 ‘이철수’들이 존재한다는 걸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도 미혼모·입양아·새터민·이민자·재소자 같은 사람들이 그럴 수 있죠. 우리가 이런 다른 버전의 ‘이철수’들을 껴안고 이해하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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