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씨름'이 이렇게 감동적일 줄 몰랐습니다

하성태 2023. 9. 4.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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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작가의 이야기 따라잡기 시즌2] 다큐 <모래바람> , 극장 개봉 위해 배급사 찾는다

[하성태 기자]

 
 영화 <모래바람>의 한 장면.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어느새 매주 챙겨보는 유일한 예능이 SBS <골때리는 그녀들>(이하 골때녀)이 됐다. 3년 전이었나. 명절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편성된 2부작을 우연찮게 보고선 '이건 뜬다'란 직감이 왔다. 국내외로 여자 축구 붐이 일은지 오래라지만 연예인 여성들이 풋살에 진심을 다하고 그걸 예능식 편집으로 잡아낸 형식이 예사로워 보이지 않았다.

이후 선수들 간 실력 차가 뚜렷했던 1시즌은 쉬이 즐기기 어려웠지만 이후 선수들의 실력이 조금씩 성장하거나 군계일학인 에이스들의 활약을 보는 맛이 상상 이상이었다. 개인적으로 응원하는 팀이 생길 정도였고, 시청자들도 마찬가지인 듯싶었다. 올해 들어 시청자들을 직접 초대한 올스타전에 쏟아진 열광을 보면 말이다. 그렇게 '골때녀'는 여성 스포츠 예능의 선두주자로 안착했다.

결국 여성 성장 서사에 방점이 찍힌다. 개개인의 노력은 기본이지만 낯선 스포츠의 세계에 발을 내디딘 여성들이 어떻게 실력을 키워가고 성장해 나가느냐를 끈기 있게 조명하는 것. 그 진심이 카메라 너머 시청자들에게 전달될 때 젠더의 차이는 한낱 성별의 차이로 전락한다는 사실을 많은 이들이 체감하고 공감하는 시대다. 부지불식간에 혹은 어느 순간 진지하게 '스포츠에 진심'이 된 이들의 땀과 눈물을 마주하는 일은 언제나 감동적이니까.

우연하게도, 명절에 본 TV가 화근(?)이 됐다고 했다. 연출과는 동떨어진 영화 일을 하던 박재민 감독은 명절에 홀로 브라운관을 통해 마주한 여자 씨름 선수들의 모습이 어딘가 낯선 데 멋있어서 더 호기심과 궁금증을 자아냈다고 한다. 그 길로 다큐멘터리 제작 수업을 들으며 칼을 갈고 닦았다. 여자 씨름 선수들을 직접 카메라에 담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7년이 흘렀다. 제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이어 최근 제25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 연이어 선보인 다큐멘터리 <모래바람>이 관객들을 찾아 왔다. '콜텍' 출신 5명의 전현직 여자 씨름선수가 주인공인 전무후무한 이 작품은 여성 스포츠 선수의 성장 서사라는 어떤 전형을 늠름하고 성취해내면서 남다른 감동을 준다.

여자 씨름의 레전드와 동료들의 '시스터 후드' 
 
 다큐 <모래바람>의 한 장면.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여기 '여자 이만기'라 불리는 씨름선수가 있다. 한때 그를 이길 상대 선수가 없었다. 올해까지 총 18시즌 째 출전하며 통산 97번 우승했다. 2016년 대한씨름협회와 통합되기 이전 전국 대회 등을 합산한 기록이다. 2006년부터 생활 체육인으로 여자씨름의 전설이 됐고, 통합 이후 엘리트 체육인이 됐어도 그 전설은 깨지기 힘들었다.

전 콜텍, 현 영동군청 소속 임수정이 그 전설의 여자씨름 선수다. 임수정은 통합 이후 본인 체급인 국화급(70kg 이하)에서 통산 21번 우승했고, 천하장사도 2009년을 시작으로 총 3번을 차지했다. 통합 이전까지 포함하면 천하장사만 통산 8회다. 불혹을 앞둔 나이 임에도 지난 6월 2023 강릉단오장사씨름대회 국화급 장사를 거머쥐었다. 전설은 전설이다. 남자씨름의 들러리라 여겨졌던 여자씨름을 견인한 장본인인 답다.

<모래바람>의 중심에도 임수정 선수가 있다. 영화는 콜텍에서 함께 샅바를 잡았던 임수정, 송송화, 최희화, 김다혜, 양윤서 다섯 선수의 5년여를 카메라에 담았는데, 전설과 같은 팀에서 뛰는 선수들의 응원과 경쟁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누구는 간판 임수정이 이끌었던 콜텍에서 은퇴를 하고 또 누구는 헤어지는 와중에도 임수정을 의식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의 일상은 훈련 또 훈련이다. 대개 운동선수들이 그러하듯, 쉬는 와중에도 씨름 얘기에 매진하고 몸만들기에 주력한다.

씨름의 문외한이던 박재민 감독은 경기가 끝나고 여자 선수들이 서로를 일으켜주는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남자 선수들 경기에서 볼 수 없는 광경이다. 남자씨름이 전부라 여기는 통념에 대한 반발이나 비인기종목의 설움에서 비롯된 의식적인 행동이 아니다. 경쟁을 넘어 여자씨름의 발전이란 공통의 목표를 향해 가는 이들의 어떤 몸에 밴 연대의식, 즉 '시스터후드(자매애)'가 그런 작은 행동에 배어 나오는 것이라고 박재민 감독은 말한다.

그런 공통의 목표를 향해 인생의 방향마저 바꾼 이가 송송화 선수다. 여자 씨름계의 레전드인 송송화 선수는 뒤늦은 나이에 씨름에 뛰어들었고, 두각을 나타내는 와중에 엄마와 며느리로서의 삶을 병행했다. 2018년 10월 은퇴 이후에도 씨름 자체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고 후배들을 위해 동분서주 중이다.

그런 장년이자 거구의 여성이 씨름을 계속하고 싶다는 속내를 드러내며 카메라 앞에서 눈물을 지을 때, 그건 두 가지 서사를 동시에 품어 안는 주요한 장면으로 자리매김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몸과 싸워나갈 수밖에 없는 스포츠 인들의 숙명이 한 쪽의 서사요, 평생 몸담고 싶은 씨름을 그만둬야 하는 특이한 이력을 지닌 여성 씨름선수의 애환이 다른 쪽 서사다.

<모래바람>의 카메라가 여자씨름 선수들의 애환을 정직하게 담아내는 건 예정된 수순일 터. 나이가 나이인지라 명절 모임이 좌불안석인 임수정 선수 역시 육체적 한계와 싸우고 후배들과 경쟁하는 와중에 곧 당도할 예정된 미래에 대한 불안을 감출 수는 없어 보인다. 송송화와 임수정이 묘하게 겹치는 지점이다.

이처럼 <모래바람>은 자매들의 연대나 젠더 이슈, 비인기 종목에 대한 관심과 여러 화두를 품어 안는 동시에 임수정을 필두로 선수 개인의 고민을 자연스레 녹이며 대상에 대한 애정을 관객들에게 아낌없이 전이시킨다.

<모래바람>의 극장 개봉을 지지하며
 
 영화 <모래바람>의 속 임수정 선수.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지난 2021년부터 2022년까지 1년여 가까이 방영된 E채널 <노는 언니>를 종종 봤다. 맏언니 박세리가 스포츠계 후배들과 함께 그야말로 '노는' 예능인데, 여러 여성 스포츠인들을 방송에 소개하는 산파(?) 역할을 자처했더랬다. <모래바람>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양윤서도 <노는 언니>에 출연해 남다른 예능감을 뽐냈었다.

임수정의 '절친'으로 알려진 양윤서는 2019년까지 콜핑 소속에서 구례군청반달곰씨름단을 거쳐 현재 영동군청에서 활약 중이다. 지난 3월엔 양윤서와 임수정이 '제53회 회장기전국장사씨름대회'에서 나란히 우승해 눈길을 끌었다.

지난 7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최초로 공개된 <모래바람> 상영 당시 양윤서와 임수정, 송송화 등 선수들이 박재민 감독과 나란히 무대인사에 나섰었다. 인상적인 건 씩씩할 것 만 같던 선수들이 자꾸 울컥하며 눈물을 보이는 모습이었다.

이들 선수들은 여자씨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호소하기도 했고, 자신의 예능감과 유머감각을 자랑하기도 했으며, 후배들을 위해 협회를 이끌겠다는 각오를 다짐하기도 했다. 임수정 선수가 97번째 우승 트로피를 거머쥔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무엇보다 부천의 한 극장 안엔 여자씨름 경기장만 쫓아다닌다는 열혈 팬도 함께하고 있었다.

여자씨름을 소재로 한 첫 번째 장편 다큐 <모래바람>의 가치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박재민 감독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극장 개봉을 위해 배급사를 찾고 있다고 했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상영 때나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상영을 마친 지금이나 여자씨름 팬들과 관객들에게 데뷔작을 선보이기 위해 역시나 동분서주 중인 듯 보인다.

<모래바람>은 예능 <골때리는 그녀들>이나 <노는 언니>가 줄 수 없는 감동과 보편성, 쉬이 만날 수 없는 여성 서사를 탑재한 귀하면서도 재미 요소로 넘쳐나는 진귀한 다큐다. 임수정 선수가 언제 100번째 우승이란 진기록을 세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이전에 <모래바람>이 극장에서 관객들과 만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제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월드프리미어 상영 당시 박재민 감독과 여자씨름선수들.
ⓒ 하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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