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인 구분 못한 백인의 증언…살인자 된 韓청년 10년 옥살이

나원정 2023. 9. 4.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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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프리 철수 리' 내달 개봉
재미교포 하줄리·이성민 감독
인종차별적 미국 경찰의 수사 속에 살인 누명을 쓰고 10년 옥살이한 이철수씨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프리 철수 리'. 공동 연출한 하줄리(왼쪽) 감독과 이성민 감독을 4일 서울 상암 중앙일보에서 만났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1973년 미국 샌프랜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중국인 갱 살해 누명을 쓰고 체포된 한인 청년 이철수씨. 당시 21세 이씨는 동양인 외모 구분을 못 하는 백인 목격자들의 허술한 증언으로 범인에 몰렸다. “금방 풀릴 줄 알았던 단순한 오해”(이철수)는 이후 10년에 달하는 옥살이로 이어졌다. 차이나타운 검거 실적에 혈안이 된 현지 경찰이 한국인인 그를 “중국인”이라 지칭하며 빈약한 근거만 갖고 얼렁뚱땅 수사를 마무리했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거친 교도소에 수감된 이씨는 백인우월주의 죄수에게 맞서다 그를 살해한다. 정당방위를 주장했지만, 법원은 재범의 가중죄로 사형을 선고한다.
그대로 묻힐 뻔한 사건은 당시 미국 주류 언론 최초 한인 기자였던 이경원 새크라멘토 유니온 기자의 취재로 알려졌다. 미국 사법체계와 사회 시스템의 인종차별적인 무지‧무신경함이 낳은 사회적 참사였다. 한인 교포 사회, 종교계를 거쳐 아시아 공동체에 미국 재판부의 재심을 요구하는 구명 운동이 들불처럼 번졌다. 한복저고리 차림 할머니부터 청바지 입은 대학생까지 ‘프리 철 수 리(Free, Chol Soo Lee‧이철수를 석방하라)’라 적은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1970~80년대 미국 내 불평등‧차별에 맞서 한·중·일 이민자들이 드물게 뭉친, 아시아 이민자들의 대표적 저항운동으로 기록됐다.


저항 상징 이철수, 왜 잊혀졌나


1973년 미국 샌프랜시스코에서 살인 누명을 쓰고 10년간 옥살이를 한 재미교포 이철수씨에 관한 다큐멘터리 '프리 철수 리'가 10월 18일 개봉한다. 사진 커넥트픽쳐스
그러나 이후 40년간 ‘이철수’란 이름은 빠르게 잊혀졌다. 유명 인권변호사들까지 힘을 보태 1983년 마침내 석방되며 선량한 미소로 감사를 전했던 청년은 2014년 62세의 나이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오랜 방황 끝에 갱단 사주로 자신이 저지른 방화 사건 때 입은 극심한 화상 흉터를 간직한 채였다. 그 사이 그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간 잘 알려지지 않은 이철수씨의 석방 이후를 담은 다큐멘터리 ‘프리 철수 리’가 10월 18일 개봉한다. 지난해 초 미국 선댄스영화제에서 최초 공개돼 “정의의 실패가 남은 생애에 어떻게 파문을 일으켰는지 보여줬다”(뉴욕타임스), “지지자‧친구들의 인터뷰와 기록 영상을 능숙하게 엮어내 이씨의 복잡한 초상화를 흔들림 없이 구현했다”(할리우드 리포터) 등의 호평을 받은 데 이어서다. 지난해 8월 미국 개봉 때 타임지는 이를 계기로 코로나19 팬데믹 후 증가해온 미국 내 아시아인 혐오 폭력의 뿌리 깊은 역사를 되짚기도 했다.
공동 연출을 맡은 재미교포 하줄리(51)‧이성민(47) 감독은 기자 출신으로 장편 다큐는 이번이 첫 도전이다. 전날 내한한 두 사람을 4일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에서 만났다.
이철수 보도로 퓰리처상 후보에 오른 후에도 이씨의 사회적 아버지 역할을 자처해온 이경원 기자는 하 감독의 언론계 스승이자 멘토다. 하 감독은 2014년 이씨 장례식 때 그가 비통해하는 모습을 보며 ‘프리 철수 리’ 운동을 기록하기로 결심했다. “처음엔 사회적 정의를 되찾고 운동을 만들어낸 기자의 역할이 놀라웠지만, 이후 이씨 사건의 복잡하고 어두운 이면을 알게 됐죠. 그가 자신의 전체 인생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어떻게 할 지에 집중하며 다큐를 만들기로 했죠.”

한국전쟁 혼외자, 엄마 따라 미국 갔지만


1984년 석방 이후 모습. 왼쪽은 살인누명을쓰고 갇혀있던 이철수씨의 석방을 도운 미국 세크라멘토 유니언지 기자다. 당시 구명 운동은 한국에서도 언론에 보도되며 코미이언 이주일 등 연예인, 정치인들이 후원금을 보내기도 했다. [중앙포토]
하 감독과 한인 잡지 ‘코리암’(2015년 폐간)에서 함께 일했고, 뉴욕타임스 등에서 영상 작업, 단편 영화를 만들기도 한 동료 이 감독이 그와 의기투합했다. 이 감독은 “‘프리 철수 리’처럼 역사적이고 중요한 운동을 학교나 어떤 공적 교육 시스템에서도 배운 적 없다는 게 놀라웠다”면서 “제 부모님도 ‘오래 전 일이다. 너무 오래 그 일에 매여 있지 말라’고 하셨다. 이철수씨가 석방 후 범죄 사건에 연루된 부분을 신경 쓴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부모 세대에서도, 이민자 문화 관련 연구기관에서도 이철수 사건이 잘 언급되지 않았던 이유다.
이씨는 1952년 한국전쟁 중 혼외자로 태어나 친척집에 맡겨졌다. 다큐 속 지인 증언에 따르면, 어머니가 성폭행 당해 낳은 아이였다. 모친의 사랑보단 미움이 컸다.
미군과 결혼한 어머니를 따라 12살에 미국에 갔지만 한국인이라곤 없는 샌프란시스코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 했다. 교장에게 대들다 소년원에 갔고 짧은 영어 탓에 오해 받아 정신병원까지 다녀왔다.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의 유일한 ‘한국 남자’였다. 먹고 살기 위해 클럽 호객꾼 등을 전전하며 목적 없이 살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겐 상냥하고 조용했다. 10대 시절 친구이자 그의 구명 과정에서 변호사의 길까지 걷게 된 재미 일본인 랑코 야마다도 그렇게 돌이켰다. 구명운동에 앞장선 유재건 변호사, 이경원 기자 등이 사회로 돌아온 후까지 그의 곁을 지켰다.

"나는 천사가 아닙니다. 악마도 아닙니다"


이철수씨 재심 요구 및 구명 운동이 벌어진 1980년대 그의 재판이 이뤄진 법정 주변엔 국적과 세대를 넘은 피켓을 운동가들이 수백명씩 몰려들었다. 사진 커넥트픽쳐스
그러나 아무런 교육도 못 받은 채 무수히 자살을 떠올렸던 교도소 시절의 그림자는 가시지 않았다. 이씨는 출소 하자마자 유명세에 시달렸다. 집에 돌아오면 혼자였다. 어머니와 불화는 뿌리 깊었다. 평범한 직장생활에 익숙해지지 못하고 술‧마약에 찌들다 결국 범죄에 다시 손을 댔다. 화상을 입은 뒤 마음을 다잡고 선한 영향력을 전파하는 강연 활동 등을 했지만, 위장 질환이 찾아오자 수술을 거부했다. 그렇게 마지막 숨을 거뒀다.
그는 세상이 원한 ‘피해자다움’과 거리가 멀었다. 평생 그런 부담감에 살았다고 한다. “나는 천사가 아닙니다. 그러나 악마도 아닙니다.” 생전 언론 인터뷰에서 그가 토해낸 고백이다.
다큐에 나온 자료들은 모두 한인‧아시아 공동체에서 얻었다. 이성민 감독은 “미국에서 소수 인종에 관한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사회적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라며 “그럼에도 우리 둘 다 기자 경험 덕에 여러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다. 1983년부터 수년간 이씨를 인터뷰한 방송기자 산드라 진의 자료에 특히 신세를 많이 졌다”고 했다. 이씨의 생전 메모 및 발표문, 이경원 기자와의 육성 인터뷰 음원 등을 활용했다. 이씨가 말년에 초안을 쓴 자서전 『정의 없는 자유(Freedom Without Justice)』도 그의 사후 출간됐다.

감독 "이 시대 또 다른 '이철수'들 껴안았으면"


이철수 사건은 미국에서 제임스 우즈,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주연 영화 ‘트루 빌리버’(1989)로도 만들어졌지만, “아시아계에 대한 고정관념을 강화한 차별적 면이 있는 영화”라고 이성민 감독은 돌이켰다.
하 감독은 이철수 사건이 미국 사법 체계를 변화시키진 못 했지만, 그의 구명 운동을 도운 많은 청년들이 변호사가 됐다고 말했다. 또 이씨를 재조명한 의미를 이렇게 짚었다. “이철수의 삶은 한 인간이 견딜 수 있는 고통의 크기를 넘어섰죠. 한국전쟁이 낳은 아이였고 미국 인종차별의 피해자였어요. 지금 시대에도 또 다른 ‘이철수’들이 존재한다는 걸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도 미혼모‧입양아‧새터민‧이민자‧재소자 같은 사람들이 그럴 수 있죠. 우리가 이런 다른 버전의 ‘이철수’들을 껴안고 이해하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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