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범국 독일이 만든 전쟁영화, 결정적 배반
[이인미 기자]
▲ <특전 U보트> |
ⓒ 영화사 |
1981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36년 만에, 전범국 독일의 입장에서 만든 최초의 전쟁영화가 세상에 나왔다. 우리말로는 <특전 U보트>(아래 '보트')다. 영화의 독일어 원제는 단순하되 강렬한 제목 <그 배(Das Boot)>다.
U보트는 연합군 쪽에 결정적 피해를 많이 입혔던, 악명 높은 독일 잠수함의 별명이며, 독일어로 '운터제부트(해저보트)'를 통칭한다. 그들은 사실상 '특수한 전투'를 위해 특별히 출정했다기보다는 일상적으로 출항하는 형식을 띠었다. 세계대전 동안 대략 천 대 이상의 U보트가 활동했다고 한다. 제조된 U보트의 크기와 모양도 한 종류가 아니었다. 1981년 영화 <보트>의 주인공 U보트는 U-96, 7C형 U보트 중 하나였다. 한편 당시에 연합군에게 나포되거나 침몰 당한 U보트들이 여러 대 있었지만, U-96은 10번 이상 작전을 수행하고 무사히 귀환한 U보트에 속한다. U-96은 1942년 이후 주로 훈련함으로 사용되다가, 1945년 3월 히퍼 분지(Hipper Basin)에 있을 때 미국 항공기에 격추 당했다고 한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첫선을 보인 U보트는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러서는 본격적으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여기서 혁혁한 전공이란, 적국의 함선과 무기와 사람(군인과 민간인)에 대한 공격 성공률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그 혁혁한 전공은 결국 나치 히틀러를 기쁘게 한 승전보라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영화 <보트>는 그 같은 승전보를 칭송하는 영화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다. 영화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치 2인자 괴링(Hermann Göring)이 웃음거리로 소비된다.
영화 <보트>는 여러 버전으로 공개되었는데, 현재 넷플릭스에서 감독판을 관람할 수 있다. 무려 208분(3시간 28분)이라는 사악한 러닝타임을 자랑한다. 허나 몰입도가 높아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 다큐멘터리 <전장을 지배하다, 잠수함 U-96> |
ⓒ eidf |
독일과 전쟁
1981년 영화 <보트>는 U-96이 1941년 10월에 바다로 나가 12월에 돌아오기까지 그 잠수함에서 일어났었던 일을 재현한 영화다. <보트>의 줄거리와 이미지들은 로타르-귄터 부흐하임(Lothar-Günther Buchheim)이 같은 제목으로 발표한 원작소설에 기초해있다.
▲ 영화 스틸컷: <특전 U보트>의 원작자 부흐하임 |
ⓒ eidf |
미술을 공부하고 제2차 세계대전 종군기자로 임명받은 (혹은 섭외된) 부흐하임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그림이나 사진으로 독일 국방군의 이미지를 찬미하는 선전업무에 종사했다. 그가 U-96에 탑승한 것도 바로 그 임무수행의 일환이었다. 그러니까 부흐하임의 U-96 탑승은 독일군인의 전쟁수행역량을 구체적으로 알림과 동시에 우호적으로 부풀리려는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는 이야기다. 위와 같은 그의 경력과 목적을 감안할 때 소설의 발표시기가 비록 독일이 전범국 이미지를 여전히 뒤집어쓰고 있었던 1970년대였지만, 드러내놓고 독일을 변호하기 민망한 때였지만, 독일의 입장에 대한 옹호정서가 들어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의 소설을 토대로 제작된 영화 <보트>는 독일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궁극적으로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지향한다.
사실과 예술
다큐멘터리 <잠수함>은 극영화 <보트>가 촬영되는 동안 원작자 부흐하임이 촬영장에 자주 나타났다는 점을 지적한다. 촬영장에 올 때마다 부흐하임이 영화감독 볼프강 페터젠(Wolfgang Pertersen)과 대립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매번 부드럽게 대화한 것도 아니었다. 부흐하임은 영화의 제작과정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기 일쑤였으며, 영화가 개봉되자 '영화가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는 혹평을 하며 돌아다녔다. 심지어 <보트>가 현실을 왜곡했다는 것을 알리려는 의도로 영화대본을 새로 써서 발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실제 사실과의 부합 여부를 따지자면, 애초에 부흐하임 자신의 소설이 벌써 U-96에 관한 실제 사실에서 꽤 떨어져있었다. 일례로, 다큐멘터리 <잠수함>이 지적하듯, 정훈장교 부흐하임은 당시 용어로 그저 '바드가스트(여행객)'로 불리웠으며, 그 까닭에 U-96 승조원들은 처음에 부흐하임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아마도 그들 사이 불신감은 상호적이었을 것이다. 결국 부흐하임은 소설에서 U-96의 젊은 군인들을 때로 소란스럽거나 때로 혼란스러운 '녀석'들로 묘사한다. 하지만 U-96의 함장과 기관장의 육필수기에 따르면, 실제론 U-96 승조원들이 자율과 협력을 적절히 사용하도록 잘 훈련된 군인들이었으며 작전 중에 군기가 흐트러지는 사례도 없었다 한다.
물론 U-96의 기관장이었던 1916년생 프리드리히 그라데(Friedrich Grade, 106세)도 다큐멘터리에 출연해 '사실과의 불일치'를 지적하며 자신 또한 영화 <보트>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었다고 회상한다. 여담이지만, 영화 <보트>가 개봉하고 몇 년 동안은 왕년에 U보트 함장들이었던 사람들끼리 만나면 영화에 대하여 찬반양론을 주장하다가, 나중에는 대판 싸우는 일까지 일어났었다고 한다.
사실과 고증
앞서도 말했지만 사실과의 불일치는 영화 <보트>에서 비로소 시작된 게 아니었다. 원작소설에서도 사실과의 불일치는 있었다. 소설이나 영화나, 사실과의 불일치라는 면에서만 보면 '오십보 백보'일지 모른다. 그런 데다 사실과의 불일치는 픽션이라는 장르적 속성 때문에 나타나는, 피할 수 없는 부산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소설과 영화는 픽션(거짓말)이며 사실과 불일치하니, U-96의 함장과 기관장의 육필수기만 참(truth, 진실)이라고 판정해야 할까?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참전군인의 수기라 해도 따지고 보면 사실 그 자체와 완벽히 똑같은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데, 엄밀히 말해 그가 회고한 내용 또한 '그가 경험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내가 보고 들은 게 사실이라 말한대도 '누가 본 사실이냐'를 따라 심지어 사실의 내용 자체가 서로 상이하게 나타나곤 한다. 세상 모든 이야기(story)는 어차피 실제 일어났던 사건을 화자(storyteller)의 버전으로 전환&승화한 것이다.
소설이나 영화 같은 예술작품의 경우 줄거리(plot)의 차원은 관점과 해석의 개입 때문에 사실과 다른 부분이 생길 수 있지만 '고증'에 관한 한 '사실적'이어야 예술적 완성도가 높아진다. 고증 면에서 볼 때, 다큐멘터리 <잠수함>이 여러 번 지적하듯이, 1981년 영화 <보트>는 굉장히 훌륭하다. 실제 U-96 크기의 잠수함을 다섯 대나 제작해 장면의 필요를 따라 번갈아가며 찍었다. 배우들의 분장이며 의상, 볼트와 너트 같은 아주 작은 소품까지도 섬세하게 신경썼다. U-96 함장을 비롯해 다른 U보트 함장들에게 두루 감수를 받았다. 게다가 비좁은 잠수함 내부의 답답한 분위기를 실감나게 재현하기 위해 카메라맨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혹은 몸에 붙들어매고) 배우들 사이사이에 존재하는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가 촬영했을 정도로 고증에 충실했다.
실제 사실과 역사적 진실
1981년 영화 <보트>가 개봉되던 날, 극장에 앉아있던 대부분의 관객들은 수많은 U보트를 타고 출정했던 독일군 중 ¾이 생환하지 못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려주는 첫장면에서 대번에 환호성을 지르며 흥분했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영화적 미학 속에 스며들어있는 전쟁의 '역사적 진실'을 감지하게 되면서 관객들은 눈에 띄게 차분해졌다.
사실(fact)과 진실(truth)은 비슷하긴 하나 같지 않다. 사실에도 힘이 있고, 진실에도 힘이 있으며, 각각의 힘은 다른 효과를 낸다. '진정한(real or ture) 사실'과 '진정한 진실'에 한하여, 우리는 우열은 물론 진위도 가릴 수 없다.
끝으로, 다큐멘터리 <잠수함>에 따르면, 영화 <보트>는 결정적 사실 하나를 결정적 시점에서 '배반'하는 영화적 도전(도발?)을 감행하였다. 1941년 실제 현실에서 U-96은 침몰하지 않았지만, 영화 <보트>는 U-96을 침몰시켜버린 것이다. 위대한 거짓말을 성취해낸 것일까? 아니면 'U-96의 무사귀환'이라는 실제 사실을 포기함으로써 '나치 독일의 침몰'이란 역사적 진실을 채택한 것일까?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교육부 '중징계' 협박? 아무렇지도 않다" 연차쓰고 서울 올라온 교사들
- 일본인의 의문 "윤미향 의원이 왜 문제죠?"
- 한 달 뒤 결과 나오는데... 90% 투표하는 신기한 나라
- 박정희조차 시도하지 못한 방식, 윤석열 정부 선 넘었다
- 멸종위기종 담비의 '숨은서식처', 이곳을 없애려 한다니요
- "홍범도 장군 흉상 창고에 처박으면 의병 돼 싸울 것"
- "선생님들 막지 마세요" 두 아이 엄마 호소에 2만 명이 응답했다
- 국힘에 의해 '제명' 당한 군의원 "서울-양평 고속도 재갈 물리기"
- "교권 위상 높이기 위해 학생 인권 제한? 죽이고 살릴 문제 아냐"
- "1969년생인 저, 열심히 살았습니다... 제발 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