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조차 시도하지 못한 방식, 윤석열 정부 선 넘었다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 지난 8월 30일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이 국회에서 열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의원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
ⓒ 연합뉴스 |
독립전쟁이 중국과 러시아를 무대로 전개된 기본 상식을 외면한 채, 공산국가 땅에는 왜 간 것이냐고 캐묻고 있다. 실제 인물이 아닌 흉상을 앞에 놓고 국가보안법 위반 여부를 조사하는 매우 희한한 공안정국이다.
지난 7월 6일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가짜 독립유공자를 가려내기 위한 전수조사가 진행되고 있다고 발언했다. 8월 14일에는 YTN 라디오 <뉴스킹 박지훈입니다>에서 홍범도뿐 아니라 여운형에게도 문제점이 있다고 주장했다. 앞으로 홍범도·정율성뿐 아니라 더욱 많은 독립투사들을 상대로 이색적인 공안정국이 전개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장면이다.
국가정보원이나 경찰·검찰이 아닌 국가보훈부가 주도하는 공안정국은 일찍이 없었다. 박민식 장관이 검사 출신이기는 하지만 공적을 찾아내는 데 익숙한 보훈부 직원들을 데리고 죄과를 찾아내는 강력한 공안정국을 이끌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외부 조력자들이 간여하지 않을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번 일이 희한한 사례에 속한다는 점은 유사한 상황에 처했던 박정희 정권과의 비교로도 알 수 있다. 박 정권이 굴욕적인 한일기본조약 및 부속 협정(통칭 한일협정)을 강행한 1965년 전후에도 한미일 군사동맹의 성사 가능성이 낙관적으로 전망되고 있었다.
박 정권은 한일협정 강행으로 국민적 저항을 초래한 상태에서 미·일의 요구에 따라 군사동맹까지 추진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런 박 정권이 국민적 저항을 무력화시키고자 고안해 낸 아이디어는 윤석열 정권의 방식과 확연히 달랐다.
윤 정권은 무장 항일투사나 좌파 독립운동가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떨어트리는 방식으로 대일 굴욕외교를 정당화하고 한일 군사협력을 강화하려 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홍범도 흉상에 대한 도발이 시작됐다.
박 정권은 정반대 접근법을 선택했다. 비슷한 상황에 놓인 박 정권은 독립운동가 동상을 없애는 게 아니라 요란스럽게 세우는 방법을 채택했다. 서울 광화문광장에 충무공 이순신 동상이 우뚝 서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 1968년 4월 27일 <매일경제> 기사 '충무공 동상 제막' |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
한일협정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1964년 초반부터 격렬했다. 5·16 쿠데타 2년 반 뒤인 1963년 12월 17일에 외형상 민간정부로 출범한 박 정권이 1964년 1월부터 한일협정 타결을 서두른 결과다. 이 때문에 3월 24일에는 약 8만 명이 한일회담 반대 시위 현장에 뛰어나왔다(3·24 시위).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국민들도 굴욕적인 한일관계를 반대했다.
국민들의 저항은 더욱 거세져 6월 3일에는 박정희 하야 구호까지 등장했다. 이날 박정희는 서울 일대에 비상계엄령을 발포했다(6·3운동, 6·3사태). 3·24 시위 이후로 상황이 더 격화됐기에 6월 3일에 그런 조치가 나왔던 것이다.
그처럼 반일 기운이 고조될 때인 그해 5월 17일, 서울 시내에서 진기한 이벤트가 벌어졌다. 친일 프레임에 갇힌 박 정권이 반일 투사들의 석고상을 세우는 일이었다. 그해 5월 18일 자 <동아일보> 사설은 "5월 17일, 남대문서 중앙청에 이르는 중간 녹지대에 애국선열 서른일곱 분의 입상(立像)과 좌상(坐像)의 제막식이 있었다"라며 "이조시대의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그리고 근세의 안중근 의사, 손병희 선생 및 김구 선생 등이 포함"됐다고 전했다.
애국선열들이 서 있거나 앉아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석고상들이 서울 남대문에서 경복궁 입구까지 세워졌다. 이순신·안중근·손병희·김구 외에도 최무선·권율·사명당·최익현·민영환·전봉준·손병희·이준·안창호·윤봉길·이강년·허위·김좌진·이상재의 석고상도 건립됐다. 석고상 37개 중 18개가 반일 코드와 맞닿았던 것이다.
친일 프레임에 갇힌 박 정권이 반일 영웅들의 석고상을 서울 한복판에 세웠다. 국민들의 반일 열기를 달래고 역이용해 정국 안정과 국민통합을 도모하려는 의중, 자신들이 절대로 친일파가 아님을 보여주려는 의중 등을 읽을 수 있다.
박 정권은 한일협정 강행 뒤에는 동상 건립을 본격화했다. 한일협정 이듬해인 1966년 광복절에 동상 조각을 추진할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 명단을 공개한 박 정권은 1968년부터 동상을 하나씩 선보였다.
제1탄은 이순신 동상이었다. 1968년 4월 27일 자 <매일경제>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 제막식이 착공 7개월 만인 27일 상오 10시 세종로 네거리 녹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김종필 당의장, 3부 요인과 수많은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대히 거행됐다"고 보도했다.
박 정권이 이순신 동상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지는 위 기사의 이어지는 대목에서 압축적으로 드러난다. "이날 제막된 충무공 동상은 애국선열조상건립회(총재 김종필)와 서울신문사 주관으로 박 대통령 헌금으로 건립된 20여 M이나 되는 국내 최대 규모의 동상이다"라는 문장은 박정희가 자금을 제공했고 김종필이 실무를 주관했으며 이 동상이 국내 최대 규모였음을 동시에 보여준다.
▲ 1968년 4월 27일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 제막식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
ⓒ 정부기록사진집 |
이순신 동상 제막식 1주일 뒤인 1968년 5월 4일에는 세종대왕 동상이 세워지고, 다시 1주일 뒤인 5월 11일에는 반일 승려인 사명대사의 동상이 세워졌다. 뒤이어 이이·원효·김유신·을지문덕 동상이 세워지고, 1970년 10월 12일에는 3·1운동 영웅인 유관순 열사의 동상이 건립됐다. 그런 다음, 신사임당·정몽주·정약용·이황·강감찬·김대건 동상에 이어 윤봉길 동상이 세워졌다.
1964년 석고상 건립 때는 37명 중 18명(48%)이 반일 코드와 연관돼 있었다.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가 세운 동상들의 경우에는 15명 중 4명(27%, 이순신·사명대사·유관순·윤봉길)이 반일 코드와 관련됐다. 한일협정 반대 열기가 매우 뜨거웠을 때와 그것이 잠잠하기 시작했을 때의 차이를 생각하게 된다. 이 이벤트의 목적이 국민들의 반일 열기를 달래는 데 있었음이 이런 데서도 나타난다.
박 정권이 석고상과 동상을 건립한 표면적 목적은 애국심 고양이었다. 석고상 건립 의도와 관련해 1964년 4월 25일 자 <동아일보>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선정한 37인은 을지문덕·왕건·이율곡·이순신·김정희·안창호 등 조국을 지켰거나 빛낸 이들"이라고 전했다. 나라를 지켰거나 빛낸 인물들을 선정해달라고 박 정권이 국사편찬위원회에 요청했었음을 알 수 있다.
한일협정으로 반일감정이 고조되던 시기에 박 정권이 반일 인물들의 석고상이나 동상을 세운 것은 이들이 한국 민중의 마음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박 정권은 이들의 이미지를 이용해 친일 프레임을 털어버리고 정권 안정을 기하고자 했다. 이런 의도를 '애국심 고양'이라는 표면적 명분 속에 감췄다고 볼 수 있다.
박 정권은 한일협정 강행으로 국민들과 정면 충돌했지만, 국민들 마음속의 항일·반일 정서까지는 건드리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국민들의 역사의식을 역이용해 정권을 안정시키려 했다.
윤 정권은 강제징용 제3자 변제나 한일 군사협력 강행으로 국민들과 충돌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국민들 마음속의 역사의식까지 지우려 하고 있다. 박정희 정권도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윤석열 정권은 그러한 새로운 시도를 위해, 저세상의 독립유공자들을 도로 불러와 국가보안법 위반 여부를 따지고 공안정국을 조성하려 하고 있다. 국정원이 아닌 보훈부의 주도하에, 흉상을 모셔 놓고 그런 문초를 하고 있다. 우스꽝스러운 이 장면은 윤석열 정권의 새로운 시도가 성공보다는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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