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장군 흉상 창고에 처박으면 나라도 가만 안 있을 것"

조정훈 2023. 9. 4.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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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홍범도 장군 평전 낸 이동순 교수 "장군이 편 가르기 볼모 돼 수모당하고 있어"

[조정훈 backmin15@hanmail.net]

 홍범도 장군의 평전을 펴낸 이동순 영남대 명예교수. 이 교수는 "윤석열 정부가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창고에 처박는다면 제2의 의병이 되겠다"며 분노했다.
ⓒ 조정훈
 
▲ 시 '홍범도 장군의 절규' 낭독하는 이동순 교수 독립운동가의 후손이자 홍범도 장군의 생애와 행적을 연구해온 이동순 영남대 명예교수(시인)가 자신이 쓴 시 ‘홍범도 장군의 절규’를 낭독하고 있다. ⓒ 조정훈

[기사수정 : 5일 오후 5시 33분]
 

"그래도 그냥 마음 붙이고 / 하루하루 견디며 지내려 했건만 /
오늘은 뜬금없이 내 동상을 / 둘러파서 옮긴다고 저토록 요란일세

내가 오지 말았어야 할 곳을 왔네 / 나, 지금 당장 보내주게 /
원래 묻혔던 곳으로 돌려보내 주게 / 나, 어서 되돌아가고 싶네..."

독립운동가의 후손이자 홍범도 장군의 생애와 행적을 연구해 온 이동순 영남대 명예교수(시인)는 육군사관학교와 국방부가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철거하려는 것에 대해 "백선엽의 동상을 세우고 이승만 기념관을 건립하려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일 것"이라며 "만약 홍 장군의 흉상을 창고에 처박는다면 내가 의병이 되겠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동순 교수는 1920년대 초반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을 조직하고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송부한 사건으로 대구형무소에 투옥돼 풀려난 후 순국한 독립운동가 이명균 선생의 손자이다.

이 교수는 대학 4학년 때인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마왕의 잠'으로 등단했고 1989년에는 같은 신문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당선되었다. 충북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를 지냈고 2012년부터 영남대학교로 옮겨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지냈다

1982년 민족서사시 '홍범도' 2800행을 써 <창작과비평> 폐간호에 발표했고 2003년 5부작 10권을 완성해 발간했다. 또 올해 3월에는 홍범도 장군의 생애를 문학적으로 재조명한 평전 <민족의 장군 홍범도>를 출간했다.
   
지난 3일 대구 팔공산 인근에서 만난 이동순 교수는 홍범도 장군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할아버지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어릴 적 김천에 있는 할아버지 댁에 가보면 안방 천정에 일본도로 찔러 그어놓은 자국이 열 몇 군데 보였다"면서 "'도배를 안 하고 이걸 보여줘야 한다. 일본 경찰들이 와서 천정에 무언가를 감추었나 싶어 일본도로 찔러 검색한 자리다'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할아버지의 말씀 같은 게 들렸고 그걸 '유촉(遺囑·죽은 뒤의 일을 부탁함)'이라고 하는데 할아버지가 '네가 시인이라면 어떤 시를 써야 되는지, 국문학을 연구하는 학자라면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될지를 잘 판단하라'는 말이 자꾸 뭔가 추궁하는 것처럼 귀에 쟁쟁하게 따라다녔다"고 설명했다. 

그는 "24살 때 신춘문예에 당선돼 시인이 되었는데 내부에서 자꾸 무언가 꿈틀꿈틀하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당시부터 독립운동사를 읽기 시작했는데 의병장들의 일대기를 보면 대부분 선비, 지식인, 유생들이었고 서민은 신돌석 장군과 홍범도 장군 두 분뿐이었다고 했다.

그는 "홍범도 장군을 테마로 그 일대기를 시로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1982년 본격적으로 민족서사시 '홍범도'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는데 창비에 발표한 후 꽉 막혔다"며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부정확하고 소년시절이나 성장기에 대한 기록이 없어 머뭇거리다가 2000년 미국에 방문교수로 가 시카고에 살면서 하버드대 동아시아연구소 도서관에서 장군의 자료를 찾았다"고 회고했다.

이 교수는 이곳에 남한과 북한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나온 연구논문, 러시아에서 나온 회고록까지 홍범도 장군에 대한 기록들이 있어 깜짝 놀랐다고 한다. 이 교수는 이후 장군의 시를 완성하고 평전을 쓸 수 있었다고 전했다.

"빨치산으로 참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
 
 홍범도 장군의 평전을 펴낸 이동순 교수가 홍 장군의 묘역 앞에서 책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 이동순
이 교수는 국방부가 입장문에서 밝힌 '홍 장군이 봉오동과 청산리전투에 빨치산으로 참가했다는 의혹이 있다'는 주장에 "말도 안 되는 유치한 이야기"라며 "빨치산의 용어부터가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고 일갈했다.

그는 "20세기 초반 러시아에서 일어난 볼셰비키 혁명 과정에서 당시 인정받지 못한 비정규 부대가 산속으로 들어가 유격전을 펼쳤는데 당시 이들을 '파르티잔(partisan)'이라고 불렀고 북한에서 조선말로 표현할 때 발음이 어려우니까 우리식 발음으로 '빨치산'으로 불렀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당시 우리 동포들이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했던 홍범도 장군 이름 앞에 '조선의 위대한 빨치산'을 붙여 불렀고 조선 독립군, 조선의 항일유격대라는 개념으로 빨치산이라고 했다"고 말했다.

이어 "6.25가 일어나고 남쪽으로 내려왔던 인민군 중 보급로가 차단돼 북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지리산이나 백운산, 팔공산 이런 데로 숨어들어 가 싸우다가 궤멸된 사람들을 빨치산이라고 하는데 홍범도 장군의 빨치산과 전혀 개념도 다르고 차원도 다르다"고 덧붙였다.

이 교수는 "윤석열 정부에서 홍범도 장군을 빨치산이라고 하면서 남로당 내지 6.25전쟁 시기의 빨치산 개념과 뒤섞어 홍범도 장군을 매도하고 덮어씌우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동순 교수는 또 홍범도 장군을 공산주의자나 빨갱이로 폄훼하는 것에 대해 "마르크스-레닌주의 유물론을 공부했던 공산주의자와 비교한다면 홍 장군은 심정적 공산주의자였다"라며 "가난한 사람을 위하고 노동자와 농민을 위하고 특히 소련에 들어와 있는 우리 조선 독립군들에게 무력을 지원해 주고 피복과 식량을 지원해 주기 위해 공산당 당원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소련 공산당에 가입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홍범도 장군을 김일성 정권의 공산주의자와 비교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라고 강조했다.
  
 1946년 12월 7일자 '어린이신문'. 조선 해방을 위하여 몸을 바치신 영웅으로 홍범도 장군의 이야기가 기사에 실렸다.
ⓒ 어린이신문
 
자유시 참변의 책임을 홍범도 장군에게 돌리는 것에 대해서도 이 교수는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국방부에서 발표한 문서를 보면 자유시에 있었던 우리 독립군 부대원 숫자를 터무니없이 부풀려 놓고 전원이 몰살당했다고 한다"며 "그 내용을 모르는 일반 시민들이 보면 '홍범도는 죽일 놈이다, 무슨 독립투사냐' 이런 식으로 호도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홍범도 장군도 편 가르기의 도구가 되어 수모를 당하고 있다. 너무 눈물겹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고 애통해했다.

이 교수는 후배가 보내준 사진이라며 1946년 12월 7일 자 <어린이신문>을 보여주었다. 당시 신문에는 '조선 해방을 위하여 몸을 바치신 분들 8, 홍범도 장군'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는 "해방이 된 후 당시는 좌우 대립이 심할 때였는데 홍범도 장군 이야기가 어린이들을 위한 위인전 기사로 나왔다"며 현재 상황이 당시보다 더 안 좋다고 한탄했다.

"윤 정부, 유족 없어 만만한 대상으로 보는 것 같아"

이 교수는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옮기려는 이유가 윤석열 정권이 뉴라이트 계열의 역사 인식을 수용하고 이승만 기념관 설립과 백선엽 대장의 친일 행적을 지우는 데 굉장히 불편한 요소로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이승만 기념관을 세우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무언가 많은 저항이 예상되니까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독립운동사의 근본을 한 번쯤 혼란을 줘 뒤흔들고 그다음에 당당하게 건립하려는 것으로 보인다"며 "백선엽 띄우기도 노골적으로 하는데 같은 맥락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홍범도 장군은 유족도 없으니까 가장 만만한 대상으로 보는 것 같다"며 "그게 더 가슴이 아프고 연민이 든다"고 고개를 떨구었다.

이동순 교수는 "육사 안에 있는 독립운동가 다섯 분들을 모두 독립기념관으로 옮기겠다고 했다가 지금은 네 분은 그대로 두고 홍범도 장군만 옮기겠다고 하는데 독립기념관에서는 안 받겠다고 하니 옮겨 설치할 데가 없다"라며 "아마 창고로 가는 게 아닌가 염려스럽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가톨릭에서는 마리아상이나 성인들의 석고상 등을 성물이라고 하는데 함부로 버리면 벌 받는다는 게 신자들 사이에 믿음으로 있다"며 "부러지거나 칠이 벗겨지거나 그러면 땅에 묻는다, 그게 예의다. 홍 장군의 경우에도 만약 육사에서 쫓아내겠다면 묻는 게 맞다"고 주장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장군의 흉상을 창고에 처박으면 나라도 가만히 안 있을 것"이라고 분노했다.

이어 "역사라고 하는 것은 거울이다. 거울을 통해 오늘을 비추어봐야 한다"며 "그 과정에서 반성도 얻고 교훈도 얻어야 되고 어떤 깨우침도 가져야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러면서 "홍범도 장군을 이렇게 내동댕이치고 훼손한다면 우리 후손들에게 어떤 조상으로 비치겠나"라며 "장군을 난도질하는 국방부와 보훈부 관계자들이 아주 깊이 반성하기를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이동순 교수가 쓴 시 '홍범도 장군의 절규'이다.

홍범도 장군의 절규
                                .
그토록 오매불망
나 돌아가리라 했건만
막상 와본 한국은
내가 그리던 조국이 아니었네

그래도 마음 붙이고
내 고향 땅이라 여겼건만
날마다 나를 비웃고 욕하는 곳
이곳은 아닐세 전혀 아닐세

왜 나를 친일매국노 밑에 묻었는가
그놈은 내 무덤 위에서
종일 나를 비웃고 손가락질하네
어찌 국립묘지에 그런 놈들이 있는가

그래도 그냥 마음 붙이고
하루하루 견디며 지내려 했건만
오늘은 뜬금없이 내 동상을
둘러파서 옮긴다고 저토록 요란일세
  
야 이놈들아
내가 언제 내 동상 세워달라 했었나
왜 너희들 마음대로 세워놓고
또 그걸 철거한다고 이 난리인가

내가 오지 말았어야 할 곳을 왔네
나, 지금 당장 보내주게
원래 묻혔던 곳으로 돌려보내 주게
나, 어서 되돌아가고 싶네

그곳도 연해주에 머물다가
무참히 강제이주 되어 끌려와 살던
남의 나라 낯선 땅이지만
나, 거기로 돌아가려네

이런 수모와 멸시당하면서
나, 더 이상 여기 있고 싶지 않네
그토록 그리던 내 조국 강토가
언제부터 이토록 왜.놈.의 땅이 되었나

해방조국은 허울뿐
어딜 가나 왜.놈.들로 넘쳐나네
언제나 일본의 비위를 맞추는 나라
나, 더 이상 견딜 수 없네

내 동상을 창고에 가두지 말고
내 뼈를 다시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로 보내주게
나 기다리는 고려인들께 가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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