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장관 5명 나온 고택, 하룻밤에 5만 원입니다

황호택 2023. 9. 4.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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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의 보석, 신안 천사섬 3] 천재의 섬 장산도

신안군에는 1004개의 섬이 있다. 1004는 날개 달린 천사다. 신안군은 천사 조각상 1004개를 세우고 있다. 섬 하나에 천사가 하나다. 그 섬들에 가면 생명이 꿈틀대고 역사가 흐르며 자연이 숨 쉬고 낭만이 넘실댄다. 미래의 역사·문화·환경 자원으로 각광 받는 신안 1004섬. 그 매력을 새롭게 만나는 연중기획을 시작한다. 황호택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겸직교수와 이광표 서원대 교수가 매주 1회 집필한다. <편집자말>

[황호택]

장산도(長山島)는 남해안에서 다도해를 따라가다 서해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다. 목포에서 쾌속선을 타고 40분이면 장산(북강)항에 닿는다.

장산도는 이름처럼 산줄기가 섬 전체로 이어지는 섬이다. 장산면 도창(道昌) 마을에는 인근 섬들로부터 세금으로 거둔 미곡을 보관하던 창고가 있었다. 원래 지명(地名)은 '쌀 창고'를 의미하는 도창(都倉)이었으나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역사적 유래를 무시하고 멋대로 바꾸었다는 주민의 증언이다.

도창리 노거수림은 식량을 노략질해가던 왜구로부터 양곡 보관창고를 은폐하기 위해 조성된 숲이다. 바닷바람을 막는 방풍림의 역할을 겸했다. 마을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노거수림(老巨樹林) 안에는 팽나무, 주엽나무, 곰솔 등 아름드리나무 100여 그루가 우거져 있다. 공원 안에 흩어져 있는 '내 고장의 역사인물' 장병준 기념비와 공적비들이 이 마을의 유래를 말해준다.
 
 장산면사무소 소재지를 가로지르는 노거수림은 길이가 352m나 된다.
ⓒ 신안군
 
 아름드리나무들이 빽빽히 들어찬 도창리 노거수림.
ⓒ 신안군
섬 안에는 지석묘가 여러 곳에 있어 청동기 시대부터 인구가 많고 이를 떠받치는 물산이 풍부했음을 보여준다. 장산중학교 가까운 곳에 백제식 석실 고분은 6, 7세기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왜구가 발호하면서 섬을 비우는 공도(空島) 정책으로 주민이 살지 않던 섬에 사람들이 다시 살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중반. 장산도는 만(灣) 입구를 막으면 제방 내부를 토지로 확보할 수 있어 간척하기에 적합한 지역이었다. 인구가 늘어나자 주민들은 간척으로 토지를 넓혀나갔다.

간척으로 이룬 거부, 장인걸

입도조(入島祖, 섬에 처음으로 정착한 각 성씨(姓氏)의 조상을 이르는 말) 인동 장씨 장인걸(張仁傑)은 1770년경 함평 해남 진도를 거쳐 장산면 대리에 정착했다.

장인걸은 간척사업을 벌여 넓은 농토를 확보했고, 4대손 장도규 대에 이르러 대지주로 자리 잡았다. 장도규는 농지와 염전을 관리하고 쌀과 소금을 실어나르기 위해 운수업까지 하면서 거부를 이뤄 도계(道界)를 넘어 충남 강경에도 농지를 소유했다.

장산면 대리에는 장인걸의 6대손인 독립운동가 장병준(張柄俊, 1893~1972)의 생가가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8칸 겹집 사랑채가 나온다. 사랑채는 현재 터만 남아 있다. 사랑채에서 다시 대문을 하나를 더 거쳐야 6칸 겹집 본채로 들어갔다. 본채는 5명의 의원·장관(병준 홍염 재식 하진 하성)이 나온 집이라서 속칭 '5장관 집'이라고 불린다. 사랑채 대문 맞은 편에는 일꾼들이 기거하는 초가집이 있었다.
 
 장진섭과 네 아들(병준 병상 홍재 홍염)의 가계도.
ⓒ 신안군
 
장산역사문화관에는 병준이 주도했던 장산도 3·18 만세운동 전시실이 있다. 장진섭의 맏아들인 병준은 보성전문 법학과를 나와 니혼(日本)대학 법학과에 진학했으나 1917년 병을 얻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서울에서 3·1 만세운동에 참여한 직후 장산도에 내려온 장병준은 마을 청년들과 함께 거사를 준비했다.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한 3·1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퍼져나가던 3월 18일 전남 지방에서는 가장 먼저 장산도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병준은 수배령이 떨어지자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와 한성정부 설립을 위한 국민대회 간부로 활약하다가 중국으로 망명했다. 1919년 4월에는 상하이에서 3·1 만세운동의 열기를 타고 출범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됐다. 이어 1920년 초 귀국해 3·1운동 1주년 투쟁을 추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돼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다. 1922년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병준은 포양(包洋)이라는 아호가 말해주듯 독립운동이나 가정 혼사 등에서 좌우를 아우르는 노선을 걸었다. 1927년에는 좌우가 합작한 신간회 운동에 참여했다. 그의 묘소는 고향인 장산면 대리에 있다가 2006년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됐다. 장산도에 있는 원래 묘역도 보존되고 있다.
    
 장병준 생가. 양반가 한옥의 위세를 보여주는 솟을대문 집에서 장병준은 장진섭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 신안군
 
병준의 아버지 장진섭은 병준 병상 홍재 홍염 등 네 아들을 서당에 보내지 않고 목포 서울 일본으로 보내 신교육을 받게 했다. 진섭은 세 형제 중에서 가장 적은 재산을 물려받았는데, 일본과 서울에 유학 보낸 자녀들의 학비를 조달하느라 형제들에게 돈을 빌리러 다닌 적도 있었다고 한다. 아들 병준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일 때는 거처하는 방에 불을 때지 않고 냉골방에서 지낼 만큼 아들 사랑이 극진했다.   

부를 바탕으로 자녀들 신교육

셋째 홍재는 광주서중 재학 중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앞장섰다가 체포돼 고문을 심하게 당해 병석에서 사망했다.

넷째 홍염은 1930년대 서울에서 항일 학생시위를 주도하고 중국으로 망명해 아나키스트 조직에 들어가 항일 무장투쟁을 벌인 독립운동가. 홍염은 휘문고보 5학년이던 1929년 6월 전국스트라이크옹호동맹 위원장을 맡아 동맹휴교와 항일운동을 주도하였다.

그 뒤 엿장수로 가장하고 서울에서 신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망명했다. 베이징 페킹아카데미(현 칭화대학)에서 공부하다가 1931년 베이징민국대학 정치경제학과로 편입했다.

이어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가 사격술을 익혔다. 그는 학생 신분을 이용해 아나키스트들과 힘을 합쳐 일경과 밀정을 처단하는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사격술이 뛰어나 '북경의 쌍권총'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홍염은 독립운동을 모금하러 국내로 잠입하기도 했다. 서울 북촌(종로구 계동)에 사는 인촌 김성수를 찾아가 독립운동 자금을 달라고 간청했다. 이야기를 듣고 인촌은 슬그머니 일어서서 방을 나갔다. 돈을 가지러 가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오래 기다려도 인촌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병풍처럼 만든 벽장 문 사이로 금고가 보였다. 금고문이 열려 있었다. 그때서야 '자리를 비운 사이에 돈을 가져가도 좋다'는 주인의 뜻을 알아차렸다. 해방 후 반민특위 특별검찰관으로도 활동했던 홍염이 이 일화를 제헌국회 동료 의원들에게 털어놓으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장홍염이 독립운동 자금을 가져간 서울 북촌 인촌고택. 안방에 있는 전자(篆字) 병풍을 좌우로 밀면 금고가 드러난다.
ⓒ 황호택
 
홍염은 중국에서 계속 독립운동을 하다 1932년 9월 베이징 일본총영사관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고 서울에서 광주학생 항일 운동과 관련한 시위를 주도한 혐의 등으로 기소돼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다. 건국 후 제헌·2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장산역사문화관 앞에는 은목서로 가득 찬 아름다운 공원이 조성돼 있다. 은목서는 꽃의 향이 샤넬 No5.의 주원료로 쓰인다. 공원 한가운데 장홍염 선생의 흉상이 자리 잡고 있다. 독립투사의 향기가 공원에 가득하다.

국가사회에 봉사한 천재 집안의 기풍

장산도가 '천재의 섬'으로 알려진 것은 진섭의 둘째 아들인 병상의 자손들이 고위 관직에 오르고 세계 유수 대학의 교수가 되면서다. 철도공무원을 하던 병상은 직장에서 퇴근해 집에 돌아오면 자녀들의 연필을 깎아주었다. 병상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지도층의 사회적 책무)의 실천에도 앞장섰다.

네 아들 모두가 6·25 참전용사. 병상의 둘째 아들인 충식은 서울대 공대 재학중 학도병으로 참전해 압록강 전투에서 중공군의 기관총을 맞아 어깨 관통상을 입었다. 넷째 아들 재식은 아버지의 엄명으로 열여섯 살 어린 나이에 입대해 낙동강 전투에 참전했다.
  
 은목서 공원에 있는 독립투사 장홍염(1910~1990)의 흉상.
ⓒ 황호택
충식은 하진(전 여성부장관), 하성(전 고려대 교수·전 주중대사), 하경(광주대 교수) 하원(전 KDI 교수)을 두었다. 충식은 부상한 몸으로 장산도에 피란 올 때 딸 하진을 업고 왔고, 하성은 1953년 큰할아버지(종조부)인 장병준 생가에서 태어났다.

재식(3선 의원·산자부 장관 역임)의 장남 하준은 30년 넘게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교수를 하다 런던대로 옮겼다. 차남 하석은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 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문화컨텐츠학)가 2008년 재식을 네댓 차례 만나 자녀 교육 이야기를 들어 조선일보 '조용헌 살롱'에 실었다.

하준은 홍익초등학교 4학년 때 홍익대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가 읽었다. 1시간에 250페이지를 읽었다는 아들 말이 믿기지 않아 책을 펴놓고 테스트를 해보면 정확하게 대답을 했다.

하석은 형보다 한술 더 떴다. 중3 때 치른 토플 점수가 630점. 어머니 최우숙은 고교 영어교사를 했다. 하석은 미국 10대 고교에 속하는 마운트 허먼 고교를 졸업하고 칼텍(캘리포니아 이공대학)에 들어갔다.

단돈 5만 원에 천석꾼 안방에서 하룻밤

신안군은 장병준 생가와 인동 장씨 고택을 허니문 하우스로 단장해 천재 명문가의 기를 받고 싶은 신혼부부나 연인들로부터 예약을 받는다. 5만 원을 내면 천석꾼이 자던 안방에서 신혼 첫날밤을 보내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고택 안방의 킹 사이즈 침대에 누워 통유리로 잔디와 수목이 짙푸른 마당과 정원을 내다보노라면 천석꾼이 부럽지 않다. 장산면은 주민이 살지 않는 빈집을 리모델링해 단체 손님을 받는 사업도 준비하고 있다.
 
 조형미가 돋보이는 인동 장씨 고택의 돌담.
ⓒ 황호택
 
장병준 일가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층(上層)문화라면 장산도에는 서민 대중의 기층(基層)문화도 활발했다. 장산도에 내려오는 민속문화 장산들노래(전남 무형문화재)는 부녀자들이 논일을 하면서 불렀던 노동요. 노랫가락이 여성스럽고 늦은 가락에서 중모리, 중중모리 등 빠른 가락으로 변화해 지루하지 않다. 신안씻김굿(전남 무형문화재)은 병을 낫게 하거나 죽은 이의 원한을 씻어주어 극락으로 보내는 굿이다.

향토색이 짙은 장산들노래와 신안씻김굿은 이귀인 명인이 다듬었다. 이 명인은 8대째 내려온 무속인. 원래 전주 이씨 가문이었으나 8대조가 흑산도로 귀양 오면서 먹고살기 위해 무속과 인연을 맺었다. 이 명인은 15세 무렵 농악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집안의 내력인 굿판 일을 거들게 되었다. 살아생전에 민요와 풍물로 장산도의 인간문화재라는 소리를 들었다.

진도 금갑리 당골가에서 시집온 아내 강부자도 평생 굿판에서 이 명인과 손발을 맞추었다. 노거수림 한 모퉁이에 들노래 전수관이 건립돼 민속예술 전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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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박남일, 《장병준 평전》, 도서출판 선인, 2016 이해준, 장산도·하의도 문화의 배경,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소 도서문화 제3집, 1985 조용헌, <조용헌 살롱> 수재집안, 《조선일보》2002.6.20, 6.25, 6.30 최성환, 《천사섬 신안 섬사람 이야기》, CREFUN,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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